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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시대(1603~1867)의 유명한 로주[老中]- 다누마 오키쓰구 (田沼意次, Tanuma Okitsugu)[

Bawoo 2018. 9. 27. 23:32


다누마 오키쓰구 (田沼意次, Tanuma Okitsugu)[1719~1788]


일본 도쿠가와 시대(1603~1867)의 유명한 로주[老中]. | 부패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비범한 재능을 갖고 있었으며 실제로 정부의 재정상태를 회복하고 교역을 증진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신분 변동이 극히 제한되어 있던 시대에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권력의 핵심부에 올랐다.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9대 쇼군[將軍]인 이에시게[家重:1745~60]의 시종으로 시작하여 10대

쇼군인 이에하루[家治:1760~86] 때 바쿠후 최고관직인 로주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며 주요봉건영지를

다스리기도 하였다. 중앙정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자 그는 국내외의 교역을 촉진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정부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 농업 생산성의 향상을 위한 토지개간 및 관개시설의 정비에 힘썼으며 러시아를 비롯한 외국과의 교역을 증진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마련했다. 이를 위해서 러시아의 항로와 접해 있는 일본 북쪽 끝의 홋카이도[北海道]와 사할린으로 주민을 이주시켜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하기도 하였다.

또한 금·은·구리 교역에 대한 기존의 정부 독점정책을 강화하여 독점품목에 백반·장뇌·인삼·철·청동·석회·등유와 같은 주요상품을 추가했으며 광물 생산을 늘리기 위해 애쓰기도 했다. 또 상인 조합들을 다수 허가하고 정부가 관장하는 대금업 기관을 세움으로써 새로운 공식 소득원을 찾아냈으며 정부수익을 더욱 증대시키기 위하여 화폐가치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 관료조직 내에서 상급자에게 뇌물을 주는 일을 권장한 정책으로 비판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추진한 상업진흥정책이 잘못된 것이며 정부가 상인과 귀족계급의 사치스러운 생활방식을 엄격히 다스려 과거의 무사정신과 봉건적 덕목을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당시 횡행하던 부정부패로 인해 비난을 받았고 기근, 농민반란, 노동자 계급의 불만에 대해서도 책임을 추궁받았다.

다누마는 일본 역사에서 가장 인기없는 관리 중 한 사람이었다. 1784년 그의 가족을 해치려는 음모가 실행에 옮겨져 당시 하급관리였던 아들이 암살당했다. 2년 뒤 이에하루가 죽은 다음에는 모든 공직과 영지의 상당부분을 빼앗겼다. 1787년 남아 있던 토지의 일부마저 몰수당했고 그는 감금되었다.[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