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이종묵, 안대회 | 북스코프 | 2011.8.26.
[소감] 2014. 1. 30일에 블로그에 올린 책. 아직도 생존해 계신 노모가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계실 때이니 벌써 7년 전 일이다. 책 한 권을 다 요약해서 올리겠다는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주는 행동으로 건강 특히 눈건강을 많이 해쳤었다. 검색하신 어느 분 덕분에 소감을 다시 쓰고 수정하려니 만감이 오간다. 그때는 65세일 때라 그런지 지금보다 많이 건강했던 것 같다. 새삼 세월의 무심함을 절감한다. (2021. 7. 24. 72세. 무더위, 코로나, 도쿄 올림픽. 난 어느새
에어컨 없으면 도저히 못 견디는 허약체질로 변해있다. ㅠㅠ.)
이 책은 고려말,조선조 시대에 죄를 짓고 유배된 인물 중, 섬으로 유배된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엮어놓은 책입니다. 조선조에 섬은 유배지로서 크게 각광을 받은 것 같은데 이유는 육지로의 접근성이 떨어져 죄를 벌주는 효과가 극대화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런 것 같습니다.
총 14개 섬과 그 섬에서 유배를 살다 삶을 마친 인물,해배되어 다시 부귀영화를 누린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는데 여러 섬을 망라하여 기록한 탓에 내용이 아주 깊지는 않으나그렇다고 관심없는 이들이 쉽게 접할만큼 만만하지도 재미있지도 않습니다. 나처럼 우리 이전의 삶을 살고 간 분들에 대한, 아주 깊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조금은 깊이(?)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만 딱맞는 책이란 생각이 듭니다. 좀 더 깊이있는 내용이 필요하다면 따로 구해 볼 책들을 안내해주는 역할도 충분히 해주고 있습니다.^^
* 책 주요 내용 *
1.위도와 이규보:
이규보(1168~1241,73세)는 우리에게 '백운소설''동국이상국집'의 저자로 알려진 인물이다.고려 무인 정권 시절 최충헌에게 중용되었는데 유배를 가게 된 이유는 팔관회 잔치를 열때에 '예법에 어긋난 일이 발생한 것이 문제가 되어서'라고 하며, 이에 1230년 12월 26일 63세 노구의 몸으로 위도로 유배를 갔다고 한다. 머문 기간은 1231년 1월 15일까지 20여일 정도인데 이후 여주로 유배지가 바뀌었다가 해배되어 1241년 73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최우 집권기 무신정권에서 정승 지위까지 올랐다고 한다.
*위도 유배 시절에 남긴 시중 한수*
막 뜬 해는 쇠도 녹일 듯 바다에서 용솟음치고
갠 날 노을은 고운 비단을 짠듯 하늘 끝에 훤하네
외로운 배 돛을 올려 먼 포구로 돌아가니
머리에 모자를 쓰고 가는 사람과 똑같네
'새벽에 머무는 집의 다락에 올라-동국이상국집 권17'
(소개하는 원시는 모두 한자로 되어 있습니다. 옮기는 작업이 만만치 않게 힘이 들어 번역시만 싣습니다^^)
*위도는 변산반도 서쪽 14키로 정도 떨어져 있으며 고슴도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고슴도치 위(蝟)자를 쓴다고 한다.연평,신미도와 더불어 삼대 조기 산란장 가운데 한 곳이라고 하며 영광굴비의 산지이기도 하여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이 남을 만큼 규모가 컸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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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거제도와 이행
거제도는 역사적으로, 6.25전쟁시 포로수용소내의 동족상잔,임진왜란시 원균의 수군이 대패한 칠천량의 아픔,이순신 장군이 최초로 승리한 옥포대첩이 있었던 현장인데 이곳은 또 고려시대부터 중죄인들이 유배를 당한 유배의 섬이기도 하다.
멀리는 고려 100년 무인정권의 단초를 제공한 의종이 정중부에게 이곳 거제로 유배를 당했고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자(子)칭호를 받는 송시열이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이행(1478~1534.58세, 성종9년~중종29년)이란 인물의 행적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이행은 1495년(연산1년) 18세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수재였다고 한다.한창 출세가도를 달리던 중 1504년 갑자사화-생모 윤씨의 폐비 관련 인사들을 도륙한 사건-시 폐비 윤씨의 복위에 반대하다 곤장 60대를 맞고 충주로 1차 유배,2차로 12월에 합안으로 유배 그리고 다음 다음 해인 1506년 1월 거제도로 위리안치 유배형을 떠나 2월에 도착하였다고 한다.같은 해 9월2일 중종반정이 성공하면서 해배되어 9월10일 거제도를 떠나 한양으로 올라가니 유배된 기간은 200여일 남짓이나 이때 쓴 시와 문장을 '해도록'이란 문집으로 남겨 전해오며 해배된 뒤에는 다시 벼슬길에 올라 우의정,좌의정,대제학등 최고위직을 역임했다고 한다.
*해도록에 수록된 시 한수.
어디인가 술을 잊기어려운 곳이
남쪽 변방 비바람치는 날이지.
덧없는 인생 만리 밖에서 꿈꾸고
적막한 신세로 백년 사는 몸일세.
울울한 가슴 터놓기도 귀찮고
침통하게 무릎을 자주 껴안노라.
이러한 때 한잔 술이 없으면
그 자리에서 백발이 새로 돋아 나리라.
