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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을 현대감각에 맞게 새로 쓴 소설 '대적'에 기인으로 나오는 인물]정희량(鄭希良)

Bawoo 2017. 11. 11. 09:43

정희량(鄭希良, 1469년 ~ ?)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본관은 해주, 자는 순부(淳夫), 호는 허암(虛庵)이다. 동지중추부사 충석(忠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의 침(忱)이고, 아버지는 철원부사 연경(延慶)이다. 어머니는 경간(慶侃)의 딸이다. 김종직의 문인이다.


1492년(조선 성종 23)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했으나[1], 성종이 죽은 뒤 태학생(太學生)·재지유생(在地儒生)과 더불어 올린 소가 문제되어 해주에 유배되었다. 1495년(조선 연산군 1)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8위로 급제하고[2], 이듬해 예문관검열이 되고, 승문원의 권지부정자에 임용되었다.

이듬해 김전·신용개·김일손 등과 함께 사가독서에 뽑힐 정도로 문명이 있었다.

1498년 선무랑·행예문관봉교로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무오사화 때는 사초 문제(史草問題)로 윤필상 등에 의해 신용개·김전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았는데, ‘난언(亂言)을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장(杖) 100, 유(流) 3, 000리의 처벌을 받고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1500년 5월 김해로 이배되었다.

1501년 유배에서 풀려나 직첩을 돌려 받았으나 대간 및 홍문관직에는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 해 어머니가 죽자 고양에서 시묘(侍墓) 살이를 하다가, 산책을 나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저서

  • 《허암집》

각주

  1. 이동 “과거 및 취재 > 생원진사시 > 정희량(鄭希良)”.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2012년 12월 24일에 확인함. 
  2. 이동 “과거 및 취재 > 문과 > 정희량(鄭希良)”.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2012년 12월 24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

정희량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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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순부(淳夫), 호는 허암(虛庵). 동지중추부사 정충석(鄭忠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의 정침(鄭忱)이고, 아버지는 철원부사 정연경(鄭延慶)이다. 어머니는 경간(慶侃)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92년(성종 23)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했으나, 성종이 죽자 태학생(太學生)·재지유생(在地儒生)과 더불어 올린 소가 문제되어 해주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1495년(연산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예문관검열이 되고, 승문원의 권지부정자에 임용되었다.

이듬해 김전(金詮)·신용개(申用漑)·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될 정도로 문명이 있었다.

1497년 예문관대교에 보직되어 ① 임금이 마음을 바로잡아 경연(經筵)에 근면할 것, ② 간언을 받아들일 것, ③ 현사(賢邪)를 분별할 것, ④ 대신을 경대(敬待)하며, 환관을 억제할 것, ⑤ 학교를 숭상하며 이단을 물리칠 것, ⑥ 상벌을 공정히 하고 재용(財用)을 절제할 것 등의 소를 올린 바 있다.

다음해 선무랑·행예문관봉교로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무오사화 때는 사초문제(史草問題)로 윤필상(尹弼商) 등에 의해 신용개·김전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았는데, 난언(亂言)을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장(杖) 100, 유(流) 3, 000리의 처벌을 받고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1500년 5월 김해로 이배되었다.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나 직첩을 돌려 받았으나 대간 홍문관직에는 서용될 수 없게 되었다. 그 해 어머니가 죽자 고양에서 수분(守墳)하다가, 산책을 나간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총민박학(聰敏博學)하고 문예에 조예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음양학(陰陽學)에도 밝았으며, 영달에는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 저서로 『허암집』이 있다.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점필재집(佔畢齋集)』
  • 『재사당일집(再思堂逸集)』
  • 『이평사집(李評事集)』
  • 『허암유집(虛庵遺集)』
  • 『기언(記言)』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대동기문(大東奇聞)』
  • 『해동잡록(海東雜錄)』
  • 『전고대방(典故大方)』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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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대적'에 나오는 정희량 관련 이야기의 근거가 되는 내용]


갑자사화때 종적을 감춘 정희량(豫測)

 

정희량(鄭希良-1469~?)이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짓는다는 소문이 났는데 특히 시

를 잘 지었습니다. 늦게 과거 시험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들어갔는데, 남의

길흉(吉凶)을 잘 알아맞혔습니다. 정희량

"갑자년의 재앙은 무오사화보다 더 심하리라."

하고, 승진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갑자사화-연산군이 자신의 어머니성종였다가 폐출(廢黜)되어 사사

(賜死:1480)윤씨(尹氏)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士禍).

※『무오사화-김일손(金馹孫) 등 신진 사류가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에게 화를

당한 사건으로 연산군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이와 같은 죄악은 김종직이 선

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 그 시체의 목을 베었다.


정희량이 덕수현(德水縣) 남쪽에서 상 중에 있던 어느 날 남녀 노비를 모두 내

보내되, 그 중 어른은 나무하고 아이는 나물을 뜯게 하여 저녁거리를 장만하게

하고 자기 혼자 빈 여막을 지키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늙은 종 한 명이 집에 심부름꾼 한 사람도 남겨 두지 않았음을 생각하

고 지체 없이 돌아오니 정희량이 없었습니다.

 

이웃 사람을 불러 사방으로 찾아보았으나, 남강(南江) 즉 조강(祖江)의 상류

에서 모래톱에 벗겨져 있는 낡은 신발 한 켤레만 발견되었습니다.

필시 강물에 빠졌으리라 하여 수군을 동원하여 배를 타거나 헤엄을 쳐서 강 아

래와 위쪽을 모두 찾아보았으나 결국 그 시체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얼마 후 연산군의 포악함이 더욱 심해져 마구잡이로 죽였으니, 이른바 갑자사

화라는 것으로 정희량이 살아 있었다면 화를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취를 스스로 감추어 죽지 않았다.'하고, 또 어떤 이는,

"묘향산의 어느 절에서 한 중을 만났는데, 비록 남루한 행색을 하고 있었지만

보통 중의 거동이 아니어서 마음속으로 수상하게 여기다가 훗날 다시 그를 찾

아보니 이미 행방이 묘연했다. 의문의 여지없이 그는 정희량일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익사하면 시체가 떠오르거나, 혹은 떠서 강변으로 밀려나오는 법

이니, 투신자살하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며, 아직 어머니의 상복을 벗기도

전이며 아버지 또한 살아계신데 세상을 등졌을 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주역/周易에 이렇게 말하고있습니다.

천지 자연의 현상을 보면, 음은 양을 낳고, 양은 음을 낳아서 변화가 무궁하

. 이 음양의 이치를 풀이한 것이 역이다.

즉 인간 세계의 생사/生死, 성쇠/盛衰가 모두 이 역의 이치에 따른다.

生生之謂易 - 낳고 또 낳는 생성의 이치를 적은 것이 역이다.

 

인간은 운명에 몸을 맡길 수는 있어도 그것에 관여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출처:갑자사화때 종적을 감춘 정희량(豫測)| 지혜로운 옛 이야기]

 

[정보-책-소설"대적"(나남출판)대적/권오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