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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금을 임의로 유용하여 백성을 구휼한 의인]장복선(張福先)

Bawoo 2018. 10. 8. 23:17



의인 장복선(張福先)

 

조선 영조(英祖) 때 일이다.

 

1775년(영조 51년)에 채제공(蔡濟恭= 정조 때 유명한 정승)이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가 부임하여 정무를 보던 어느 날, 천류고(泉流庫= 중국관계 물자를 보관하던 창고)를 조사하게 되었는데 은 2천 냥(1만 냥이라고도 함)이 부족했다. 그래 창고지기인 장복선(張福先= 張福尙이라고도 함)을 잡아다가 문초하니 그는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고 묵묵부답이었다. 채제공이 판관에게 물어 보니 장복선에게서는 은 2천 냥을 갚을 여력이 없다하니 옥에 가두어 두고 관찰부 관리들과 회의를 한 뒤 장복선을 참형에 처하기로 했다.

 

그런데 장복선은 감옥에서 자신에게 참형(사형)이 떨어졌다는데도 옥리들과 태연하게 희희덕 거렸다. 그러다가 죄목이 건몰(乾沒= 아전이 나라의 물건을 훔쳐서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이라고 하니,

“나는 죽어도 아쉬울 것이 없으나 나라의 물건을 훔쳐서 내 배를 채웠다는 말을 듣는다면 대장부로서 어찌 치욕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천류고에서 은을 빼낸 사정을 말하겠네.”하고,

옥리에게서 붓과 종이를 청하여 쓰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아무개가 가난해서 초상을 치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은 몇 냥을 주고, 아무 처녀와 총각이 혼인할데 돈이 없어서 은 몇 냥을 주고, 아무개가 병이 들어도 약을 쓰지 못해 약값 하라고 은 몇 냥을 주고, 아무개 노인이 환곡을 갚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은 몇 냥을 주고, 등 등 ... ’

 

채제공은 장복선의 사정을 알게 되었으나 나라의 돈을 훔쳐 사용한 것은 중죄라고 생각하여 판결대로  참형에 처하기로 했다. 채제공의 명령에 의해 장복선을 처형하려고 끌어냈더니, 사방에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채제공은 내심 놀랐으나 나라의 중죄인을 살려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 사형을 집행하라고 했는데, 이때 기생 백여 명이 몰려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앉아서 노래를 합창했다.

 

그를 용서해 주사이다(乞饒)

그를 용서해 주사이다(乞饒)

장복선을 용서해 주시기를 만 번 이라도 비나이다(萬 乞饒 張福先)

미동 어르신, 채 판서님(美洞爺爺蔡尙書)

저 장복선을 용서해 주사이다(彼張福先乞饒全)

장복선을 용서해 주시면(張福先如得饒)

한양에 올라가셔서 정승이 되오리다(此回知登上台筵)

만약에 그리 되지 못한다 하여도(上台筵雖未筵)

고운비단 댕기를 맨(剪板樣子錦唐)

젊은 첩을 무릎 앞에 앉히리다(得小郞君在膝前)

그를 용서해 주사이다(乞饒)

그를 용서해 주사이다(乞饒)

장복선을 용서하여 명대로 살다 죽게 용서해 주사이다(乞饒張福先 終年)

 

녹의홍장으로 치장한 백여 명의 기생들이 일제히 사형장에서 장복선을 용서해줄 것을 청하는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또한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도 노래를 따라 손을 모아 빌었다. 이에 채제공은 기생들까지 사형장에 나와 노래를 부르자 의아했다.

 

이때에 감영의 장교 하나가 벌떡 일어나서 고리상자를 땅에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장복선을 죽게 할 수는 없소. 장복선을 살리기 위해 속전을 냅시다.” “옳소!” “옳소!”“옳소!”

사람들이 소리치며 호응하여 금방 천 냥이 넘었다.