-어디인가 술을 잊기 어려운 곳이:해도록 용재집 권7-
3.교동도와 연산,광해군
강화에서 뱃길로 10여분이면 도착하는 교동도-지금은 공사중인 연육교가 다 완성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에는 고려 대문호 목은 이색이 화개산 아래 산 적이 있어 그 풍광을 시로 읊어놓은 것이 있는데 아래 그 시 내용,
끝없는 바다위 푸른 하늘 나직한데
나는 듯 빠른배,해는 서산에 지네
산 밑에 집집마다 막걸리를 거르고
파 썰어 회를 치니 닭이 횃대에 오르네
-교동에서: 목은시고 권6-
그러나 이 섬은 한양과 가까워 감시가 용이하다는 이유로 유배지로 자주 이용되었는데 고려 희종,흥선대원군 손자 이준용등이 이곳에 유배되었었다고 한다.이 책에서는 신하에 의해 왕위에서 쫒겨난 연산,광해 두 임금의 이야기를 싣고 있는데 ,12년간 폭정을 하다가 이곳으로 유배된 연산군은 유배 석달만에 31세의 나이로 이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연산군이 유배갈 당시 백성들이 비웃으며 지은 시가 전해 오는데,
충성이 사모인가,
거동이 교동인가,
흥청 운평 어디 두고
가시밑구멍으로가는가
-출처:김안로의 용천 담적기-
*광해군은 인륜을 팽개치고 -인목대비 폐비,영창대군 살해-난정을 했다는 빌미를 제공해 서인세력들에 의해 폐출되었는데(1623년 3월12일 인조반정),같은 달 14일 정식 폐위되고 23일 부인 -왕후 유씨-과 함께 교동으로 유배되어 제주도로 옮겨지기 전 까지 교동과 강화를 오가며 유배생활을 했다.
1637년 병자호란 시 강화도가 청군에 의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청이 광해군을 내세워 무슨 일을 꾸밀까 두려워 한 조정에서는 광해군을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고 4년 뒤인 1641년 7월10일에 사망하였다고 한다.향년 67세였으며 재위 15년,유배 생활로 18년을 보냈고 총유배기간중 14년을 교동과 강화에서 보냈으며 제주에서 지낸 기간은 4년에 불과하다.
아이러니 한 것은 교동섬은 유배생활을 오래한 광해군 보다는 불과 두어달만에 사망한 연산군의 유배지로 후대인들에게 더 기억되고 있는데 이 책을 쓴 필자의 견해는 '소설적 주인공처럼 흥미거리가 된 폭군 연산군이 민중들에게 더 인기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이다.
4.나로도와 이건명,조관빈
전남 고흥반도 아래 작은 섬 나로도는 지금은 우주센터가 들어서 있고 대교가 놓여 육지와 연결되어 있지만 조선조 시대에는 말을 키우는 작은 섬에 불과했었다.그러다가 숙종,영조대의 왕위 계승과 관련된 정쟁이 대신들간에 일어나면서 경종 지지세력인 소론 대신들에게 패배한 영조 지지세력인 노론 사대신-이건명,조태체,김창집,이이명-이 모두 유배후 죽임을 당하는데 이중 이건명이 나로도에 위리안치형 유배(1722년 4월5일)되었다가 넉달뒤인 -나로도에 실제 산 기간은 세달- 8월 19일 참형에 처해졌다고 한다.영조 즉위후 복권되어 1725년 제향 공간이 마련되고 1768년에 유허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이 당시 지은 시중 한수*
남쪽나라 바닷가에 병이 깊건만
복녘에서 오는 사람 보이지 않네
한양은 산이 천겹 가로막았고
나그네 창자는 하루에 아홉번 꼬이는데,
매번 비바람이 사납게 불어올 때면
늘 기둥뿌리 무너질가 겁이 난다네.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만이
때때로 외진 바다를 건너가네
-와병 중에 무료하여 전날 쓴 시의 來자에 차운하여:한포재집 권2-
*이건명이 참형을 당한 뒤 이태가 채 못된 1723년 12월 조관빈이란 인물이 유배를 왔다.그의 부친은 노론 4대신 중 한명인 조태채-1722년 진도에서 사사당함-로 이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온 것인데 1725년 3월 영조 즉위후 해배되어 벼슬길에 다시 올라 나로도에 머문 기간은 1년3개월 정도라고 한다.이건명의 아들들이 부친 매장하려 할 때 정적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불행을 겪은 것에 비하면 행운이라 할 수 있는데 1757년(영조33년) 66세로 세상을 뜰 때 까지 대사헌등 여러 벼슬을 역임했다.나로도 유배 기간중에는 나로도의 인정과 물태를 담은 시 80여편을 남겼다고 하는데 그 중의 한편,
눈발 속에 병든 몸으로 걸어가니
사나운 바다는 오랑캐 땅이라네
나루에서 땅이 없는 듯 하더니
뱃머리에 홀연 산이 나타나네.
작은 마을을 대숲에 숨어 있고
오솔길은 솔숲 사이로 나 있네.
말에서 내리자 새해임을 알려준 것은
술을 마셔 불콰해진 섬사람이었네.
-섬으로 들어갔을 때를 추억하여 기록하다. '회헌집 권2'-
5.진도와 '노수신' 그리고 '이주'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 선생은 진도 홍주를 그려 '홍매화 떨어진 잔에 봄눈이 녹지 않았나 싶고 술잔에 비친 홍색은 꽃구경할 때 풍경이로다'라고 읊었다고 한다.이 홍주와 진돗개의 고장 진도가 조선조에는 유배지로 이용되어 연산조 무오사화 때 '이주''홍언필',중종조 기묘사화 때 김정 그리고 사화를 일으켰던 김안로,숙종조 기사환국 때 김수항,신축옥사때 조태채,이런 인물들이 유배를 왔다가 죽거나 풀려 난 유배의 섬이다.
