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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는 화원(畵員)이었다. 화원이란 그림을 그리는 하급 벼슬아치로서 오늘날로 치면 하급공무원에 해당한다. 단, 그 직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으니 오늘날 그에 해당하는 직책은 없다.
그런데 당시 조선 사회에서 나라를 이끌어가는 주된 사상은 성리학(性理學)이었다. 그 이념하에서 정치는 학문을 닦은 양반들이 하는 것이었고, 그림 그리기같은 특수 기예는 없어서는 안될 것이기는 했지만 일단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따라서 화원은 중인(中人)들의 전문 직종이었으며, 그 벼슬 역시 가장 높아 보아야 종육품에 그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홍도는 여늬 화원과는 달랐다.
정조 임금 때 화원의 수는 통상 서른 명 정도였는데, 그 중에서도 더욱 뛰어난 화원 열 명은 따로 규장각(奎章閣)에 소속시켰으며 별도로 선발해 특별한 대우를 했다. 김홍도는 규장각 설립 당시에 이미 <규장각도>를 그려 정조에게 바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조 연간 내내 이 규장각 소속의 화원에 속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가 그린 많은 궁중 관련 그림은 어떠한 자격으로 제작한 것이었던가?
필자는 김홍도가 이를테면 바로 국왕 직속의 ‘대조화원(待詔畵員)’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의궤(儀軌)와 같은 기록적인 그림을 그리는 일상 업무에서는 면제된 예가 많았고, 그 대신 막바로 임금을 지척에서 모시면서 어명에 따른 특정 그림을 그린 예가 많았던 것이다. 따라서 현재 궁중 행사와 관련된 그림 사역에 동원된 화원 명단에서는 초기를 제외하고 김홍도의 이름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리하여 일개 하급 관리에 불과한 김홍도의 이름이 국왕 정조의 문집에 실리게 된다. 정조는 재위 마지막 해인 1800년 정초에 “화원 김홍도를 잘 알고 있으며 삼십 년간 나라의 중요한 그림을 도맡아 그리게 하였다”고 회고했다. 그것은 세 차례나 임금의 초상화를 그린 것, 창덕궁에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라는 커다란 벽화를 그린 것, 또 국왕의 친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위한 절 용주사(龍珠寺)의 대웅보전(大雄寶殿) 불화를 제작한 것, 또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나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같은 중요한 책의 삽화를 그린 것과, 정조가 평생 제왕학(帝王學)의 핵심으로 공부해 온 『대학(大學)』을 주제로 그린 <주부자시의도(朱夫子詩意圖)> 등으로 대표된다.
김홍도의 조상은 하급 무관 출신으로서 그가 중인이었음이 확실하게 밝혀졌다. 그런데 집안에서 화원이 된 것은 그가 처음이었던 것 같으니, 이 점은 보통 화원들이 집안 내림으로 화업(畵業)에 종사해 왔던 예와 견주어 볼 때, 오히려 그의 타고난 그림 솜씨가 남달랐음을 반증해 주는 사실이라고 하겠다. 그는 일곱,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강세황(姜世晃, 1713~1791)에게 나아가서 서화 공부를 했다. 당시 강세황은 장기간에 걸쳐 안산의 처갓집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고 추정된다.
한편 스승 강세황이 김홍도를 도화서(圖畵署)에 들어갈 수 있도록 추천했다는 전문이 있다. 이 점은 강세황이 환갑을 넘긴 노년에야 비로소 벼슬길에 오른 인물이고, 김홍도는 이미 스물 어름에 중앙 화단에서 크게 이름이 났으므로 간접적인 추천으로 보는 편이 무난하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김홍도는 서울 생활을 하는 동안 마포 강변에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당시 아름다웠던 이 일대를 가리키는 ‘서호(西湖)’라는 지명이 그의 젊은 시절 호(號)와 같다는 사실에서 짐작된다. 만년에는 을지로 근처에 있던 서화 애호가 김한태(金漢泰)의 저택 안에 별채를 갖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쓴 여러 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단원(檀園)은 ‘박달나무 있는 뜰’이란 뜻으로 원래 중국 명나라 때의 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였는데, 김홍도가 그를 특히 존경했으므로 그 호를 따온 것이다. 이유방이라는 인물은 성품이 고매할 뿐만 아니라 학식 높은 문인 화가로서, 당시에는 무엇보다도 남종화(南宗畵) 교본인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초고(草稿)의 작가로 알려져 있었다.
또 김홍도의 자(字)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능(士能)은 ‘선비만이 물질적인 것에 좌우되지 아니하고 변함없이 올곧게 처신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김홍도 스스로가 어떤 사람이 되고자 했는지 대충 짐작을 할 수 있다. 김홍도가 단원이라는 호를 사용한 것은 1781년 여름 서유구(徐有榘)가 단원 작품 <세검정아집도(洗劍亭雅集圖)>의 화제(畵題)에 쓴 것이 첫 예다.
