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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브람스, 비극적 서곡(Tragic Overture d minor, Op. 81)

Bawoo 2022. 11. 30. 11:45

 
 
브람스, 비극적 서곡 
Brahms Tragic Overture d minor, Op. 81 Johannes Brahms, 1833∼1897
 
<중년시절의 브람스>

=Herbert von Karajan conducting the Berlin Philharmonic
 




브람스는 비슷한 시기에 동일 장르의 성격이 전혀 다른 곡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피아노 소품과 가곡은 논외로 하더라도, 브람스는 어떤 곡을 작곡하면 거기에 담을 수 없는 악상과 그것과 대조적인 영감을 사용한 곡을 따로 쓰곤 했다. [교향곡 1번]과 [교향곡 2번]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과 [바이올린 소나타 Op.78]의 짝은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축전 서곡]과 [비극적 서곡] 역시 그러한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들만으로 ‘비극적 서곡’이 탄생한 맥락을 규정할 수 있을까?

칼베크 같은 브람스 전기 작가는 파우스트와 이 서곡의 관련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즉 브람스는 빈 부르크 극장의 지배인 딩엘슈타트(1814~1881)로부터 극장에서 상연하기로 한 괴테 [파우스트] 1부와 2부를 위한 음악 작곡을 의뢰받은 적이 있다. 어떤 곡을 쓸지 걱정이 된 브람스는 [비극적 서곡]과 [교향곡 3번]의 2악장을 쓰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딩엘슈타트는 곧 사망했고 상연 계획이 중단되었다. [비극적 서곡]과 [파우스트]의 관계를 속단하기에는 너무 빠르게 정리된 사안이었다. 또 [교향곡 3번]이 이 시기에 착수되었다는 확증도 없다. 칼베크의 설은 현재 별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세상을 떠난 친구들 - 슬픔에 빠진 브람스
 
[비극적 서곡]의 스케치는 1870년 이전에 이루어졌다. 브람스는 클라라의 딸 율리에 슈만(1845~1872)에게 남몰래 연정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1869년 율리에는 백작에게 시집갔고, 브람스의 상처는 컸다. 고통스런 그의 마음은 [알토 랩소디]란 명곡을 낳았다. [비극적 서곡]의 재료가 적혀있는 스케치 수첩의 대부분은 [사랑의 노래 Op.52]와 [알토 랩소디]를 위한 스케치가 차지하고 있었다. 서곡의 재료와 [알토 랩소디]가 브람스의 심리적인 면을 반영했으며, 당시 브람스의 심경은 ‘사랑과 슬픔’ 혹은 ‘사랑의 슬픔’으로 묘사할 수 있겠다. 1871년에 작곡된 [운명의 노래]에는 알토 랩소디의 영향이 남아있다.
 
[비극적 서곡]이 본격적으로 작곡되기 이전 시기를 살펴보면 브람스를 슬픔에 빠지게 한 작품들이 상당히 있었다. 1879년 2월 16일에 클라라의 아들인 펠릭스 슈만이 병으로 열 다섯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브람스는 펠릭스가 시를 잘 쓰는 것을 인정하고 그의 시에 음악을 붙이기도 했다(Op.63-5. 6). 1880년 1월 4일에는 브람스의 친구 포이어바흐(Anselm von Feuerbach, 1829~1880)가 베네치아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브람스는 이전에 포이어바흐의 계모 헨리에타와 오페라 대본에 대해 상담을 나누고 동화 [행복의 여신] 대본을 받은 적이 있다. 포이얼바흐의 죽음을 슬퍼한 브람스는 1881년 여름 [애도가]를 써서 헨리에타에게 바쳤다. 1880년 5월에 본에서 열린 슈만의 기념비 제막식에 브람스는 클라라와 함께 참석했다. 여기서 브람스는 슈만의 라인강 투신과 정신병원 입원의 비극을 떠올렸을 것임이 분명하다. 브람스는 이 즈음 귀가 아팠다. 친분이 깊었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과의 우정에 벽을 느끼는 등 인생의 어두운 면을 맛보았던 시기였다.


