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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선생의 18제자 중 1인]윤종진[尹鍾軫]

Bawoo 2017. 7. 10. 22:26


[다산초당 올라가는 길 중간쯤 우측에  자리잡고 있는 선생 묘]






순암호설(淳菴號說)

다산이 막내 제자 윤종진에게 써준 순암호설(淳菴號說)’

 

 

윤종진(尹鍾軫, 1803~1879)은 자가 금계(琴季), 호는 순암(淳菴), 아이 때 이름은 신동(信東) 또는 원례(元禮)였다. 행당(杏堂) 윤복(尹復, 1512~1577)10세손이자 다산초당의 주인인 윤단(尹慱, 1744~1821)의 손자다. 윤단의 장남 윤규노(尹奎魯, 1769~1837)의 막내로 넷째 아들이다.

 

다산 정약용은 1808년에 처음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윤종진은 당시 여섯 살 꼬마로 초당 강학의 끝자리에 끼어 앉아 형들과 함께 글공부를 시작해 다산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다산은 몸이 약하고 체구가 작은 그를 위해 <순암호설(淳菴號說)> 외에 몇 편의 증언을 친필로 따로 써주어 그를 분발시켰다. 오늘날 귤동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길 중간에 있는 무덤의 주인이 바로 그다. 현재의 비문은 1914년 성균관 박사 이금(李嶔)이 썼다.

 

다산이 그에게 준 증언은 윤종진의 6대손인 윤영상 선생이 소장한 <다산사경첩(茶山四景帖)> 안에 제목 없이 실려 있다. 첫머리에 다산초당의 4경을 노래한 다산사경(茶山四景)’ 시가 실려 있고, 이어 몇 편의 증언을 잇달아 수록했다. 모두 다산의 친필이다. 이제 차례로 살펴보겠다.

 

왜소한 제자 윤종진에게 지어준 호, 순암

 

다산은 체격이 작은 윤종진에게 대인의 뜻을 품고 노력하라고 독려했다.

 

<다산사경첩>에 수록된 순암호설을 먼저 읽어본다. 다산이 막내 제자 윤종진에게 순암이란 호를 지어주며 그 이름에 담긴 의미를 설명해준 내용이다.

 

안영(晏嬰)과 전문(田文)1)은 모두 몸집이 왜소하고 비루하여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혹 직간으로 임금을 바로잡고 혹 기절을 숭상하여 세상에 이름났다. 당나라 때 배도(裵度)2)와 우리나라의 이원익(李元翼, 1547~1634)3)은 모두 체격이 보잘것없었어도 이름난 신하와 훌륭한 재상이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어째서 그런가? 몸이 집이라면 정신은 주인과 같다. 주인이 진실로 어질다면 비록 문설주에 이마를 부딪치는 작은 집에 살더라도 오히려 남들이 공경하여 아끼게 되고, 주인이 진실로 용렬하다면 비록 고대광실 너른 집에 산다 해도 사람들이 천히 여겨 업신여기는 바가 된다. 이는 이치가 그러한 것이다.

, 너 신동(信東)은 부모의 늦은 기운을 받아 체질이 가녀려 나이가 열다섯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다. 비록 그렇지만 정신과 마음이 네 몸의 주인인 것만큼은 마땅히 고대의 거인 교여(僑如)나 무패(無霸)4)와 다르지 않다. 네가 스스로를 작다 여기지 않고 뜻을 세워 힘을 쏟아 대인과 호걸이 되기를 기약한다면 하늘은 네 체격이 작다 하여 네가 덕을 이루는 것을 막지는 않을 것이다. 신체가 털썩 크고 기상이 대단한 사람은 비록 작은 지혜와 잗단 꾀만 있어도 사람들이 오히려 이를 우러러 권모와 책략의 꾀가 있다고 여긴다. 만약 체구가 가녀린 사람이라면 비록 평범한 말을 해도 사람들은 반드시 작은 지혜와 잗단 꾀라고 시끄럽게 떠들면서 간사하다고 지목하고 소인이라고 이름 붙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타고난 것이 이와 같은 사람은 마땅히 열 배 더 힘을 쏟아 늘 충후하고 바탕을 실답게 하며 도타우면서도 성실하게 힘쓴 뒤라야 겨우 능히 보통 사람의 대열에 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죽을 때까지 명심해서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감히 스스로 작음을 가지고 경박하게 구는 일이 없도록 해라. 그래서 내가 네게 순암이라는 호를 준다.