단원 자신이 명나라의 고매한 선비 이유방을 본받겠노라고 자호(自號)한 사실에서 짐작되듯이, 그는 중인 신분이었으되 스스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교양을 갖추려고 부단히 노력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가 함께 어울렸던 인물들 또한 당대를 주름잡는 번듯한 예술인, 학자, 고관이었다.
이용휴(李用休), 강세황, 조윤형(曺允亨), 성대중(成大中), 이병모(李秉模) 등 몇 사람만 예로 들어 보아도 그 분위기를 상상할 수 있다. 특히 신위(申緯)나 홍석주(洪奭周) 같이 한 시대를 대표했던 지식인들이 ‘단원자(檀園子)’ 라는 표현을 쓴 사실을 감안하면, 항간에 떠도는 김홍도의 춘화(春畵) 제작설 같은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김홍도는 백석미남(白晳美男)으로서 풍채가 마치 신선 같았다고 하며, 키 또한 휜칠하니 컸던 사실을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 보이는 사람이나 사슴, 나귀 등이 대체로 늘씬늘씬하며, 나무의 경우는 아랫가지들을 쳐내고 둥치를 길게 뽑아내어 고고한 인상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조형 특징은 그 자신이 헌헌장부였던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단원은 또 술과 해학을 무척 즐겼던 사람이다. 그것은 그에 관한 조희룡(趙熙龍)의 전기 속에도 보이고 취화사(醉畵史)라는 또 다른 호로도 짐작할 수 있지만, 실제로 취중에 그린 작품이 몇 점 남아 있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술을 많이 했던 탓인지 아무튼 김홍도의 만년 건강은 썩 좋지 않았던 듯싶으며 잔병이 많아 고생했던 자취가 여기저기에 보인다.
그 동안 김홍도는 1791년말에 현감이 된 이후로 새삼스레 사인의식(士人意識)을 갖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리고 단원은 곧 정조에게 버림을 받아 현감직에서 쫓겨 났으며, 그 때문에 어려운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추측에 불과한 오해이며, 특히 후자에 대해서는 현감직에서 의금부로 잡혀 올라간 바로 열흘 후에 곧바로 용서받았던 사실을 최근 확인해 수정하게 되었다.
한편 만년의 기록에 보이는 어려운 생활상과 관련해 그 배경으로 소금장수 김한태로부터 후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언급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김한태는 원래 역관 출신으로서 엄청난 돈을 벌었던, 당시 한양에서 첫째가는 갑부였으며, 나아가서는 조정의 대신들까지 그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위 전문은 상황을 전혀 그릇되게 이해한 것이다.
그런데 김홍도는 말년에 건강이 안 좋고 또 생활 형편도 좋지 않아서 아들 김양기(金良驥)의 수업료조차 마련하기 어려웠으며, 왠지 크게 낙담을 하고 있었던 정황이 분명히 확인된다.
필자는 김홍도가 말년에 고생을 한 배경으로, 1800년 정조가 죽은 뒤에 정국이 일변하면서 그로부터 특히 굄을 받았던 많은 인물들이 된서리를 맞았던 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특히 김홍도의 외아들 김양기가 1792년경에 태어난 사실을 새로 확인함에 따라 김양기가 전했다고 생각되는 그러한 정황이 정조 사후에 있었던 일로 추론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순조 때인 1804년에 김홍도는, 정조 재위 동안에는 특별히 열외되었던 규장각 화원으로 새삼스레 소속되며, 거기에서 아들이나 조카 벌밖에 안 되는 젊은 화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시험을 보게 된다.
물론 전반적으로는 가장 우수한 성적을 냈지만 시험 보는 일 자체가 부끄러운 마당에 더러운 꼴 등을 당하기도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된 것이다. 그 나마도 1805년 가을에는 신병(身病)으로 그만두게 되니, 그 해 말에 그린 <추성부도(秋聲賦圖)>에서는 허망한 인생에 대한 독백과도 같은 씁쓸한 읊조림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이 현재 알려진 김홍도의 절필(絶筆) 작품이다.
아직도 남아 전하는 김홍도의 편지 몇 장을 살펴보면, 그는 원래 성격이 무던하면서도 붙임성이 있고 또 정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던 듯싶다. 그런가 하면 풍속화의 곳곳에 보이는 익살이나 해학적인 표정, 그리고 재미있게 오고가는 사람들의 복잡한 눈길을 눈여겨보자면 역시 그 사람 자체가 장난기가 많은 인물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그의 스승 강세황 역시 자화상에서 보이듯 대단히 해학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이 떠올려져서 매우 흥미롭다.