<브람스는 이 곡을 작곡하던 시기에 우울한 일들을 많이 겪었다>
1880년 9월 6일 브람스가 출판업자 짐로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고독한 마음을 고백하며 비극적 서곡을 쓴다’는 내용이 있다. 이 당시에는 작품명을 ‘Trauerspiel Ouverture’라고 적었는데, 총보 최종원고에는 지금 쓰이는 것처럼 ‘Tragische Ouverture’라고 적혀 있다. 브람스는 이 곡을 4손 피아노용 원고로 작곡한 최종고를 1880년 12월 중순경에 보냈고, 파트악보와 총보는 1881년 7월에 시판되었다. 총보에는 [대학축전 서곡]때와는 달리 ‘대 오케스트라를 위한’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단순히 ‘오케스트라를 위한’이라고 씌어 있다. 빈 악우협회가 펴낸 브람스 작품 전집에서 [비극적 서곡]의 총보는 짐로크의 인쇄 악보와 브람스가 소유하다 현재 악우협회에 있는 초판의 견본, 거기에 짐로크에게 있던 브람스 오리지널 자필악보를 기초로 작성됐다. 3종 악보들이 현저한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독한 마음의 고백, 남성적 패기를 담은 에너지
 
[비극적 서곡]에 대해 브람스는 젊은 시절 비극적인 영웅을 다룬 고전희곡을 읽는 것을 좋아했고 그런 이야기를 소재로 한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과 [코리올란 서곡]에도 경의를 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비극적 서곡]이 단지 브람스의 심경 뿐만 아니라, 비극적 드라마를 승화시킨 베토벤의 서곡에 상당하는 작품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 곡은 알레그로 논 트로포 d단조로 시작된다. 소나타 형식이지만 [대학축전 서곡]처럼 변칙적이지 않고 재료도 많지 않다. 투티에 의해 d단조 으뜸화음과 딸림화음이 연주되고 나서 현으로 제1주제가 나타난다. 처음에는 조용하다가 후반은 행진곡풍이 되어 힘을 얻어간다. 이 주제를 관이 확보하면 곡은 주제 처리에 새로운 악상도 가한 경과부로 들어간다.

마지막 가까이에서는 바이올린에 싱커페이션을 동반한 온화한 파도와 같은 진행이 저음현의 d음을 지속음으로 한 다음에 d단조로 나타난다. 그것이 Ab장조로 바뀌며 호른과 관악기에 의한 부드러운 악구가 등장한다. 이내 일단락하고 바이올린이 F장조로 노래하는 듯한 새로운 선율을 2주제로 연주하고 나서 코데타들어간다. 코데타에서는 정열적인 고양과 긴장이 느껴진다.

<잘쯔칸마구트의 호수 트라운제와 그문덴읍>
브람스가 종종 여름을 지내던 곳

 


클라이맥스 이후 팀파니만이 남고, 피치카토 화음에 이끌려 현으로 제1주제가 나오고 발전부가 시작된다. 템포를 늦춰 4/4박자가 되고 제1주제 후반부 행진곡풍 리듬을 잠시 다룬 후 현에서 관으로 이어받아 경과부 선율이 다시 D장조로 돌아온다. 비올라 이하가 제1주제 서두를 차례로 나타내고 호른이 그것을 확대하고 나서 비올라가 제2주제를 제시하며, 바이올린이 그것을 받는다. 코데타 재현이후 코다로 이동하고, 제1주제에 의해 고조되며, 일단은 그것도 진정되지만, 결국 d단조로 힘차게 전곡이 끝난다.
 
[비극적 서곡]에서 비극은 질질 끌고 우울한 그런 종류의 비극이 아니다. 그것을 품에 안고 가며 힘차게 다루는 남성적인 비극이다.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나가는 의지를 느끼게 하는 이 작품은 제목과 달리 삶에 대한 희망을 얻을 수 있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준다.
 