이 책에서는 이중 명종조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19년간 유배 생활을 한 '소재 노수신'과 무오사화에 연루된 '이주'란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비중은 노수신에 주로 두고 '이주'란 인물에 대해서는 쪼금^^
'소재 노수신'은 25세 되던해 친구들과 금강산 유람을 나선 길에서 과거 시험이 실시된다는 소식을 듣고도 금강산 유람을 강행할 정도로 호쾌한 성품이었다고 하는데, 29세인 1542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3년뒤인 명종조 1545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순천으로 유배를 갔다가 1547년(33세)진도로 이배되었다고 한다.이때 벽파정이란 곳에 올라 먼저 유배되어왔다가 사약을 마시고 죽은 김정-기묘사화 연루-,송인수-을사사화 연루-두 선배를 추모하여 지은 시,
두분이야 천상에 있겠지만
외로운 나그네는 바다 가운데 떠 있네.
다행이 오늘 아침까지 명줄을 이었지만
앞길은 여전히 멀기만 하네
-벽파정에서 눈물을 뿌리며 화답하여 지은 시: 소재집 권2-
1567년 유배생활 19년만에 선조가 즉위하면서 유배가 풀려 이후 승승장구, 주요 직책을 역임하다 1585년 최고 벼슬인 영의정까지 올랐고 1590년(선조 23년 75세) 천수를 다했으며 '암실선생자명'이란 묘지명도 스스로 지었다고 하는데 그 내용중 일부 -'절조를 지키며 돌아와 보니 귀양살이도 비로소 편하구나'.
*주로 진도에서 보낸 '유배생활 19년이 노수신에게는 인생의 무덤이 아니라 자신을 키운 터전'이었다고 필자는 이야기하고 있는데 지금으로 치면 사회생활 초년기인 30초반에 유배를 갔고 죄가 가벼워 목숨을 잃지 않았으며 후대 임긍에게 중용되었으니 이런 평이 가능한 것이지 다른 많은 인물들이 유배지에서 죽었거나 -자연사,사사,참형-해배 뒤에도 벼슬길에 나서지 못한 것을 보면 특별한 경우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된다.
*19년간의 유배가 끝나가는 소회를 적은 시
천지의 동쪽이요,조선의 남쪽 땅
옥주의 성 아래애 두어칸의 초당.
용서받기 어려운 죄 고치기 어려운 병
불충한 신하,불효한 자식이 되었도다.
삼천사백일 귀양살이 한 것 외려 다행이요,
태어난 해인 을해년 병진일이 부끄럽구나.
너 노수신은 그래도 죽지 않았으니
임금에게 받은 은혜 어떻게 갚으려느냐.
-세밑에 장난삼아 쓴다:소재집 권4-
*석굴 처사 '이주'
일반 역사서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 인물인데 '점필재 김종직'의 문도로 '붕당을 맺어 국정을 비판하고 시사를 훼방했다는 혐의'로 곤장을 80대나 맞고 진도로 유배되었다고 한다.진도에서 6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세상과 아예 인연을 끊고 금골산에 들어가 석굴에서 살았다고 한다.석굴에서는 아예 승려처럼 살았다고 하는데 벼슬을 할 때는 연산군이 부처에게 재를 올리려 하자 강경하게 불교를 비판했다고 하니 뭔가 언행이 안맞는 것 같다.
연산군 10년(1504년) 4월 제주도로 이배되었다가 갑자사화가 절정에 달한 5월 서울로 압송되어 동월 22일 군기시 앞에서 백관이 보는 앞에서 효수형을 당했고 부친,아들도 참형을 당했으며 딸들은 노비가 되었다고 한다.
-책의 내용으로 봐선 어느 정도의 죄인지, 생몰 연대가 어떻게 되는지 등이 나와 있지 않아 자료가 많이 미비한데, 사화에 연루되어 집안이 뿌리채 날아가버렸으니 옛 왕조시대의 삶은 일반 백성도 힘들었지만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귀족들은 자칫하면 일가족이 몰살을 당하는 세상이었으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세상이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이주'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시-진도 유배 석굴 생활시 쓴 시라고 함.
음산한 바람 불고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바다 기운이 산속의 석굴까지 이르네.
이 밤 덧없는 인생은 흰머리만 남아
등불켜고 때때로 초년의 마음을 돌아본다.
-밤에 앉아서:망헌집-
6.백령도와 이대기
백령도는 서울과 개성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섬이라 고려시대부터 일대의 섬-대청도,소청도-과 더불어 왕족과 고관들을 유배시키는 곳으로 자주 이용되었다고 한다.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개국공신 유금필 장군이 있으며 원나라 순제도 태자 시절 대청도로 유배되어 왔었다고 한다.
이책에서는 '이대기'란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분은 남명 조식의 제자로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으나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하여 공을 새운 공로로 지방관을 역임하였다고 한다.그러던 중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인 계축옥사(1613년) 당시 동계 '정온'이 영창대군을 죽인 강화부사 '정항'을 죽이라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때 동조하는 사람들 틈에 끼였다가 광해군 12년(1620년) 정월에 70 고령의 나이에 불고하고 백령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고 한다. 고령의 나이에 유배되는 것을 당당하게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그 뜻을 밝혀 놓은 시 한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땅에 몸이 있고
아무 생각도 없는 지경에 마음이 있네.
생각을 잊고 사물에 뜻을 두니
사물마다 모두 아름다워라.
