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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학산(鶴山) 윤제홍(尹濟弘)의 화적연도(禾積囦圖)

Bawoo 2018. 6. 11. 21:38




1812년경, 종이바탕에 수묵, 26.2×41.4cm, 삼성리움미술관 소장

 

 

화적연(禾積淵)

 

 

            [해동지도에 나타난 경기도 화적연 일대]

 



                                             [화적연 전경]​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자일리와 관인면 사정리 경계에 위치한 연못이다. 영평 8경중 1경으로

임진강 상류에 있다. 마치 볏 짚단을 쌓아 올린 것 같은 형상이어서 화적(禾積)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화적이라기보다는 어떻게 보면 큰 뱀이 머리를 들고 일어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형상도 하고 있다.

수면 위로는 높이 13m에 달하는 큰 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여지도서』에 "화적연(禾積淵)은

영평현의 북쪽 25리에 있는데 강원도 철원부의 경계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여 남쪽으로

흐른다."고 되어 있다.

『대동지지』에 "유석향(乳石鄕)은 영평현 북쪽 40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예로부터 화적연은

기우제터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어느 날 한 늙은 농부가 3년 가뭄에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하늘을 원망하면서 이 연못가에 앉아 한숨을 쉬면서, "이 많은 물을 두고서 곡식을 말려

죽여야 한다는 말이냐? 하늘도 무심커니와 용도 3년을 두고 낮잠만 자는가보다." 이렇게

탄식하자 물이 왈칵 뒤집히고 용의 머리가 쑥 나오면서 꼬리를 치며 하늘로 올라가자 그날

밤부터 비가 내려 풍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이 지방에 가뭄이 들면 화적연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화적연도(禾積淵圖)]

 

윤제홍 (尹濟)

조선 후기 제주경차관을 지낸 문신이자 문인 화가. |

[가계] 본관은 파평. 자는 경도(景道), 호는 학산(鶴山)·찬하(餐霞). 아버지는 윤석복(尹錫復)이다.

[활동사항] 1792년(정조 16) 생원시에 합격하고 1794년(정조 18)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을 거쳐 1801년(순조 1) 정언이 되었다. 1806년(순조 6) 김구주(金龜柱) 사건에 연루되어 경상북도 창원에 유배되었다.

1825년(순조 25) 제주경차관의 임무를 마치고 이임하였으며, 1830년(순조 30) 풍천부사로 재임 중 암행어사 홍희석(洪羲錫)의 탄핵으로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나 1840년(헌종 6)에 대사간에 복직되었다.

문인 화가로 당대에 이름이 나 있었다. 특히 지두화(指頭畵)를 잘 그려 여러 폭의 지두화첩을 남겼다. 교우 관계가 비교적 넓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활동 사항은 알려진 바가 없다.

정선(鄭敾)·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 등의 작품과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비교하였고, 그들의 작품을 모방하여 그린 적도 있다고 한다. 이재관(李在寬)·김수철(金秀哲)·김창수(金昌秀) 등으로 이어지는 담채법과 바위 표현법은 조선 후기 문인화풍의 한 계보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저술 및 작품]
작품에 「고사도(高士圖)」, 「옥순봉(玉筍峰)」, 「모루관폭도(茅樓觀瀑圖)」, 「산수인물도」 등이 있다.


[참고문헌]



안휘준, 『한국의 미』-산수화 下-(중앙일보사, 1982)
안휘준, 『조선왕조실록의 서화자료』(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김찬흡, 『제주사인명사전』(제주문화원, 2002)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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