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인물, 단체

임진왜란 관련 3국 주요 인물[조선, 일본, 명]

Bawoo 2019. 1. 23. 22:56


[우리나라- 조선]


  • 고경명
  • 고언백(제흥군(濟興君), 高彦伯) ?∼1608(광해군 즉위). 조선 중기의 무신. | 박진(朴晋)·황진(黃進)·원호(元豪)와 함께 임진왜란 4대 명장(名將)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교동의 향리로서 무과에 급제하였고, 군관(軍官)·변장(邊將)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원군수(寧遠郡守)로서 대동강 등지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가 패배하고
    계속 분전하여 그 해 9월 왜병을 산간으로 유인, 지형을 이용하여 62명의 목을 베었다. 그 이듬해 양주에서 왜병 42명을 참살, 그 공으로 왕은 특별히 당상관으로 올리고 양주목사로 삼아 능침(陵寢)을 보호하도록 하였다.양주에서는 장사를 모집하여 산속 험준한 곳에 진을 치고 복병하였다가 왜병을 공격하여 전과를 크게 올렸다. 태릉이 한때 왜군의 침범을 받았으나 고언백의 수비로 여러 능이 잘 보호될 수 있었다. 이에 왕이 공을 칭찬하고 관급을 더 올려 경기도방어사에 영전시키고 이를 표창하였다. 또, 내원한 명나라 군사를 도와 서울 탈환에 공을 세우고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승진하였으며, 정유재란 때는 경기도방어사가 되어 전공을 크게 세웠고, 난이 수습된 뒤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고 제흥군(濟興君)에 봉하여졌다.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올라 임해군(臨海君)을 제거할 때, 임해군의 심복이라 하여 살해되었다.


    곽재우
  • 국경인: 임해군, 신성군을 일본군에게 넘긴 반역자.
  • 권율
  • 권응수
  • 권준
  • 김덕령
  • 김돌손
  • 김면
  • 김명원
  • 김성일:일본에 통신사로 갔다와서 침략이 없을 것으로 주장. 난중에는 왜적을 막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병사.
  • 김시민
  • 김억추: 비겁한 장수의 전형인 인물. 그래도 이각, 배설처럼 사형-참-당하지 않고 전란후에도 승승장구하고 천수를 누렸다.
  • 김여물: 탄금대 전투에서 패한 뒤 신립과 함께 자결
  • 김완
  • 김완(동명이인)
  • 김충선
  • 나대용
  • 박광옥(경원(景瑗), 회재(懷齋))

    1526(중종 21)∼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 개설 본관은 음성(陰城).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 할아버지는 박자회(朴子回)이고, 아버지는 사예 박곤(朴鯤)이며, 어머니는 찰방 윤인손(尹仁孫)의 딸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신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으면서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고향의 의병도청(義兵都廳)에서 군대의 장비와 양식을 조달하였다.

    당시 전라감사 이광(李洸)의 무능을 탄핵했으며, 새로 감사에 부임한 권율(權慄)을 도와 많은 공을 세웠다. 의병 활동의 공로로 다시 관직에 올라 나주목사로 재임하다가 죽었다.

    1602년(선조 35)나주벽진촌(碧津村)에 세워진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으며, 뒤에 벽진서원으로 고쳐졌다. 운봉(雲峰)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저술의 일부가 『회재유집(懷齋遺集)』에 전한다.