서곡 [ 序曲 , overture ]
 <style="margin: 130%? align="justify" line-height: 10px;>오페라 ·오라토리오 ·발레 ·모음곡 등의 첫부분에서 연주되어 후속부로의 도입 역할을 하는 기악곡. </style="margin:>
 
<style="margin: 130%? align="justify" line-height: 10px;>
그 자체가 정돈되어 있는 내용을 갖고, 완결되어 명확한 종지감(終止感)을 줌으로써 후속부와는 독립하여 존재하는 경우도 많다. 이 점에서 같은 도입적 성격을 띠면서도 보다 소규모적이고 후속부와 계속적으로 접속되는 일이 많은 서주(序奏)와 다르다. 역사적으로는 서곡은 우선 두 가지 중요한 형태로 분류된다. 17∼18세기에서의 프랑스풍 서곡과 이탈리아풍 서곡이 그것이다. 프랑스풍 서곡은 륄리가 그의 오페라에 느림―빠름―느림의 3부분의 서곡을 썼는데, 이것이 18세기 중엽까지 프랑스풍서곡의 정식(定式)으로 존중되었다.</style="margin:>
 

그 전형에서는 제1부는 부점(付點) 리듬을 특징으로 하는 장려한 성격, 제2부는 그 모방양식, 제3부는 제1부의 재현 혹은 제2부의 코다를 이루고, 제1부와 같이 제각기 장중한 성격에 의하고 있다. <style="margin: 130%? align="justify" line-height: 10px;></style="margin:>그리고 유달리 바로크시대의 오페라에 즐겨 사용되었으며, 이탈리아오페라이면서도 프랑스풍 서곡을 가진 것도 많았다. 또 오페라 이외에 자주 모음곡의 첫머리에도 쓰여졌기 때문에 모음곡 전체를 서곡이라 부르는 일도 있었다(예를 들면, J.S.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제1∼4번은 원래는 서곡이라 이름붙였다). 한편 이에 대하여 17세기 말에 스카를라티가 빠름―느림―빠름의 3부분의 서곡을 창시하여, 이것이 이탈리아풍 서곡의 정식이 되었다.  

이 형식은 오래 계속되어 신포니아라고도 해서, 18세기의 심포니의 선구로도 간주되고 있다. 제1부는 화성적 양식, 제 2부는 서정적인 성격, 제3부는 발랄한 춤곡풍의 성격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프랑스풍 서곡은 18세기 중엽 무렵에 소멸했으나, 신포니아는 3개의 각 부분의 규모가 점차 커져서, 독립적인 성격을 가지고 교향곡으로 발전했다.
<style="margin: 130%? align="justify" line-height: 10px;></style="margin:>고전파 및 낭만파에서 오페라의 서곡은 대부분 소나타 형식에 의하고 있으며, 내용도 각 장면의 주요한 음악적 소재를 미리 사용함으로써 오페라 전체와의 긴밀화를 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바그너에 이르러서는 소나타 형식은 한층 더 자유스런 형식이 되어, 인물이나 상념(想念), 사물 등을 암시하는 시도동기(示導動機:라이트 모티프)를 주요 소재로서 구성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도입부는 명칭도 서곡이라 하지 않고 전주곡(前奏曲)의 뜻인 포르슈필(Vorspiel)이라고 불렀다. 한편 19세기에는 전혀 단독적인 곡이면서도 서곡이라 불리는 교향곡적 작품도 많이 작곡되었다. 이들 서곡은 처음부터 오페라나 다른 무대예술에 부수되는 목적으로 작곡된 서곡과 구별하기 위해 연주회용 서곡이라고 한다. 베토벤의 《코리올란 서곡》, 멘델스존의 《핑갈의 동굴》, 브람스의 《비극적 서곡》 《대학축전서곡》 등이 바로 그것이다.













 
출처 : 클래식 사랑 그리고 인생
글쓴이 : 클래식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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