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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德川家慶:1837~53 재위)의 로주(老中)]미즈노 다다쿠니(水野忠邦)

Bawoo 2018. 9. 30.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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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노 다다쿠니
水野 忠邦
Mizuno Tadakuni.jpg
미즈노 벗풀(水野沢瀉)
미즈노 벗풀(水野沢瀉)
제1대 엔슈 하마마쓰 번
1817년 ~ 1845년
시대 에도 시대 후기
출생 간세이 6년 음력 6월 23일
사망 가에이 4년 음력 2월 10일
야마가타
계명 英烈院忠亮孝友大居士
관위 종4위하, 지주, 에치젠노카미
막부 에도 막부 로주 수좌 등
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徳川家斉) → 이에요시(家慶)
히젠 가라쓰 번주 → 엔슈 하마마쓰 번주
씨족 미즈노 씨
부모 아버지: 미즈노 다다아키라(水野忠光)
형제 동생: 나이토 마사쓰나(内藤正縄), 호리 나오치카(堀直哉), 아토베 요시스케(跡部良弼) 등
아내 정실: 사카이 다다유키(酒井忠進)의 딸
자녀 다다키요(忠精) 등
특기사항 로주 수좌로 덴포의 개혁을 주도


미즈노 다다쿠니(일본어: 水野忠邦 미즈노 타다쿠니[*])는 에도 시대 후기의 다이묘이다. 히젠 국 가라쓰 번 제4대 번주, 후의 도토미 국 하마마쓰 번 초대 번주. 노중수좌로써 덴포의 개혁을 주도했다.

1794년 간세이 6년 6월 23일 가라쓰 번의 3대 영주 미즈노 다다아키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맏형 요시마루가 요절했기 때문에 1805년 분카 2년 가라쓰 번의 세자가되어, 2년 후인 1807년 제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와 세자 도쿠가와 이에요시에게 처음 선을 보였다. 그리고 종5위 아래, 식부성의 소보(하급 관리)로 임관했다.

분카 9년(1812년)에 아버지 다다아키라가 은거했기 때문에 가독을 상속한다.

다다쿠니는 막부 조정에서 승진하는 것을 강하게 희망했고, 많은 비용을 써서 엽관 운동(뇌물)을 한 결과 분카 13년(1816년)에 소샤반이 된다. 다다쿠니는 소샤반 이상 승진을 원했지만 가라쓰 번이 나가사키 경비를 하는 특정한 임무 때문에 승격에 실패한 것을 알자 가신의 간언을 무릅쓰고 이듬해 1817년 분카 14년 9월, 실봉 25만 3,000석 가라쓰에서 실봉 15만 3,000석 하마마쓰 번으로 전봉을 자원하여 실현시켰다. 이 임지를 바꿀 때 미즈노 가문의 가로 니혼마쓰 요시카도(二本松義廉)는 다다쿠니에 간언을 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또한 가라쓰 번에서 일부 천황의 영지에 몰수한 지역이 있어 지역 사람들은 번을 바꾸기 위한 공작을 위한 뇌물로 사용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과 천황 영지의 연공 회수가 어려웠기 때문에 이후에도 원망을 샀다.

이 국체로 인해 다다쿠니의 이름은 막부 조정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같은 해에 지샤 부교를 겸임하게 된다. 막부의 중신이 된 것으로도 오히려 다른 사람으로부터 엽관 자금 (뇌물)을 받는 입장이 되어 신하들의 불만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었다.

그 후 쇼군 이에나리의 아래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1825년 분세이 8년에 오사카 성주 대리가 되었고, 종4위하로 승위한다. 이듬 해 1826년교토 쇼시다이가 되어 시종 에치젠노카미로 승서했고, 11년에 니시노 마루의 로주가 되어 쇼군의 세자 도쿠가와 이에요시의 보좌역을 지냈다.

1834년 덴포 5년 아버지 다다아키라가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대신 혼마루 루주에 임명되었고, 1837년에 마음대로 어용괘를 겸하고, 1839년에 노중 수좌가 되었다.


[같이 보기]

  • 아사노 나가마사
  • 아사노 무네쓰네
  • 아토베 요시스케
  • 홋타 마사요시
  • 마나베 아키카쓰
  • 오타 스케모토
  • 야베 사다노리
  • 덴포의 개혁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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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12대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이에요시[德川家慶:1837~53 재위]의 로주[老中:쇼군 직속으로 정무를 총괄하고 다이묘(大名)를 감독하던 직책].

    덴포 개혁[天保改革]을 단행했는데 이 개혁은 도쿠가와 바쿠후의 통치력을 약화시키고 있던 사회적·경제적 퇴보를 저지하고자 한 마지막 시도였다.

    유력한 봉건 영주의 아들로 태어나 1828년부터 도쿠가와 바쿠후의 후계자 이에요시를 가르쳤다.

    1834년 쇼군의 로주가 되었지만 3년 뒤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濟 : 1787~1837 재위]가 죽고 이에요시가 쇼군에 오르고 나서야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후 1843년 실각할 때까지 도쿠가와 정권을 실질적으로 통제했다. 그는 10년 가까이 흉년이 계속되어 민심이 흉흉해져 있을 무렵에 권력을 잡았는데, 이 시기는 중국이 아편전쟁(1839~42)에서 영국에 패배한 시점과 일치한다. 따라서 그는 만약 일본이 국내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서양의 침입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리라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도쿠가와 시대 초기의 소박한 무사정신을 회복시키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개인이든 정부든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검약령(儉約令)을 내렸는데 이는 너무 극단적이어서 실행을 강요하기는 힘들었다. 또 상품경제의 가치를 하찮게 여긴 그는 상품경제의 성장을 저지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귀족계급이 중간계급에게 진 빚을 탕감해주었으며, 선임자들이 인가한 가부나카마[株仲間:상인조합]들을 해산시켰고, 도시로 이주해 정착한 농민들을 농촌으로 돌려보냈다. 특히 에도와 오사카[大阪] 부근에 있는 다이묘들의 토지를 바쿠후의 직할령으로 몰수하려 한 시도(아게치레이[上地令])는 커다란 반발을 샀다. 미즈노의 정책들이 일반의 호응을 잃게 되자 결국 이에요시에 의해 해임되었다.[다음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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