김홍도는 아마도 독실한 불교신자였다고 생각된다. 단원은 연풍 현감 시절에 인근의 상암사에 크게 시주했던 사실이 있고, 그곳에서 기도하여 외아들을 얻었다는 비문(碑文)이 전하고 있다.
특히 만년작 가운데에 관세음보살과 같은 불교적인 소재를 감상화로 그려낸 걸작품이 여럿 전하고 있는데, 이들 작품은 종교화로서 최상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보다 결정적으로 그가 불자였음을 증명하는 것은, 그의 아들이 부친의 필적을 모아 책으로 만든 『단원유묵첩(檀園遺墨帖)』의 표지 비단에 아주 작은 ‘만(卍)’자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단원은 산수며 꽃, 새, 동물, 풍속화, 고사인물(故事人物), 신선, 초상화는 물론 심지어 불화에서 삽화에 이르는 온갖 종류의 그림을 다 잘 그렸으니, 이를테면 ‘나라에서 으뜸가는 화가(國畵)’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글씨도 대단히 잘 썼으며 문학면에서도 역시 앉은 자리에서 운(韻)을 맞추어 한시를 척척 지을 만큼 도도했다. 더욱이 대금이며 거문고를 잘하여 음악가로도 이름이 났으니, 필자가 최근에 확인한 그의 자작 시조 작품 두 수 역시 그러한 방면의 조예를 증명해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새롭게 조명된 사실, 즉 시·글씨·그림·음악 등 여러 방면에 고루 교양이 풍부하며, 또 풍채도 좋고 성품도 무난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앞서 김홍도를 총애했다는 정조는 조선 역사상 세종에 비길 만큼 훌륭한 군주였다. 백성들이 실제로 잘 살 수 있는 정치를 하고자 늘 힘을 써서 좋은 성과를 냈던 것은 물론이고, 그 자신의 학문이 오히려 신하들을 가르칠 만큼 깊었으며,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다. 심지어는 도서(圖書, 도장)까지도 직접 새겨 쓰는 취미가 있었다 하니 그의 풍부한 예술가적인 기질을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남아 있는 기록을 상세히 검토해 보면, 정조는 흔히 사소한 일로 치부하기 쉬운 화원들의 그림 내용까지도 세세하게 신경을 써서 그 방향을 제시했으며, 우수한 화원과 태만한 화원을 직접 살펴서 올리고 내쳤다는 것이다.
이렇게 까다로운 예인군주(藝人君主)의 눈에 웬만한 인물이 눈에 찰 리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김홍도의 시서화악(詩書畵樂)에 걸친 폭넓은 교양과 훤칠한 인물, 그 원만하고 모나지 않은 성격 등이 바로 정조의 안목에 걸맞았던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김홍도의 작품 세계가 크게 보아 정조의 감상안(鑑賞眼)의 범위 안에 있었다고 판단하며, 그런 맥락에서 조희룡의 말, “단원이 그림 한 장을 낼 때마다 곧 임금의 눈에 들었다’고 적었던 것을 새삼스레 눈여겨보게 된다.
김홍도는 그저 한 사람의 천재 화가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 전체를 대표하던 화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춘화를 그렸다느니, 일본에 가서 몰래 활약했다느니 하는 최근의 언론을 통한 풍문은 역사를 전혀 도외시한 낭설이 아닐 수 없다.
흔히 김홍도는 조선적인, 그것도 가장 조선적인 화가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어진도사에 세 차례 참여한 사실로 알 수 있듯이 우선 사실적인 회화 역량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던 화원이다. 그것은 지금 전하는 극사실 묘사의 호랑이 그림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그가 그저 그림을 잘 그렸을 뿐만 아니라, 무엇을 그려도 아주 우리 맛이 우러나게 그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필자가 특히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우리 풍속이나 우리 강산을 그린 작품은 물론이고, 이를테면 중국의 고사인물이나 정형산수(定型山水) 작품에서도 우리의 멋이 마찬가지로 농익게 우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중국 고사를 주제로 한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에 천연덕스럽게 한식 건물을 배경으로 장독대며 조선사람들의 생활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또 저 유명한 <선동취적도(仙童吹笛圖)>에서 그 옷주름 선이 굵고 가늘게 너울거리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소년이 불고 있는 우리 옛 가락의 능청거림을 그대로 시각화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음악성이 작품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의 작품에 넘나드는 독특한 시정(詩情)이 있는 바, 이것은 그의 문학적 감수성이 그림에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끝으로 김홍도 작품의 주된 특징의 하나로, 여타 어느 화가들보다도 특히 여백을 절묘하고 넉넉하게 구사하는 점을 들 수 있다.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가 바로 위에서 말한 문학적 감수성과 넉넉한 여백을 전형적으로 구사한 작품이다. 이러한 조형 특성은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여유롭고 느긋한 성품과 연관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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