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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관련] 군신 스기모토 중좌

Bawoo 2018. 6. 16. 21:57

                                                                 

스기모토 고로 (杉本五郞)

1900년 5월 25일 생 - 1937년 9월 14일 사망

 

 히로시마 현에서 태어난 스기모토는 소년시절부터 육군장교를 꿈꾸어 1918년에 육군사관학교 후보생으로 히로시마의제 11 연대에 입대했다. 그러나 이 때 일어난 쌀가격 폭등에 의한 소요는 일본의 내부적 위기의 개시를 고하는 큰 사건이 되어 평소 국민봉공이라던 스기모토의 꿈은 한 순간에 깨어져 그는 사상적 공황상태에 시달렸다.

 

소작쟁의가 격화된 일본 자본주의의 근간은 흔들리고 러시아 혁명의 역향으로 사회주의가 대두하기 시작했는데여기에 군사적 봉건제도의 압박도 더하여 사회적으로 암울하고 절망적인 분위기가 넘쳤다. 병영에서 혼란한 세상을바라본 스기모토는 위기를 직감하고는 스스로 세상을 구할 선봉에 서겠다고 결의했다.

 

그러나 군대에 매였던 스기모토는 이런 마음을 표출하지 못하고 그 대신 황국의 정신을 연마하기 위해 면학에 열중하며 정신을 가다듬어 국수주의자로 변해갔다. 1919년에 육군사관학교 33기로 본과에 입학한 스기모토는 1921년에 졸업 후 보병소위로 임관 후 보병 제 11 연대에 다시 재배치되어 매주 1회씩 미하라 시에 있던 임제종 사찰인 불통사(佛通社)에서 수양을 쌓으며 중국으로 파견되기 전까지 9년간 이러한 생활을 반복했다.

 

1931년에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제 5사단 임시파견대 제 2대대 제 8중대장으로 출정한 스기모토는 중국의 텐진(天津)방면에서 종군 후 귀환했다. 그 후 출세의 코스인 육군대학 시험에 응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그는 <중대장이라는 지위가 나에겐 가장 잘 맞는다, 그 이상의 지위는 필요없다>라고 거부했다. 그리고는 <병사들과 함께 존재하며 병사들과 생사를 같이 한다>라고 평소 말했다.

 

그는 병사들의 신병을 항상 아꼈으며 가난한 집안출신의 병사에겐 몰래 자신의 급료를 송금으로 부치기도 했다.  1

936년에 발발한 2. 26 사건에 대해 황군의 수치라고 생각한 스기모토는 공산주의자들은 불충한 자라고

비난했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8월에 소좌로 승진한 스기모토는 보병 제 11연대 대대장으로 취임했다.

 스기모토는 9월에 산시성(山西省)의 완핑현(宛平県)의 전투에 나섰는데 암벽 위에 있던 약 600명의 적

진지로 오르면서 호령을 부르짖으며 돌격했다. 그러나 스기모토에게 날아든 중국군의 수류탄이 터지면서

그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지고 말았다. 스기모토는 왼손으로 군도를 지팡이삼아 선 채로 다시 부하들을 독려했는데 최후의 힘을 다해 동쪽의 황궁으로 거수경례를 하고는 그대로 선채로 숨이 끊어졌다. 고작 38세의 젊은 나이로 생애를 다한 비장한 최후였다.

 

스기모토는 죽기 직전까지 4명의 자식들 앞으로 보내는 유서형식의 20통의 편지를 아내에게 보냈다. 이것은 후에 대의(大義)라는 책으로 1938년 5월에 출간되었다. 글 속엔 평소 스기모토가 청년장교일때 꿈꾸며 청소년들에게 정도를 제시했기에 종전까지 29판 인쇄에 130만부라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전시 사생관을 표시한 대표적인 서적으로 천황을 섬기고 천황을 위해 몸을 바친다는 것이 일본인의 유일한 일생이라고 적혀있어 당시의 민중에게서는 호평을 받았지만 권력자들의 비리와 군대의 부패 등도 적나라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군 상부에선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기모토는 국수주의자일진 몰라도 평소 청렴결백했기에 타인의 존경을 받았다.

 

스기모토의 일생은 야마오카 소하치의 <군신 스기모토 중좌>등 여러 소설가 및 작가들에 의해 전기로 편찬되었다. 현재 불통사의 경내엔 스기모토를 기념하는 자그마한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냇물 옆의 바위엔 스기모토가 쓴 존황(尊皇)이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출처 : 야마오카 소하치 <군신 스기모토 중좌>, 사진은 상업적 사용이 제한된 공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