남만의 바람과 흉노의 달도
오히려 빼어난 풍경이려니
바다의 대나무와 섬의 소나무도
신선사는 거리인가 보구나.
-무회옹:설학집 권1-
유배 4년째 되던 해 2월 거제도로 이배되던 도중 경기도 고양에 머물렀는데 이때 인조반정이 성공하여 해배되어 4월10일 고향인 경상도 초계로 돌아와 1628년 77세로 사망하였다.
백령도에 유배온 그해에 '백령도지'란 책을 썼는데 20세기 이전에 이처럼 자세하게 백령도에 관하여 기술해 논 책은 없었다고 하는데 이 책에는 섬의 전모-역사,행정 풍속,유적,자연,물산,주민과 생활,해상 교통로와 전략적 위상등 백령도에 관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고 한다.
*책 내용 딴죽 걸기:
-이분이 유배된 해가 1620년이고 유배기간이 4년이니 해배된 해는 1624년이다-책 내용으론 2월 25일 백령도 출발,4월10일 고향 초계 도착-.사망한 해가 1628년(인조6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인조반정은 1623년 음력3월24일로 알려져 있으니 책 내용대로라면 해배는 반정 1년후가 맞는 것 같다.
-본문 말미 인물 소개 약사에 보면 이분이 백령도로 유배가게 된 사유가 함안군수 시절, 대북파의 횡포를 비판하다가 삭탈관직된 김천찰방 문경호의 신원을 요구한 통문을 돌린 죄로 나와있어 본문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
7.제주도와 조정철
유배지로서의 제주는 광해군,김정,정온,송시열,조정철,추사 김정희,김윤식 같은 인물들이 유배를 산 곳이다.이 책에서는 이중 조정철, 정온이란 인물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앞 인물에 주로 비중을 두었고'정온'에 대하여는 쪼금^^
조정철이란 이름은 역사공부를 깊게 한 사람들이 아니면 낯설은 이름이다.그만큼 역사에서비중이 있는 인물은 아니란 이야기인데 ,1777년(정조1년,26세) 강용휘등이 정조를 시해하려고 했을 때 연루되어 제주로 유배되었는데 영조가 왕위에 오르는데 공이 큰 '조태체'의 증손임이 참작되어 참형은 면했다고 한다.1777년부터 1807년까지 31년간 제주와 추자도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810년(순조10년, 59세)에 풀려나와 충청도 관찰사,형조판서 등을 지냈다(졸1831년) .유배 시집인 '정언영해처감록'을 썼는데 여기서 '처감록'이라함은 함정 또는 구덩이에 머문 기록이라는 뜻이라고 한다.1777년 부터 1788년까지 작품을 모은 것이라고 하는데 거의 천여편에 이른다고 한다.그중의 시 한편,
연경에서 처음 귤을 보았다가
섬에 들어와 또 이름을 알았네.
다정한 사람이 늘 보내주었기에
시인의 창자는 곱절이나 시원했네
-대귤:정언영해처감록 권3-
조정철은 유배기간중인 1781년 3월 할아버지 때부터 원수지간이었던 김시구란 인물이 제주목사로 부임하면서 죽음을 맞을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이때 사실혼 관계인 홍윤애라는 여성이 자결을 하는 바람에 위기를 벗어났다고 한다. 이 여성과의 사이에는 실제로 딸(1781~1863)까지 있었는데 다른 곳에 숨겨 화를 모면했다고 한다.
1810년 해배된 뒤 1811년에 31년간 유배 생활을 했던 제주에 목사로 부임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결한 홍윤애의 무덤을 찿아 '제주 목사겸 전라도 방어사 조종철'이란 이름으로 묘문을 직접 짓고 글씨를 써서 '홍의녀지묘'를 세웠다고 한다.묘비뒤에 그녀를 애도하는 시를 썼는데 그 시,
백옥같고 향긋한 육신 묻은지 몇해던가?
누가 그대 원통함을 하늘에 호소했으랴?
저승길 저리도 멀고 먼데 어떻게 갔을까?
매운 피(碧血)는 깊이 묻혀 죽어서도 인연 잇네,
천고의 고운 이름 향초처럼 피어나고
한 집안의 높은 절개,언니 동생 어질구나,
서울에서 검은 머리 이제 다시 볼 수 없겠지만
푸른 풀은 말갈기 앞에서 다시 돋아나겠지.
-홍낭 묘에 쓰다;정언 영해 처감록 권4-
*7~1.제주도와 정온(1569~1642)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1614년부터 1623년까지 10년을 대정현에 머물렀는데 유배 기간중인 1618년 8월 위리안치형에 대한 정황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위리기'를 썼다고 한다. 책 제목이 '대정현 동문 안에 있는 위리에 대한 기록'이고 그 내용이 문집및 후손가에 필사본으로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8.흑산도와 정약전
흑산도는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여 이리 불렸다고 한다.이곳에 현산어보를 쓴 손암 정약전이 1801년 43세이던 해에 진보적 정치집단을 제거하는 기회가 된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아우인 다산 정약용 선생과 함께 유배형에 처해지게 된다.다산 선생은 경상도 장기로,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백서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다산 선생은 전라도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재 유배되어 16년의 유배 생활을 하다가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형제는 1801년 11월 22일 나주 율정에서 가슴 아픈 이별을 했는데 그 4년뒤 다선 선생이 이때를 회상하여 쓴 시가 전한다.그 시,
북풍이 나를 몰아다가
가다 가더 바다를 만나 그쳤건만,
우리 형님은 모진 바람에 휩쓸려
깊은 바다로 들어가셨네.
