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바탕에 담채로 그려진 이 그림은 가로 36.2cm , 세로 29.2cm 크기의 소폭 영모화로써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제화글의 원문과 내용]
老松獨鶴 늙은 소나무에 홀로 있는 학을 眞箇自得 진실로 스스로 얻었으니, 其趣吾如興爾 그 의취(意趣)에 나도 너처럼 흥겹다.
* 眞箇(진개) : 과연, 진실로, 실로, 참으로 ~이다.
[인장] : 士能(사능)
[작품의 감상과 느낌]
그림은 가로가 긴 액자형 크기로 오래된 화면의 오른쪽에서 뻗어 올라간 소나무 줄기의 중간 부분에 솔잎이 무성한 가지가 뻗어 있고 그 위에 학 한 마리가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화면 가운데에 접혔던 선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그림은 당초 화첩에 여러 작품들과 함께 있던 것이 어느 날 단위 그림으로 분리되었고 현재는 액자 형태로 다시 표구되어 존재하고 있습니다.
화면의 왼쪽은 여백이 넓어 개방감과 시원한 느낌을 갖게 되는데 여백의 상단에 그림의 감상평을 적은 표암(豹菴) 특유의 글씨가 적혀 있고, 그 아래로 어느 정도 떨어져 단원의 인장인 ‘사능(士能)’이란 주문방인이 찍혀 있습니다.
‘사능(士能)’이라 새겨진 이 인장은 단원의 다른 작품인 석양귀소도, 비학도, 남해관음도 등에서도 동일한 인장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들 작품들은 40대 후반 이후에서 50대에 제작된 작품으로 보여지므로 이 작품 또한 이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단원 김홍도의 석양귀소도와 인장부분]
[단원 김홍도의 비학도와 인장부분]
[단원 김홍도의 남해관음도와 인장부분]
인장 위에 쓰여진 행초체의 글씨는 단원의 스승이었던 표암이 이 그림을 보고 감상의 글을 적은 것인데, 단원이나 표암이나 모두 관서(款書)가 보이지 않는 것은 당초 제작시기에 이 그림은 여러 그림이 연속되는 화첩속에 들어 있는 한 부분으로써 이 그림 외에도 다른 그림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림은 소나무에 앉아 있는 학 한 마리로써 조선후기 민화(民畵)에서는 소나무가 ‘신년(新年)’ 의 의미가 있고 학은 ‘장수(長壽)’의 뜻을 부여하여 ‘신년익수(新年益壽)’의 의미로 볼 수 있으나, 이 때 소나무 가지에 앉은 학은 머리를 위로 치켜들고 먼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을 하는 게 통례인데 단원의 이 작품은 학이 머리를 숙이고 있어 ‘장수(長壽)’의 의미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겸재 정선의 사공도 이십사시품 중 ‘표일’]
학은 예로부터 매우 신비로운 존재로 인식되었는데, 다른 새들과 달리 혼자 외진 곳에서 은거하며 스스로 고답(高踏)을 추구하는 자태에서 사람들은 현자(賢者)의 모습에 비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학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은 곧 심사숙고(深思熟考) 하는 자세로 이는 심의(深衣)를 입은 유학자에 비유되었고, 나아가 학식과 경륜이 매우 높아 ‘일품(逸品)’이라 여겼으니 이 그림의 학은 정1품 정승의 자리에 있는 학식 높은 현자(賢者)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의(深衣)를 입은 고려말 이재현(李齊賢) 초상도]
학이 앉은 소나무 가지를 보면 솔잎이 무성하고 가지가 제법 튼튼하면서도 이리저리 비틀려 있는 모습인데, 비틀린 가지를 큰 틀로 보면 ‘왕(王)’자의 형상으로 보이니 줄기에서 나온 소나무 가지는 곧 여러 새로운 정책을 펼치고 있는 당대의 임금 정조(正祖)를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가지의 줄기는 면면히 흘러 내려오는 조선왕조의 계통을 의미하는데, 소나무의 줄기가 절반은 껍질이 있지만 다른 한 면은 껍질이 벋겨져 있으니 이는 조선 왕조와 역사를 함께하고 있는 기존 기득권 세력의 반민중성이나 부패상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 그림은 학식이 높은 현자(賢者)로 임금의 부름을 받아 정승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 기득권의 저항을 물리치며 정조의 개혁정책이 성공할 수 있도록 지혜를 내어달라는 기원을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번암 채제공 초상도]
영조시기부터 대학자이자 문신으로써 세손의 자리에서 왕위를 잇는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었습니다. 그는 1788년 정조의 명에 의해 우의정이 된 이후 황극(皇極)을 세울 것, 당론을 없앨 것, 의리를 밝힐 것,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권력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의 6조를 진언하며 개혁을 추진하였고, 1790년에는 좌의정으로서 행정 수반이 된 이후 3년간 독상(獨相)으로 정사를 주도하자 당시 조정의 주도 세력이었던 노론(老論)의 많은 저항을 받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한편 단원의 스승이었던 표암은 77세의 나이 때인 1789년 정2품인 한성판윤이 되었으며, 다음해인 1790년에 정헌대부 및 지중추부사가 되어 관직이 절정에 올랐고 이듬해인 1791년 초에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이 그림의 제작시기를 추정해 보면 채제공이 우의정에 오른 1788년에서 1790년 사이에 이 그림을 그렸고 그것을 표암이 보고 감상평을 남긴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시기의 단원은 정조의 명으로 김응환과 함께 금강산 사생, 대마도 답사, 중국 연행 등을 마치고 돌아온 정조 13년의 시기로써 정조는 이때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고 능의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으로 개명하는 등 본격적인 정조의 치세가 드러나던 시기였습니다.
단원은 이때 조정의 현직에 있으면서 정조의 사랑을 한껏 받고 있었으므로 정조 임금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과 충성심이 이 그림에 담겨져 있다고 느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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