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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忠을 위해 信을 버린.. 배신자는 '성공한 惡'이었다

Bawoo 2017. 7. 23. 22:51


역사 속 뒤집힌 '인과응보'


1728년(영조4) 일부 남인과 소론의 강경파는 영조와 노론정권의 타도를 기치로 반란을 일으켰다.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무신란(戊申亂) 또는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으로 기록하고 있다. 반란 초기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했던 반란군의 기세도 관군 총사령관 오명항(吳命恒·1673∼1728)의 대응에 막혀 죽산(竹山·지금의 안성) 땅을 넘지 못하면서 초기에 진압되고 말았다. 

박동형은 무신란 당시 반란의 주동자 중 하나인 박필현을 포획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공신 반열에 올랐다. 사진은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의 한 장면.
반란과 진압은 승자와 패자를 양산하는 과정이었다. 승자는 충신의 훈장을 달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반면, 패자는 흉물스럽고도 추악한 모습으로 전락하는 것이 그 시대 역사의 거스를 수 없는 법칙이었다.

오명항의 지휘력과 군사들의 분전에 힘입어 반란이 초기 진압 양상을 보이자 영조는 전에 없이 통쾌해했고, 도순무사 오명항이 개선할 때는 친히 그 행렬을 영접하고 치하할 만큼 고무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토적의 쾌거는 논공행상(論功行賞)이라는 정치적 잔치로 이어졌다. 영조는 진압에 공을 세운 오명항 등 15명의 신하에게 분무공신(奮武功臣·이후 揚武功臣으로 개칭)이라는 씩씩한 훈호(勳號)을 내리며 자신이 행할 수 있는 모든 특전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1728년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오명항 등 15명의 신하들은 ‘분무공신’이라는 훈호(勳號)를 받았다. 사진은 박동형의 분무공신교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15명의 공신은 오명항, 박문수, 조문명, 조현명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엘리트 문신을 비롯하여 다양한 계층을 포괄하고 있었지만, 너무 생경한 탓에 오히려 눈에 띄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맨 마지막에 이름을 올린 박동형(朴東亨·1695∼1739)이다. 분무공신이 조선의 마지막 공신 녹훈이고, 그 분무공신의 맨 끝에 등재되었으니, 박동형이야말로 조선의 마지막 공신인 셈이다.
무신란의 3대 수괴는 이인좌, 정희량 그리고 박필현(朴弼顯·1680∼1728)이다. 그나마 이인좌와 정희량은 반란 초기에 잡았지만 호남 땅 태인(泰仁)에서 패주한 박필현은 종적이 묘연했던 탓에 영조와 조정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었다. 바로 그 박필현의 목을 잘라 나라에 바침으로써 토역(討逆)의 대미를 장식한 사람이 박동형이었던 것이다. 
분무공신화상.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박동형은 경상도 상주 출신의 선비였다. 향촌의 ‘유력양반’ 명부인 ‘향안(鄕案)’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을 보면 집안이 변변하지 못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박동형은 호학(好學)의 기질을 타고나 문사(文詞)가 출중한 데다 인간관계도 원만하여 주변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입신양명을 꿈꾸며 한창 과거 공부에 열중하던 어느 날, 그는 어떤 비범한 사람으로부터 모종의 제안을 받게 된다. 그가 살던 상주는 무신란 주모자들의 핵심 모의처였다. 따라서 박필현은 여러 차례 상주를 찾았고, 박동형과도 친분을 맺게 되었다. 관상(觀相)에 조예가 깊었던 박필현은 박동형을 두고 ‘반드시 귀하게 될 상이다’고 하며 자못 미덥게 대했고, 급기야 거사 직전에는 이런 제안을 하게 된다. “내가 대사를 일으킬 터인데, 일이 성공하면 너를 곧바로 태인(泰仁) 현감에 제수할 것이요, 성공하지 못하면 네 집에 숨을 것이다. 그때 너는 이 돈으로 나를 먹여 살려라.”