아내는 과부로 남겨두고
자식은 고아로 만든 채로
바다로 들어갈 그때에도
호탕하게 즐거운 마음이셨지.
호걸의 기상 마음에 서려
백번을 눌러도 백번을 일어났지.
-손암 형님에게 받들어 올리다:다산 시문집 권5-
손암 선생은 유배기간 동안에 섬사람들과 적극 어울려 열렬한 환영릏 받았다고 하며 측실을 두어 아들도 둘을 두었다고 한다.현산어보 외에 조선후기의 '소나무 벌목 금지 정책'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송정사의'란 책을 썼는데 이 책은 흑산도 옆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한 지 3년뒤인 1804년에 쓰여져 유배 기간중의 첫 저작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표해시말'이란 책을 썼는데 이는 우이도의 홍어상인 문순득이 1801년-손암 유배 당한 해임-12월에 홍어를 사가지고 오다가 표류하여 1805년 1월8일에야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과정과 경험을 구술을 받아 썼다고 한다.내용에는 유구,여송(필리핀),중국의 풍속과 가옥을 비롯하여 의복,선박,토산,언어를 다루었다고 한다.
손암선생의 저작중 가장 잘 알려지고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는 '현산어보'는 오랜 기간에 걸쳐 쓰여져서 선생 만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는데 흑산도 어부 장덕순의 도움을 받아 저술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1816년 6월6일 우이도에서 58세에 사망하였는데 아우인 다산선생이 사람을 보내 시신을 모셔오게 하여 충주 부친의 묘소 옆에 안장하였다고 한다.다산선생은 두통의 편지를 제자 이강희와 아들들에게 부쳐 형인 손암선생을 잃은 애통함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섬사람들이 모두 정성을 다해 장사를 치러 주었다'는 내용이 첨부되어 있어 손암선생이 흑산도 주민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유배생활을 한 것을 알 수 있게 한다고 한다.
8-1.우이도와 최익현
1905년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의 폐기와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고 74세 고령임에도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제에 의해 대마도로 유배가서 1906년 순국한 최익현 선생은 이보다 30년전인 1876년 병자수호조약의 페기를 주장한 도끼 상소를 올렸다가 그해 2월16일 우이도로 유배를 당했다.이대 지은 시중 한수,
우이도 산봉우리 높아 구름에 닿았는데
오르다 보니 기력의 피로마저 잊겠네.
아름다워라 바다의 수없는 섬들이
파도에 천년만년 벽처럼 서 있으니
-우이도에 올라서 즉흥적으로 짓다;면암집 권1-
우이도 유배시 마음의 평화를 얻은 최익현 선생은 흑산도에도 몇달씩 머물곤 했다고 하는데 이때 천촌리에 일신당이라는 현판을 단 서당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지장암이라고 부르는 바위에 '기자가 봉해진 강산,대명황제의 일월'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선생의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고 한다.
9.녹도와 신헌
지금의 전남 고흥반도 끝자락에 있는 녹동항이 조선 시대에는 녹도라 불리우는 섬이었다고 한다.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의 부장이었던 이대원이 순절한 곳이기도 하고 녹도만호로 있으면서 녹도를 지킨 정운 장군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이곳에 조선 철종조에 신헌(1810~1884,74세)이란 분이 금위대장으로 재직중이던 39세(1849년 7월)에 유배를 와 5년간 지냈다고 한다.죄목은 '신원이 분명치 않은 의원을 직접 데려다가 왕을 진찰하게 했다'는 것이었는데 헌종 사후 왕권강화 세력이 안동김씨 일문 외척세력에게 밀려난 것이라고 하며 이때 추사 김정희,권돈인,조병현과 같은 인물도 같이 축출되었다고 한다.신헌의 이곳에서 유배생활은 유배되기 몇년전 전라 우수사와 전라병마 절도사를 지낸 탓인지 현지인한테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지냈다고 하는데 , '유배 생활이 비록 나그네의 괴로움이 있으나 식구들을 천리에 두니 참선보다 낫다'라고 읊으며 낙천적으로 지냈다고 한다.유배 당시 지은 시들이 '영해합고'란 이름으로 묶여 전한다고 하며 연작시 쉰다섯편에는 '녹서잡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이는 '녹도에서 두서없이 지은 절구시'라는 뜻이라고 한다.이중의 시 한편,
초가집 문루와 흙으로 쌓은 진보가 겨우 이어지고
그 안에는 한자리씩 차지한 민가들이 들어찼네.
게딱지 같은 살림살이를 거북등 같이 착취하니
풍년에도 굶주려 흉년의 얼굴일세
-녹서잡절 ;위당집 권7-에 수록되어 있는데 100여호 되는 민가가 모두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 나가는 가난한 삶을 읊은 시이다.
녹도는 신헌 이전에는 '강진'이란 분이 1842년에 흥양감독관이란 직책으로 도양현이란 곳에 두세해를 머물렀다고 하는데 시집'대산시초'를 남겨 금당도,거금도,득량도,팔영산을 묘사한 빼어난 시가 있다고 한다.이중에 녹도를 묘사한 시 한수,
풀과 나무에 덮힌 황폐한 성에는 늙은 병사들만 남아있고
색칠한 낡은 사당에는 충신을 기억하네.
임진년의 침략자를 뱃사공이 어이 알랴?
뱃조래 한 곡조에 마음만 처량하다.
