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대 논란 부추기는 것은
제 얼굴에 침 뱉는 꼴
수모 참지만 잊지 말아야
사회주의 문명대국 건설은
요원한 꿈, 일깨워 준
수행 기자 폭행 사건 처리
역사적으로 한·중 관계가 가장 평안했던 시기는 15, 16세기 아니었다 싶다. 14세기 말 중국에서는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한족의 명나라로 교체되고,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조선으로 교체됐다. 개국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1402년 명의 3대(代) 황제 성조가 즉위할 무렵 조선에서는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이 조선의 세 번째 임금이 된다. 그로부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약 200년 동안 조선과 명은 평화롭고 안정적인 관계를 보인다.
문제가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조선을 약소국으로 얕잡아 보는 중국 통치자의 인식 탓이 컸다. 성조는 원의 정책을 이어받아 처녀와 거세인(환관)을 공물로 바치라고 요구했다. 버틸 힘이 없던 조선은 ‘진헌색(進獻色)’이란 기구를 만들어 전국에서 처녀를 물색했다. 우여곡절 끝에 5명을 골라 보냈지만 명나라는 누구는 뚱뚱하고, 누구는 마르고, 누구는 키가 작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고 이듬해 다시 선발할 것을 요구했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의 거세인은 총명하고 영리하여 일을 맡길 만하니 어리고 깨끗한 거세인 60명을 선발해 보내라”고 요구해 울며 겨자 먹기로 35명을 골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무리한 요구는 오래 가지 않았다. 조선이 온갖 핑계를 대며 교묘하게 회피한 데다 중국 스스로 인륜에 반한다는 이유로 중단했기 때문이다.
조선과 명의 관계가 비교적 평탄했던 데는 조선은 학문과 예의범절의 수준에서 다른 속국과는 다르다는 중국의 판단도 작용했다. 조선은 비록 조공국이지만 책을 읽고 예절을 아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함부로 대했다가는 인심을 잃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사신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명은 종주국의 이미지에도 신경을 썼다. 조선에 우습게 보일 것을 우려해 학문이 있는 사람을 정사와 부사로 임명해 중국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도록 했다. 조선은 명의 문신들이 오면 역시 문신들을 내세워 시문(詩文)을 주고받도록 했다. 그 결과를 책으로 엮은 『황화집(皇華集)』은 명나라 말기까지 23집이나 발간됐다.
왕이 등극하면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고, 고명(誥命)과 인(印)을 하사받는 속국이긴 하지만 조선은 속국 중에서 특수한 지위를 누렸다. 유가(儒家)의 영향을 받아 백성을 교화하는 일에서 중국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사신들이 오면 상석에 조선의 사신을 앉히고, 황제의 연회에서도 전상(前床)에 배정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류구(琉球)나 안남(安南)이 조선과 동등한 대우를 요청했지만 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제가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조선을 약소국으로 얕잡아 보는 중국 통치자의 인식 탓이 컸다. 성조는 원의 정책을 이어받아 처녀와 거세인(환관)을 공물로 바치라고 요구했다. 버틸 힘이 없던 조선은 ‘진헌색(進獻色)’이란 기구를 만들어 전국에서 처녀를 물색했다. 우여곡절 끝에 5명을 골라 보냈지만 명나라는 누구는 뚱뚱하고, 누구는 마르고, 누구는 키가 작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고 이듬해 다시 선발할 것을 요구했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의 거세인은 총명하고 영리하여 일을 맡길 만하니 어리고 깨끗한 거세인 60명을 선발해 보내라”고 요구해 울며 겨자 먹기로 35명을 골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무리한 요구는 오래 가지 않았다. 조선이 온갖 핑계를 대며 교묘하게 회피한 데다 중국 스스로 인륜에 반한다는 이유로 중단했기 때문이다.
조선과 명의 관계가 비교적 평탄했던 데는 조선은 학문과 예의범절의 수준에서 다른 속국과는 다르다는 중국의 판단도 작용했다. 조선은 비록 조공국이지만 책을 읽고 예절을 아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함부로 대했다가는 인심을 잃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사신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명은 종주국의 이미지에도 신경을 썼다. 조선에 우습게 보일 것을 우려해 학문이 있는 사람을 정사와 부사로 임명해 중국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도록 했다. 조선은 명의 문신들이 오면 역시 문신들을 내세워 시문(詩文)을 주고받도록 했다. 그 결과를 책으로 엮은 『황화집(皇華集)』은 명나라 말기까지 23집이나 발간됐다.
왕이 등극하면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고, 고명(誥命)과 인(印)을 하사받는 속국이긴 하지만 조선은 속국 중에서 특수한 지위를 누렸다. 유가(儒家)의 영향을 받아 백성을 교화하는 일에서 중국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사신들이 오면 상석에 조선의 사신을 앉히고, 황제의 연회에서도 전상(前床)에 배정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류구(琉球)나 안남(安南)이 조선과 동등한 대우를 요청했지만 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주 중국을 국빈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홀대 논란이 뜨겁다. 여전히 한국을 속국으로 여기는 중국의 뿌리 깊은 종주국 의식이 지금도 달라지지 않은 방증이란 주장도 있다. 굴종적인 사대(事大) 외교가 초래한 참사란 비판도 있다. 일정과 의전을 미리 세심하게 챙겨 논란의 소지 자체를 없애지 못한 청와대와 외교부에 대한 책임론도 불거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손님 접대는 어디까지나 주인의 몫이다. 홀대받았다고 손님 쪽에서 흥분하는 것은 제 얼굴에 침 뱉기다. 떠들면 떠들수록 우리 꼴만 우스워진다.
하지만 수행 기자 폭행 사건은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다. 중국이 진정한 대국이고 문명국이라면 적어도 이 건에 대해서 만큼은 문명적 기준에 따라 처리했어야 한다. 경위를 떠나 한국 정상의 국빈방문 행사에서 벌어진 일인 만큼 폭행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철저한 진상 조사를 통해 책임자를 처벌하고 재발을 방지하겠다는 입장을 자진해서 명확히 밝혔어야 한다. 그럼에도 중국 정부의 책임이 아니라며 마치 자신들과 무관한 일인 양 몰아가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2050년까지 중국을 부강한 사회주의 문명대국으로 만든다는 ‘중국몽(中國夢)’이 요원해 보이는 이유다.
중국 같은 나라를 상대할 때는 다른 도리가 없다. 그쪽이 어떻게 나오든 최대한 예의를 갖춰 점잖게 처신하는 수밖에 없다. 똑같이 맞대응해 책잡힐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 상식과 논리에 맞게 할 말은 하면서도 눈감고 넘어갈 것은 통 크게 넘어가야 한다. 그래서 한국이 오히려 더 대범하고, 도량이 넓은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굴욕을 당했다고 동네방네 떠들 일이 아니다. ‘수모를 참지만 잊지는 않는다’는 냉철한 자세가 필요하다.
중국의 극성기(極盛期)를 이끈 당 태종은 “숲이 깊으면 새들이 깃들고, 물이 넓으면 물고기가 노닌다”는 말을 남겼다. 인의(仁義)로 먼저 모범을 보이면 말하지 않아도 남들이 따르게 돼 있다. 핵으로 위협하는 북한에 뺨 맞고, 핵에 위협당하는 한국에 화풀이하는 중국은 아직 멀었다.
[출처: 중앙일보] [배명복 칼럼] 중국은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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