 

“장복선은 공덕이 있는 자가 아닌가? 이런 자를 어지 죽일 수 있는가?”

채제공은 부족분을 채워 놓고 장복선을 석방했다.

 

장복선을 위해 은을 모은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튿날 부족한 양도 전부 채워졌다. 장복선이 석방되고도

먼 지방에서 은을 싣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이 일화는 심노승의 효전산고(孝田散稿)와 김려의 담정총서(潭庭叢書) 중 이옥의 산문집에 실려 있다.

 

장복선이 나라의 돈을 훔쳐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 것은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지만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도 마다하지 않은 점은 평가할 만하다.[이수광의 잡인열전에서 발췌.]

 

그런데 정약용의 다산시문집 제17권유사(遺事)방친(旁親)의 유사에 장복상(張福尙)이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동지공(同知公= 鄭 樹)은 참의공(參議公)의 서자(庶子)인데 뜻이 크고 남다른 기개가 있어 젊었을 때에는 호협(豪俠)을 일삼았다. 굽이 높은 신을 신고 부애(鳧厓)의 좁은 길에서 한 발로 걸어갔는데 몸놀림을 마음대로 하였다. 자라서는 기질을 굽히고 꺾어 공손하고 삼갔다. 성품은 관대하여 아낙들이 자질구레하게 말이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장난삼아 여러 당친(堂親)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우리 어머니의 말을 들었더라면 거의 사람이 되지 못할 뻔했다.”

하고는 크게 웃었다. 그의 기이한 이야기와 뛰어난 해학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일찍이 번옹(樊翁 채제공(蔡濟恭)을 말함)을 따라 비장(裨將)이 되어 함흥(咸興)의 막하에 이르러 여러 관부를 순행(巡行)하게 되었다.

..................

또 그를 따라 평양에 이르렀을 때 장복상(張福尙)이란 자가 있었는데. 공은(公銀) 1만 냥을 축내었다. 마땅히 사형감이었으나 그는 성격이 호협하여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서도(西道) 백성들이 다투어 저마다 그의 죄를 대신 받으려고 하였다. 공이 그를 위해 주장에게 고하여 자기의 봉급을 모두 털어 그것을 보상케 했으나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자 서인(西人)들이 다투어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칼자루를 장식한 테두리를 떼어 내놓았고, 아녀자들도 가락지를 벗어서 던져 주었다. 잠깐 사이에 은(銀)이 모자라는 양만큼 채워져서 장복상은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성명(姓名)이 진신(縉紳) 사이에 알려져서 무릇 안절사(按節使)가 되어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다투어 공을 보조원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同知公。參議公之庶子也。倜儻多奇氣。少任俠。嘗躡高齒屐於鳧厓之脊。一線之徑。而行逞能。旣長折節爲恭謹。性寬大。不喜婦人瑣瑣多口舌。嘗戲謂諸堂親曰吾聽從吾母氏之言。幾不成人。遂大笑。其奇談善謔多類此。嘗隨樊翁爲裨將。赴咸興幕下。 ....... 又隨至平壤。有張福尙者欠公銀萬兩當死。而福尙任俠樂施。西民爭欲百身以贖之。公爲之告主將。竭俸錢以償之。尙未滿。西人爭解佩刀摘其櫑釦。其婦女脫戒指擲之。頃刻而銀相當。福尙遂得活。以故聲重搢紳間。凡按節出外者。

 

다산시문집 제17권유사(遺事)방친(旁親)의 유사


[출처] cafe.daum.net/suiljae/BeNa/1303   수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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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訟事)로 읽는 옛얘기] <3>이옥의 '장복선 傳'

서민 돕다 돈 유용한 창고지기 이야기


문무자 이옥(文無子 李鈺.1760∼1812)은 조선 후기 실학파 문인의 한 사람이다.그의 문학세계는 당대의 일상 현실은 물론 민족적인 것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을 보인다.'장복선 전(張福先 傳)'은 특히 송사문제를 다루고 있는 한문단편으로서 우리의 주목을 끌 만하다.
 