-배에서 녹도진을 바라보며:대산시초 권2-
신헌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소치 허련,시승인 초의선사등과 유배지인 녹도에서도 교유를 계속하는데 '타향도 오래 머물다 보니 제 집처럼 느껴진다'라고 읊을 정도로 녹도 유배생활에 잘 적응하며 지내다가 1854년 5년간의 녹도 유배생활을 끝내고 전라도도 무주로 이배되었다. 그후 1857년에 완전히 풀려난 다음 1860년 포도대장으로 임명되면서 다시 관직으로 나가,이후 조선말기 주요 사건인 강화도 조약,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 9~1여도와 신기선
여도는 전남 고흥에 있는데 예전에는 장흥과 남양을 합친 이름인 흥양에 속했다고 한다.현재는 점암면 여호리에 해당된다고 하는데 섬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진짜 섬은 아니고 고흥반도 처럼 목이 잘록하여 섬으로 착각했다고 한다.조선시대에는 군사 요충지여서 진이 들어서 있었고 만호 벼슬의 관원이 책임지고 지키는 병영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요도가 어느 정도인가하면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숱하게 등장할 정도였다고 한다.이 여도에 1886년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신기선'이란 인물이 유배를 와 '유학경위'라는 책을 써서 여도의 존재를 알리게 되는데 1894년 유배에서 풀려나 갑오개혁후 군부,학부 대신등 고위직을 역임하고 법부대신 ,중추원 의장등 고위직을 맡았으며 1905년 보호조약 체결후 함경도 관찰사로 나간 것으로 친일 행적이 약하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합방 이전이긴 하지만 조선이 이미 일본의 영향력 아래 들어간 상황에서 고위직 벼슬을 한 것으로 보아 친일 인사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저자가 친일 행적이 의심되는 인물을 소개한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유배지로서의 '여도'를 소개하다보니 마땅한 인물이 없어 그러한 것으로 이해하고 넘어갑니다.^^그래서 책에 실려있는 시는 소개를 생략했습니다.^^-
10.남해도와 김만중
국문학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서포 김만중은 53세이던 1689년 7월 남해로 유배를 와 1692년 4월 30일 죽을 때 까지 근 3년간을 유배생활을 했다.유배를 오게 된 연유는 숙종조 남인이 일시 정권을 잡게되는 '기사환국'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인데 ,이 정쟁 1년전 김만중은 남인 출신 좌의정 조사석이' 청탁으로 정승이 되었다'는 말을 퍼뜨려 숙종의 미움을 사 유배형에 처해진 것이라고 한다.
기사환국때는 사위인 이이명의 형 이사명은 참형 에 처해지고 장조카 김진귀는 제주도,둘째 조카 김진규는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조카들이 유배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
바다 구름 끝에는 아스라한 섬 세개
방장산과 봉래산,영주산이 가까이 이어졌네.
숙부와 조카 형제가 나누어 차지하고 있으니
남들은 우리보고 신선으로 보지 않을까.
-남해에서 두 조카가 절도에 유배되었다는 말을 듣고:서포집 권6-
국문학사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김만중의 작품중 '구운몽'은 선천 유배시에 지었고 '사씨남정기''서포만필'은 남해 유배시 지은 작품이다.모두 유배 중에 지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벼슬자리에 있을 때는 정쟁에 몰두하느라 글을 쓸 시간이 없다가 유배 기간 중에는 시간이 많으니 평소 지니고 있던 문재를 발휘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그나저나 김만중의 유배사유가 '유언비어 살포죄'이니 문재는 있으되 인품은 별로인 것으로 판단되어 이런 인사의 글을 국문학사에서 비중을 두고 교과서에 까지 실어 놓고 공부하게 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다.관동별곡을 쓴 송강 정철도 그렇고....
*남해에는 또 화전별곡을 쓴 서예가 김구가 1519년부터 1533년까지 13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32세부터 44세까지 유배생활을 하고 풀려난 이듬해에 사망했다고 하는데 중종조 조광조,김정등이 축출당한 기묘사화에 연루된 탓이라고 한다.과거시험에 두번이나 장원급제를 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 중종으로부터 총애를 한몸에 받았으나 정쟁에서 밀려나 유배 생활로 한창 활동할 시기를 허비하고 말았다.유배기간 동안 현재의 설천면 노량리에 거소를 정해 머물렀다고 하며 이곳에 선생을 기리는 '자암 김구 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를 원님으로 부임한 후손이 세워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
대표작인 화전별곡은 경기체가 형식의 시가인데 형식,내용,분위기가 모두 한시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한다.이 시가의 첫번째 장은 ,
하늘 끝 땅끝의 한 점 선도
왼편에는 망운산,오른편에는 금산,그리고 봉내와 고내
산천은 기이하여 정기를 받은 호걸이 태어나 인물이 번성하다.
위,하늘 남족 승경지의 경치가 어떠한가?
풍류와 술과 여인,한 시대의 인물들
위,나와 함께 몇분이나 되나?
다른 유배문학 작품이 대부분 유폐된 섬에서 세월을 허비하는 안타까움과 고향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자신을 풀어줄 임금에 대한 연모의 정을 묘사하고 있는데 비하여 '화전별곡'은 유배지도 멋진 인생을 구가할 수 있는 곳이라고 노래를 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다소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고 한다.
