♣ 역사(歷史) 마당 ♣/- 인물, 단체

[세조 계유정난시 공신]이계전(李季甸)

Bawoo 2017. 9. 17. 23:37


이계전(李季甸, 1404년 ~ 1459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한산이며, 자는 병보(屛甫),

호는 존양재(存養齋)이다.

생애

친조부는 목은 이색, 외조부는 권근이다. 1427년(세종 9)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가 되었고, 김문 등과 함께《강목통감훈의(綱目通鑑訓義)》를 편찬하였다.[1] 1452년(문종 2)에는 《세종실록》을 편찬하였고, 벼슬은 동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계유정난에서 공을 세워 정난공신이 되었고, 사육신 사건에 있어서도 이에 협력하지 않아 좌익공신으로도 녹훈되었다. 이계전은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이개의 숙부였으나, 세조는 이를 연좌하여 처벌하지 않도록 하였다.[2] 또한 이계전의 모친이 죽자 쌀·콩 아울러 30석과 종이 1백 권, 석회 40석, 유지석 3부와 관곽 등을 내려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3] 세조 치세에서는 호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1459년 경기도관찰사 재임 중에 죽었다. 세조는 이에 조회와 저자를 이틀간 중지하고 쌀·콩 아울러 70석과 종이 1백 권을 부의하였다.[4]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가족

  • 증조부 : 이곡(李穀)
    • 조부 : 이색(李穡)
      • 아버지 : 이종선(李種善)
      • 어머니 : 안동권씨
        • 형님 : 이계주(李季疇)
        • 형님 : 이계린(李季疄) - 이백강과 정순공주의 사위
        • 동생 : 이계원(李季畹)
        • 부인 : 진씨
          • 아들 : 이우(李堣)
          • 아들 : 이파(李坡)
          • 아들 : 이봉(李封)

각주

  1. 이동 《세종실록》 74권, 1436년(세종 18) 7월 29일
  2. 이동 《세조실록》 4권, 1456년(세조 2) 6월 14일
  3. 이동 《세조실록》 4권, 1456년(세조 2) 6월 27일
  4. 이동 《세조실록》 17권, 1459년(세조 5) 9월 16일

[위키백과]

----------------------------------------------------------

1427년(세종 9) 친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집현전학사가 되고, 1436년 왕명으로 김문(金汶) 등과 『강목통감훈의(綱目通鑑訓義)』를 편찬하였다.

1445년 집현전직제학으로 있을 때 세자(문종)가 사창(社倉)과 의창(義倉) 등의 현황을 묻자, “근년의 계속된 가뭄으로 사창과 의창이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굶주린 백성에게 곡식을 방출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2, 3년만 계속된다면 국가에 비축곡이 고갈되니, 앞으로는 스스로 생계를 보존할 수 없는 백성에게만 지급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한, 저화(楮貨) 사용이 백성들에게 불편이 많다는 점을 들고, 우리나라에서는 포목을 사용한 지 오래되었고 불편도 없으니 구태여 저화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당시 시행 중이던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계전에 의하면, 답험관의 사사로운 처리로 백성들의 원망이 날로 심해 공법(貢法)을 제정했는데, 이를 계속 시행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때 대간들이 한글의 제정·보급과 불교에 대한 종실·양반들의 호의적인 태도를 격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리자, 세종이 진노해 대간들을 의금부에 하옥시키고 국문을 받게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왕의 진노가 심하니 상소를 단념하라고 만류했으나, 의금부에 하옥될 것을 각오하고 대간들의 언로를 막아서는 안된다고 계문(啓聞)하였다.

1447년 동부승지, 1450년 좌부승지를 거쳐 3개월 후에 도승지로 승진하였다. 1452년(문종 2)『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에 참여해 정인지(鄭麟趾) 등과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같은 해 호조판서에 이어 병조판서로 자리를 옮겼으며, 병조판서로 재임할 때 수양대군이 왕권 강화를 위해 육조직계체제(六曹直啓體制)를 부활하자 예조판서였던 하위지(河緯地) 등과 함께 반대하는 소를 올려 폐지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이를 용납하지 않고 더욱 전제권을 강화해 나갔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성삼문(成三問) 등 집현전 출신의 학자가 중심이 되어 세조 제거 운동을 일으켰으나, 이에 참여하지 않고 세조를 도왔다. 이 공로로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좌익공신(佐翼功臣)에 녹훈되었다. 1455년(세조 1) 이조판서를 제수받았고, 다음 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에 어머니가 죽자, 조정에서는 미·두 30석과 종이 100권, 석회 40석과 관곽 등을 보내 극진한 조의를 표하였다. 1458년세조로부터 세조의 정권 획득 과정에서 보인 협력과 사육신사건에 참여하지 않고 도운 공로에 대해 칭송하는 특별 교서를 받았다.

이듬해인 1459년 7월 경기관찰사로 나갔다가 9월에 죽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정보- 소설: 그대, 비해그대, 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