이렇듯 예기치 않게 박동형은 화복(禍福)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고, 그로부터 얼마 뒤에 무신란이 발발했다. 여느 상주 고을 사람들처럼 박동형도 월악산(月嶽山)으로 피난을 갔고, 긴한 용무가 있어 잠시 하산하는 과정에서 박필현의 잠입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박필현은 사태가 위급해지자 지난날의 약속대로 박동형을 믿고 찾아온 것이었다. 한 필의 말을 아들 사제(師濟)와 함께 타고 동네 안으로 들어서는 박필현 부자를 목격한 박동형은 자제하기 어려울 만큼 심장이 요동쳤을 것이다. 이제 그는 임금과 벗 가운데 어느 한 쪽을 택해야만 했다. 과연 그는 충(忠)과 신(信)의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박동형은 몹시 침착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박필현 부자를 만난 그는 어떤 심리적 동요도 드러내지 않았다. 평정심을 잃지 않고 이들 부자를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한 집안 묘지기의 집으로 안내하여 피신을 도왔고,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두 부자의 은신처를 나서자마자 마을 장정들을 불러 철저한 감시를 지시하는 한편, 그 즉시 상주 관아로 달려가 반란 수괴 박필현의 잠입 사실을 고변했다.


상주 영장(營將)의 지휘하에 체포 작전은 전광석화같이 진행되었고, 박필현 부자가 한 동이의 술을 채 비우기도 전에 오라에 묶인 대역죄인의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이 절박한 순간에도 박필현의 언행은 비범했다. 자신의 행위를 ‘거의(擧義)’로 표현할 때는 눈에 섬광이 번뜩였고, 영조에게 올릴 ‘상변서(上變書)’에는 하늘을 찌르는 기상이 묻어났다고 했다. 타고난 용력으로 창칼 앞에서도 추호의 굽힘이 없었던 박필현의 위세는 장졸들을 압도했다. 결국 산 채로 서울로 압송하려 했던 당초의 계획도 수정이 불가피했다.


이에 영장은 현장에서 박필현의 부자를 참수하여 머리를 깃대에 매달고는 이 사실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보고했다. 상변서를 통해 법적 심리(審理)를 받고자 했던 박필현의 정당한 요청은 무참하게 짓밟히면서 조선의 법치도 퇴색하는 순간이었다. 경상감사가 올린 박필현 부자 참획에 대한 보고를 받은 영조는 기획자 박동형의 입경을 재촉했다. 영조의 남은 근심을 말끔히 씻어주었고, 체포 및 참획작전을 성공시킨 그가 입궐하자 영조는 더없이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또한 체포 상황을 조근조근 하문하고는 기쁨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임금이 내리는 감당할 수 없는 선물 세례는 박동형으로 하여금 세상의 변화를 실감케 했고, 그해 7월 어보가 날인된 분무공신 교서를 품에 안는 순간 그는 ‘서생(書生) 박동형’에서 일약 ‘충원군(忠原君) 박동형’으로 변모해 있었다.


이로써 그는 한 시대가 부러워하는 귀한 몸이 되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국난의 상황에서 그는 나라와 임금을 향한 충(忠)을 선택했다고 자신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인간의 미덕인 신(信)을 저버린 것이었기에 박필현을 증오했던 사람들조차도 그를 ‘성공한 악(惡)’이라 혹평했다.

그는 그렇게 기억되고, 또 기록되었던 것이다.


박동형이 박필현을 유인하던 그 시점, 경기도 죽산 고을 탄현에 사는 이씨 마을 사람들은 근왕(勤王)의 기치를 내걸고 의병을 조직했다. 양반은 물론이고 노복과 부녀자들까지 호응하였다고 하니 그 의기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민간인 신분인 데다 워낙 창졸간이라 제대로 군복도 갖추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헤매다 관군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관군 척후병들이 이들을 붙잡자 “우리는 의병이다”라고 당당하게 소리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관군은 의병으로 위장한 반란군 때문에 골탕을 먹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에 관군은 이들 또한 위장한 역도로 간주하고 닥치는 대로 참혹하게 죽였던 것이다.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고, 그토록 번성했던 이씨 집안도 하루아침에 멸망의 수렁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들은 나라가 어려울 때 충의(忠義)를 불살랐지만 정작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극심한 앙화(殃禍)였다. 그들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 슬픈 사연은 ‘실패한 선(善)’의 교훈으로 남아 역사를 탐방하는 행인의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