  • 박진
  • 박홍
  • 배설(조선)
  • 백광언(白光彦, ?~1592년)자는 명선(明善). 호는 풍암(楓巖)이다. 시호는 충민(忠愍). 본관태인이다. 김해부사를 지낸 사림(士霖)의 형이다. 1574년(선조 7) 무과에 급제해 복병장(伏兵將), 욋괴(外叱怪) 권관(權管), 진해. 고성 현감, 북청. 함흥부 판관을 거쳐 함안, 곽산군수와 절충장군 만포진병마첨절제사 부사를 지내고 고향에 머물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방어사 곽영의 조방장으로 5만 명의 남도근왕군(南道勤王軍)을 이끌고 북상하던 이광과 합류하여 용인 전투에 참전했다. 그러나 일본군을 맞아 싸우던 중 형세를 잘못 판단하여 선봉장 이지시(李之詩)와 함께 적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 백사림(白士霖)무장 백광언(白光彦)의 동생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장수로 발탁되어 김해부사를 지냈다.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黃石山城)이 적의 기습을 받아 어려움에 처하자 밤중에 성을 버리고 홀로 도주하여 남은 성민들이 모조리 도륙을 당하였다. 1599년 고향으로 퇴거하였다.(김성한의 7년전쟁에서는 도망치다가 왜군에게 죽는 걸로 나온다)
  • 변응성 (기중(機仲), 양혜(襄惠))1552(명종 7)~1616(광해군 8). 조선 중기의 무신. | 개설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기중(機仲). 아버지는 공조판서 겸 도총관 변협(邊恊)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였고,강계부사를 역임한 끝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물러가 있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다.그러나 일본군이 먼저 경주를 점령하여 부임하지 못하고, 이듬해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경기방어사가 되었다. 이천부사(利川府使)가 되어서는 여주목사 원호(元豪)와 협력하여 남한강에서 적을 무찔렀다. 1594년 광주·이천·양주의 산간에 출몰하는 토적(土賊)을 토벌하였으며, 한강 상류 용진(龍津)에 승군을 동원하여 목책(木柵)을 구축하여 병졸을 훈련하였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용진과 여주 파사성(婆娑城)을 수비하였다. 광해군 때에 훈련대장과 판윤에까지 승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박응서(朴應犀)의 옥사에 연루되었으나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양혜(襄惠)이다.




  • 사명당


  • 서산대사


  • 송상현


  • 송희립


  • 신각


  • 신립


  • 신할(申硈): 본관은 평산(平山).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의 19세손으로 영의정에 증직된 신화국(申華國)과 첨정 벼슬을 지낸 윤양정(尹讓貞)의 딸 파평윤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또한 충주전투로 유명한 충장공(忠莊公) 신립(申砬)[1546~1592]이 셋째 형이며, 둘째 형 신급은 피난 중 왜군을 만난 어머니가 벼랑에서 투신하자 그 뒤를 따라 뛰어내려 모친을 구하고 죽음으로써 후에 효로써 정려를 받기도 하였다.


  • 신호(조선)


  • 안위


  • 양대박(梁大撲) (사진(士眞), 송암(松巖), 죽암(竹巖), 하곡(荷谷), 청계도인(靑溪道人))

    1543(중종 38)∼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의병장. |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사진(士眞), 호는 송암(松巖)·죽암(竹巖)·하곡(荷谷)·청계도인(靑溪道人).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학관(學官)으로서 아들 양경우(梁敬遇)와 가동(家僮) 50명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같은 해 6월 고경명(高敬命)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고경명을 맹주로 추대하고 유학(幼學) 유팽로(柳彭老)와 함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였다. 같은 달 7일 군대를 정비하고, 이튿날 출정에 나서자 전주로 가서 의병 2,000명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 때의 과로로 발병하여 진산(珍山)의 진중에서 죽었다. 1786년(정조 10) 10월 전라도 진사 이진희(李鎭熙) 등의 상언(上言)에 의하여 병조참의로 추증되었으며, 1796년 9월 보국숭록대부 판중추부사 겸 병조판서(輔國崇祿大夫判中樞府事兼兵曹判書)로 개증(改贈)되었다. 저서로는 『청계집(靑溪集)』이 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 어영담


  • 우치적


  • 류팽로(柳彭老, 1554년 ~ 1592년)는 조선 중기의 의병장으로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당시 고경명의 휘하 장수로 활약했다.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형숙(亨叔)·군수(君壽), 호는 월파(月坡). 개국공신 류만수(柳曼殊)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류경안(柳景顔)이다. 1579년 사미시에 합격하고 158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으나 출사를 단념하고 옥과에 거주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4월 20일 양대박, 안영 등 읍민 주민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 휘하의 장수가 되어 제1차 금산 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사후 사간에 추증되고 정문이 세워졌으며 광주(현 광주광역시)의 포충사금산종용당에도 제향되었다.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켰기 때문에 고경명, 양대박과 함께 삼창의라 칭해지기도 한다.