11.신지도와 이광사
신지도는 완도에서 동쪽으로 5키로쯤 떨어져 있는 섬이다.지금은 신지대교로 완도와 연결되어 있어 육지와 다름없이 되어버렸으나 조선조에는 유배의 섬이었다.이 섬에 처음 유배된 사람은 1694년 노론이 집권하면서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 정치가 목내선이란 인물이고 그 다음엔 1721년 경종이 즉위하면서 노론 4대신이 사약을 받게되는 신축옥사시 송강 정철의 현손이자 송시열의 제자였던 정호가 이곳으로 유배되었다.유배 행렬은 이후 이광사,정약전,이세보로 이어지는데 왕실의 귀공자였던 이세보는 철종조인 1853년 안동김씨의 견제를 받아 이곳으로 위리안치형을 받고 와 혹독한 유배생활을 3년간 했으나 다행이 풀려나 다시 영화를 누렸다고 한다.(유배 체험 한글일기인 '신도일록'과 시조집 '풍아'가 현전한다).
그러나 이광사는 1762년 유배되어 15년을 생활하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대과에 급제한 이가 열셋이나 될 정도로 뛰어난 인재가 몰린 유명한 집안-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이 이광사의 아들-이었으나 소론 집안인 관계로 1725년 노론 지지를 등에 업은 연잉군(영조)이 왕이 되면서 몰락의 길을 걷고 만다.
부친은 밀양을 거쳐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 사망했고 백부는 추자도에 유배되었다가 한양으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던 도중 사망했다고 한다.정작 이광사는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채 야인 생활을 하면서 윤순을 만나 글씨에 눈을 떴는데 그의 글씨를 사고 파는 장이 설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755년 권력에서 소외된 소론의 일부가 국정을 비방하는 방을 붙인 것이 발각된 사건(을해옥사)에 연루되어 체포되고 이에 놀란 부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동년 3월 1차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되어 이곳에서 7년 유배생활을 한뒤 '선비들을 모아 글씨를 가르친답시고 백성을 선동한다'는 사헌부 상소에 의해 1762년 다시 신지도로 유배를 오게 되었다고 한다.
부령 유배중에 죽은 부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읊은 시가 전하는데,
'내 죽어 뼈가 재가 된들
이 한은 정녕 줄지 않으리.
내 죽어 백년이 지난다 한들
이 한은 응당 길어지리라.
수미산이 개미굴처럼 작아진들
황하가 물방울처럼 가늘어진들
천번이나 고불이 땅에 묻힌들
만번이나 신선이 땅에 묻힌들
천지가 요동쳐서 원시 싱태가 되고
해와 달이 연기처럼 어둑해진들
이 한은 맺히고 맺혀서
오랠수록 더욱 굳어지리라.
-아내를 애도하며:두남집-
이광사는 신지도에서 서결을 완성했고 (1768년) 부령 유배시 역사 주요 장면을 30편의 노래로 쓴 '동국악부'를 1770년 5월 글씨로 써서 '주애'라는 이름의 일곱살 된 딸에게 주었다고 한다.이 딸은 세살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를 따라 신지도로 왔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이광사의 묘법을 전수받았다고 하는데 아버지 이광사가 죽은 후 섬사람에게 시집가서 살았다고 하나 지금 후손의 자취는 없고 기록으로만 이름이 전한다고 한다.
(*아무리 명문가의 자손이라도 집안이 정쟁에 휘말려 몰락하고 나면 나락으로 떨어진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또 하나의 좋은 사례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다.)
이광사는 죽기 3년전인 1774년 겨울에 자신의 자취를 남기고자 화가 신윤복의 아버지인 신한평에게 초상화-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함-를 그리게 했는데 이때 신세를 많이 진 집주인-금실촌 조이빈?-의 초상화도 함께 그리게 하여 지금도 전한다고 한다.
1777년 8월26알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는데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1801년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으로 유배를 오면서 이광사의 흔적을 찿았는데 선생의 저서 '탐진촌요'에 이광사를 추모하는 시를 써놓은 것이 있어 전하는데 그 시,
촌아이의 서법이 정말 지루하니
붓놀림 하나하나 비뚤기만 하네.
그 옛날 신지도에 글씨 서당 열었기에
아전들은 다 이광사 글씨를 배웠네.
-탐진촌요;여유당 전서 권4-
다산선생은 이광사의 글씨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고 하는데 '강세황이 그를 비방한 것은 오히려 그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한 소치'라고 하였으며 백련사에 쓴 그의 편액 글씨를 보고 '꿈틀대는 용처럼 헌걸차고 기세가 있다'고 평했다고 한다.전설적인 서예가인 김생보다 낫다고 까지 했다고 하는데 '큰 그릇이 불우하게 궁벽한 섬에서 죽었으니 처량한 자취는 눈물을 쏟게 만든다'라고 글로써 탄식하였다고 한다.
12.임자도와 조희룡
전남 신안군 최북단에 있는 임자도는 자연산 들깨가 많이 난다고 해서 들깨 임자를 써서 임자도로 불렸다고 하는데 군사적 요충지 정도로만 알려진 이 섬에 조선 말기의 화가인 조희룡(1789년,정조 13년~1866년,고종3년)이 1851년 62세 되던 해에 유배를 가 3년뒤인 1854년 해배되었다.양반 신분은 아니었으나 뛰어난 그림과 글 솜씨로 임금으로부터 큰 인정을 받아 헌종은 그를 불러 시문과 서화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여유로운 삶을 살았으나, 1851년 영의정 권돈인이 정적들의 공격을 받아 유뱃길에 오를 때 추사 김정희도 북천으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 이때 추사의 문인이었던 조희룡도 유배를 가게 되었다고 한다.이때 심경을 읊은 시 한수,
거친 산 대낮에 날씨는 침침하고
언덕에는 수수가 무성하게 드리웠네.
두뿔 오뚝 솟은 한가로운 누런 소는
잔등 위에 가을 참새가 앉아도 무심하네.
