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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수어사 직책을 맡았던 인물]이시백[李時白]

Bawoo 2017. 8. 26. 23:17



이시백(돈시(敦詩), 조암(釣巖))         

1581(선조 14)∼1660(현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 개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돈시(敦詩), 호는 조암(釣巖). 이기(李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정화(李廷華)이다. 아버지는 연평부원군 이귀(延平府院君 李貴)이며, 어머니는 인동 장씨로 증 참판 참판 장민(張旻)의 딸이다. 이시방(李時昉)의 형이다. 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23년 유생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 다음 해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協守使)가 되어 이천으로 달려가서 향병을 모집해 길목을 지켰다. 그러나 이괄이 다른 길을 택해 곧바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안현(鞍峴)에서 정충신(鄭忠信) 등과 함께 반란군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수원방어사가 되어 병마 3,000을 훈련시키고, 유사시에는 십장기(十丈旗)와 방포(放砲)를 신호로 모이도록 하였다. 그 결과 정묘호란 때 병마를 이끌고 신속히 동작나루에 도착, 인조를 강화도로 무사히 인도하기도 하였다. 1629년(인조 7) 삼수미(三手米)를 국고에 수납하는 데 태만했다는 죄로 관직을 떠났으나, 곧 판결사가 되었다가 양주목사·강화유수가 되었다.


1633년 병조참판, 1636년 경주부윤이 되었으나, 왕이 불러들여 병조참판으로 남한산성수어사를 겸하였다. 그 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맞이했으며, 서성장(西城將)으로 성을 수비했고, 다음 해 공조판서에 승진되어 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1638년 병조판서 때, 척화신(斥和臣)으로서 청의 강압에 못이겨 심양(瀋陽)에 아들 이유(李愉) 대신 서자를 볼모로 보냈다가 2년 뒤 탄로되어 여산(礪山)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다음 해 풀려나서 총융사가 되고,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모반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를 받았으나 왕의 신임으로 추궁을 받지 않고, 이어 한성판윤과 형조·공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고 원손이 어려 인조와 중신들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삼을 것을 희망했으나, 이경여(李敬輿)와 함께 원손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1646년 다시 병조판서가 되어 휴가를 받아 공주로 성묘 가던 중 호서에 토적이 날뛴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서울로 돌아와 토벌을 자원해 군사를 이끌고 달려갔으나 이미 토평되어 그대로 돌아왔다. 1649년 인조가 불러 술을 대접하고, 또 세자를 소개하면서 세자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 사람을 팔다리처럼 하니 너도 뒷날 나와 같이 대접하라.” 하며 위로했다 한다.


그 해 5월효종이 즉위하자 이조판서·좌참찬이 되고, 1650년(효종 1) 우의정에 올랐다. 다음해 김자점(金自點)의 모역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우 이시방이 김자점과 가깝다는 이유로 혐의를 받자, 도성 밖으로 나가 조용히 지냈다. 1652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를 다녀와 언사(言事)로 견책을 받은 조석윤(趙錫胤) 등을 신구(伸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에서 떠났다.

그러나 바로 좌의정에 이어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봉해지고, 1655년 영의정에 임명되자 다시 벼슬에 나왔다. 1658년 김육(金堉)의 건의에 따라 호남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다음 해 효종이 죽자 윤선도(尹善道) 등이 수원에 능을 정하자고 건의했으나, 이시백이 교통이 빈번해 적합하지 못함을 들어 여주의 영릉(寧陵)을 택하도록 하였다.


일곱 번이나 판서를 역임했고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나, 청빈해 빈한한 선비집 같았다 한다. 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조익(趙翼)과 교유하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송자대전(宋子大全)』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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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활동과 업적

1623년 인조반정 때 아버지와 함께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協守使)로 군사를 모집하여 정충신(鄭忠信) 등과 함께 안현(鞍峴)에서 반란군을 격퇴했다. 이 공으로 수원부사가 되었는데 위급한 일이 생길 경우 깃발과 총소리로 신호하기로 하여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군사를 이끌고 신속히 동작나루에 도착, 인조를 강화도로 무사히 인도했다.

 

1629년(인조 7) 삼수미(三手米)를 국고에 수납하는 데 태만했다는 죄로 품계가 깎였으나, 이듬해 양주목사를 거쳐 1631년 강화부유수를 지내고 1636년 병조참판으로 남한산성수어사·호위대장·특진관을 겸했다. 이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서성장(西城將)으로 성을 수비했다. 공조판서·지의금부사를 지내고 1638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척화(斥和)를 주장했다 하여 아들 유(愉)를 심양(瀋陽)에 볼모로 보내게 되었는데 대신 서자를 보냈다가 2년 뒤 탄로가 나 여산(礪山)에 유배되었다.


다시 총융사로 등용된 뒤 한성판윤, 형조·공조 판서를 역임했다. 1645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인조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삼으려 할 때 이경여(李敬輿)와 함께 원손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했다. 1650년(효종 1)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이 되었고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봉해진 뒤 1655년 영의정이 되었다. 1658년에는 김육(金堉)의 건의에 따라 호남에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했다. 1660년(현종 1)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각주1) (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기년설(朞年說:만 1년)을 지지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다음백과]



* 유명한 군담 소설인 《박씨전》에서 박씨 부인의 남편으로도 서술되었다.[위키백과]


[출처:정보-김훈 소설 남한산성 /자료 수집- 별도 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