송사이야기는 이해 당사자의 갈등과 그 판결에 얽힌 사연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그런데 이와는 달리 대립 관계를 조정해 화해로 끝맺는 경우라든지,죄인에게 은전을 베풀어 죄를 감면해 주는 특이한 이야기도 있다.전자의 예로는 '진대방전'을,후자의 예로는 '장복선전'을 들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번암 채제공이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주인공 장복선은 평양 감영의 은을 보관 관리하는 창고지기로 일하면서 2천냥 상당의 은을 유용한 죄목으로 처형을 기다리는 딱한 처지에 있었다.그는 평소 인간적 정리가 도탑고 남의 어려움을 보면 발벗고 나서기 일쑤여서 서민들의 선망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의 사람됨됨이를 아는 번암은 가만히 옥중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는데,처형 전날 밤이 되자 평양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겨 술이랑 음식을 다투어 옥중으로 들여보내 주는 것이었다.그는 태연히 술잔을 기울이면서 담소하다가 지필묵을 가져오게 하고서는 '죽는 것을 아까워 할 까닭은 없으나 내가 죽은 후 혹시 관의 재물을 훔쳐 사복을 채웠다는 말이 남으면 이 또한 대장부의 수치가 아닌가'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도와준 내용을 목록으로 작성하였다.

장례비용이 없어 염습도 못하고 있는 이웃을 위해 쓴 몇 냥의 은,혼기를 놓친 노처녀를 위해 결혼 비용으로 마련해 준 은 몇 냥,노총각 장가들일 때 쓴 몇 냥,환곡을 갚지 못하고 있는 이웃을 위해 쓴 몇 냥 등을 일일이 적었는데,모두 합치니 그가 유용한 공금 2천여냥 그대로였다. 

날이 밝아 형을 집행할 시간이 다가오고 '오늘 장복선이 처형된다'는 소문을 들은 평양 사람들이 몰려나와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기생 100여명은 머리 모양과 옷매무새를 한가지로 하고 감영의 뜰 아래 줄지어 모여 절을 하면서 구명의 노래를 합창하였다. 

'비나이다 비나이다/장복선이 살려줍사 천번만번 비나이다/미동대감 채판서님 장복선을 살리소서/장복선을 살리시면 정승자리 오르시리/정승을 못하셔도 전반같은 비단댕기/작은 도령 얻으시와 슬하에 두시리다/비나이다 비나이다/장복선이 용서하사 명대로 살게하소' 

노래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행렬 중의 한 군교(軍校)가 상자를 땅에다 내려놓으며 장복선의 구명을 위해 은을 추렴하자고 제의하였다.구경꾼들은 은장도 은비녀 은가락지 은노리개 등을 다투어 내놓으니 금방 서너 상자에 이르렀다.그 무게를 달아보니 1천500여냥이 되었다.채판서는 백성의 빗발같은 여론에 감동한데다 장복선의 인간성을 갸륵히 여겨 그를 석방하도록 조치하고 스스로도 은 500냥을 마련하여 도와주니 모자라던 장부도 깨끗이 정리되었다. 

협객 장복선과 명재상 채제공이 두루 추앙받고 있는 작품의 문맥을 통해 우리는 장복선의 구명운동에 나선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자리에 모인 모든 구경꾼들이 다함께 어우러져 덩실거리는 축제의 풀이마당을 연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사리사욕이나 당리당략을 멀리하고 서민들의 아픔을 우선으로 하며,백성의 눈을 두려워 하고,민심의 향배를 올바로 읽을 줄 아는 법 집행의 윤리가 절실히 요망되는 이 세태에서 '장복선전'은 우리 모두 음미해볼 만한 이야기라 하겠다. [이헌홍.부산대 교수]

[출처]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001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