부서진 창으로 이따금 푸른 바다와 산이 보이는데
돌을 쌓아 만든 문은 밤에도 닫아걸지 않네
수많은 반딧불이는 새파랗게 가을 별빛처럼 모였네.
-신해년 8월22일 임자도로 유뱃길을 떠났다.눈으로 본 것과 마음으로 기억한 것을 모두 시로 적어 근심과 답답함을 풀었다:조희룡 전집-
조희룡은 임자도에 머무는 2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덕분에 100여 가구 되는 섬 집집마다 그이 그림이 거의 걸려있을 정도였었다고 한다.
임지도에 들어온 지 2년반 정도 지난 1853년3월14일 유배에서 풀린다는 편지를 받았고 나흘후인 18일 섬을 떠났다고 하는데 이때 나이가 65세였다고 한다.해배 편지를 받고 '정든마당의 대나무와 헤어지는 마음'을 표현한 시가 전하는데,
나의 정은 오히려 무정한것에 극진했으니
유독 노니는 물고기와 새에게만 그러하였겠나
다시 창 앞에 몇그루의 대나무가 있어
이미 삼년을 꿋꿋이 붙들고 지켜주었네.
-뜰안의 대나무와 머뭇거리며 이별을 고하다:우해악암고의-
13.추자도와 안조원
조선조 추자도는 해남에서 사흘 밤낮을 노를 저어가야 도달할 수 있는 먼길이어서 17세기 이전에는 유배도 안 보낸 최악의 섬이었다고 한다.연산조때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된 홍유손이란 선비가 험한 뱃길 도중에 잠시 들른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때 지은 글,
온 섬의 남북으로 바위 절벽이
만 길 높게 깍은 듯 에워싸 있네.
왜송은 천년동안 자라지 못한채 서 있고
물새는 울음만 들리고 눈에는 보이지 않네.
우묵한 바위 구멍은 옹기 입을 닮았고
들고 나는 파도는 두런거리는 사람 소리,
가지잡고 후들후들 떨며 조바심 내노니
떨어지는 그림자의 아찔함에 용조차 놀라겠네.
-홍유손 '추자도에 들어서서:소총유고 하-
이러던 추자도에 18세기 무렵부터는 유배객이 넘쳐나 정조가 민폐까지 걱정하는 정도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중에 우리에게 '만언사'의 저자로 알려진 안조원이란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이 책은 소개하고 있다.안조원이 유배를 가게 된 이유는 정조 재위중 대전별감직에 있으면서 '왕을 지근거리에 모신다는 이유로 많이 오만스럽게 굴었다고 하는데 이게 도가 넘쳐 어인을 몰래 만지다가 발각된 때문'이라고 한다.
멀고도 험한 뱃길로 유배를 오면서 천신만고 끝에 섬에 도착한 소감을 쓴 시가 전하는데,
수로 천리 다 지나고 추자섬이 여기로다.
도중으로 들어오니 적막하기 태심하다.
동서남북 둘러보니 날 알 이가 뉘 있으랴
뵈는 것 바다요 들리는 것 물소리라.
벽해상전 생긴 후에 모래 모여 성이 되니
추자섬이 생길 적에 천자옥이 여기로다.
대해로 수성하고 운산으로 울을 삼아
세상 음신 그쳤으니 인간이 아니로다.
안조원은 섬 주민들이 삶이 가난한 탓에 유배 생활을 힘들게 했는데 그를 떠맡은 집주인이 화를 낸 글이 전한다. 그 글 내용,
내 살이 담박할 줄 보시다 아니 할까?
앞뒤에 전답없고 물속으로 생애하여
앞 언덕에 고기 낚아 뒷 녘으로 장사가니
삼망얻어 보릿섬이 믿을 것이 아니로세
신겸처자도 삼구도 호구하기 어렵거든
양식없는 나그네를 무엇먹고 살잔 말고?
안조원의 유배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가는 '나중엔 하다못해 걸인 노릇까지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는데 섬에서의 모든 생활을 '만언사'란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해 본인 이름과 추자도를 유배문학(가사)의 한 산실이 되게 만들었다.
*추자도에는 안조원 이전에 이진유란 인물이 1725년(영조1년) 유배를 와 '속사미인곡'이란 가사를 남겼다. 이 인물은 소론 집안이어서 경종 재위 3년동안 권력을 휘둘러 노론세력을 몰아내는데 앞장 섰는데 영조가 즉위하면서 권력을 잃고 5년여를 추자도에서 유배를 살다 1730년 5월 '물고'형을 받고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학문은 뛰어 났지만 인품이 너그럽지 못하여 정적을 물리치는데 앞장섰다'는 것인데 '인품과는 관계없는 뛰어난 문재만으로 후대에 전해지는 글을 남겨 놓았다'는 것이 '아무리 뛰어난 예술 작품이라도 인품이 뒷받침되지 않는 작품을 후대에 칭송하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것 아닌가 하는게 개인적인 생각'이라 별로 후한 점수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 책 소개를 마치며:책 내용 중에는 최익현 선생과 대마도에 관한 이야기도 있는데 대마도가 우리나라 섬이 아닌 관계로 소개를 생략하였습니다.최익현 선생 대마도 순국은 역사 교과서에도 나와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진 내용이기도 하고 제가 이 책을 읽어보려고 한 이유-우리나라 어떤 섬에 어떤 인물이 유배 생활을 어떻게 했을까?-와 관계가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자,출판사등의 정보는 책 제목을 검색하면 줄줄이 나오게 되어 있어 일부러 생략하였습
니다.필요하면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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