가경 무인년(1818) 중추에 다수(茶叟)가 쓰다.

 

晏嬰田文, 皆矮陋不揚, 而或直諫以匡君, 或尙氣以名世. 唐之裵度, 吾東之李完平, 皆身軀羸弱, 不害其爲名臣碩輔.

何爲其然也? 身猶室也, 神猶主人也. 主人苟賢, 雖處打頭之屋, 猶之爲人所敬愛. 主人苟庸, 雖處之以高臺廣廈, 猶之爲人所賤侮. 理則然也.

咨汝信東受父母之晩氣, 體質纖小, 年及成童, 如幼穉然. 雖然神心之主汝體者, 因當與僑如無霸, 無以異矣. 汝其自視無小, 立志用力, 期爲大人豪桀, 天因不以汝體小, 而沮汝之成德也. 身體碩大, 氣象雄偉者, 雖有小智細謀, 人猶仰之爲權數牢籠之術. 若軀殼纖小者, 雖尋常言談, 人必躁之爲小智細謀, 目之曰奸詐, 題之曰小人.

故凡稟得如此者, 宜十倍用力, 每以忠厚質實, 敦朴純慤爲務然後, 僅能備數於平人之列. 汝其終身銘念, 一言一動, 無敢澆薄以自小. 吾故錫汝之號曰淳菴.

嘉慶戊寅, 中秋 茶叟.

 

네 체격이 작으니 열 배 힘을 쏟아야 한다

 

너와 같은 조건에서도 큰 뜻을 세워 우뚝한 자취를 남긴 선인들을 마음에 새겨두거라.”

 

내용에 맞춰 제목을 <순암호설(淳菴號說)>로 달았다. 1803년생인 그가 열여섯 살이 되던 1818년에 다산은 이 글을 써 주었다. 초당의 막내 제자였던 그는 다산초당의 주인이었던 윤규노의 막내로 태어났다. 맏형 윤종기(尹鍾箕, 1786~1841)와는 열일곱 살이나 차이 난다. 늦둥이로 태어난 그는 체격이 왜소한 데다 마음마저 여렸다. 아직 어린애 티를 벗지 못한 응석받이 막내였다.

 

다산은 몸집이 왜소한 그를 위해 순암(淳菴)이란 호를 지어주었다. ‘()’은 도탑다, 순박하다는 뜻이다. 다산은 매사에 자신감이 부족한 데다 응석받이라 지기 싫어하는 윤종진에게 춘추전국시대의 안영과 전문, 당나라 때의 배도, 조선의 이원익 등 외모가 보잘것없고 체격이 유난히 작았지만 성실한 노력으로 재상의 지위에 올라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냈던 작은 거인들을 손꼽으며 격려했다.

 

너는 체격이 유난히 왜소하니 행여 주눅 들지 말고 남보다 열 배 더 노력해야 한다. 거기에 천근의 무게를 더 깃들여야지. ‘()’이란 한 글자를 잊지 말거라. 도탑고 두텁게 한결같아야 한다. 사람이 진국이란 소리를 들어야지, 경박하단 말을 들어서야 쓰겠니? 너와 같은 조건에서도 큰 뜻을 세워 우뚝한 자취를 남긴 선인들을 마음에 새겨두거라. 남이 너를 우러르게 해야지, 얕잡아보게 해서는 안 된다. 힘쓰고 또 힘써야 한다. 평생 기억해두렴. 알겠느냐?”

 

스승에게 생각지 않은 선물을 받은 윤종진은 스승의 가르침을 마음에 깊이 새겼다. 분발의 기운이 안에서부터 솟아났다.[cafe.daum.net/kis0901/RdsI/663   오디오와 컴퓨터 에서 발췌]


*참고자료 있는 곳:다산초당(다산과 윤종진)

*다산 선생 18제자:이유회(李維會), 이강회(李綱會), 이기록(李基祿), 정학가(丁學稼), 정학포(丁學圃), 정수칠(丁修七), 윤종문(尹鍾文), 윤종영(尹鍾英), 윤종기(尹鍾箕), 윤종벽(尹鍾璧), 윤종참(尹鍾參), 윤종진(尹鍾軫), 윤종심(尹鍾心), 윤종두(尹鍾斗), 윤자동(尹玆東), 윤아동(尹我東), 이택규(李宅逵), 이덕운(李德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