  • 원균



  • 원연



  • 원호(무관)



  • 유극량



  • 윤두수



  • 윤선각 (尹先覺 ,1543년 ~ 1611년)본관은 파평. 자는 수부·국형, 호는 은성·달천. 아버지는 현령 희렴이다.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예조좌랑·정언·응교·부제학·좌승지 등을 역임했다. 1592년(선조 25) 충청도관찰사로 순찰사를 겸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용인전투(1592. 5. 28~6. 6)에 참가했다가 패하고 파직당했다. 1594년 충청도순변사로 다시 기용되어 병조판서·대사헌·비변사당상을 지냈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는 공조판서를 지냈다.[책 '임진왜란사 연구-151쪽-에는 조헌의 의병운동과 2차 금산전투에 대하여 협조는 안 하고 있다가 '문소만록'에다가 부정적으로 썼다고 한다.]

     





  • 윤흥신



  • 이각:싸움을 피해 도망만 다니다가 임진강에서 도원수 김명원을 만나 참수당한 비겁한 인물의 전형




  • 이광 (사무(士武), 우계산인(雨溪散人))1541(중종 36)∼1607(선조 40).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감사로서 충청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 경상도관찰사 김수(金晬)와 함께 관군을 이끌고 북상해 서울을 수복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5월에 최원(崔遠)에게 전라도를 지키게 하고, 스스로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나주목사 이경복(李慶福)을 중위장으로 삼고, 조방장(助防將) 이지시(李之詩)를 선봉으로 해 임천(林川)을 거쳐 전진하였다.

    그러나 도중 용인의 왜적을 공격하다가 적의 기습을 받아 실패하자 다시 전라도로 돌아왔다. 그 뒤 왜적이 전주·금산 지역을 침입하자,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을 도절제사로 삼아 웅치(熊峙)에서 적을 크게 무찌르고, 전주에 육박한 왜적을 그 고을 선비 이정란(李廷鸞)과 함께 격퇴시켰다.같은 해 가을 용인 패전의 책임자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백의종군한 뒤, 의금부에 감금되어 벽동군으로 유배되었다가 1594년(선조 27) 고향으로 돌아왔다. 저서로는 『우계집』이 있다.






  • 이광악:김시민을 대신해 군사들을 지휘하여 진주 대첩을 승리로 이끈 장수



  • 이복남(李福男, 1555년 6월 28일 ~ 1597년 8월 16일)은 조선시대 중기의 무신, 군인이며, 본관은 우계(羽溪)로 자(字)는 수보(綏甫),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무과 급제후 선전관에 초임된 뒤 절충장군 전라도병마절도사(折衝將軍 全羅道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1588년(선조 21년) 무과 식년시(武科 式年試)에 병과로 급제, 선전관을 거쳐 1592년(선조 25) 나주 판관(羅州判官)이 되고, 그해 7월 나주판관 재직 중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참전하여 웅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전라조방장, 전라방어사(全羅防禦使)를 거쳐 충청조방장(忠淸助防將)이 되었다가 병으로 체직되었으나 복직, 1594년 남원 부사(南原府使)·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듬해 나주 목사(羅州牧使) 등을 역임했다. 다시 전라도병마절도사로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 해안가로 올라오는 일본군을 막으러 순천으로 내려갔다가 남원성이 포위되자 말머리를 돌려, 그해 8월 7백의 군사를 이끌고 남원성에 들어갔다. 남원성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의 5만 군사를 대적하다가 패하고,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 산성별장(山城別將) 신호(申浩)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 사후 바로 (贈) 자헌대부 병조판서지의금부사증직(贈職)되고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녹훈되었으며, 뒤에 다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추증(追贈)되었다. 1612년(광해군 4년) 남원 칠충신사에 제향(祭享)하고 칠충신사는 후에 광해군 때에 충렬(忠烈祠)의 사액이 내려졌다. 1711년(숙종 37년) 숙종 때 충장(忠壯)의 시호를 받았다.[1] 그의 동생 이덕남은 임진왜란 초기 김화현감으로 전사했고, 동생 이인남남도우후로, 숙부 이경헌, 이승헌은 신립 장군의 부관으로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강원도 출신. [위키백과 발췌]








  • 이순신(무의공)



  • 이시언(李時言(? ~ 1624년)조선 중기의 무신. 1589년이산해의 천거로 오위(五衛) 사용(司勇) 에 등용되었으며 이후 사과에 오르고 1592년에 상호군으로 승진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황해좌방어사, 충청도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경주성 전투에서 활약함으로서 가선대부로 올라갔다. 1594년에는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596년에는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였다.
    명군의 도산전투를 지켜보면서, 몽골용병 달자에게 머리가 깨져 도망가는 왜군을 보고 '일본군이 마치 조선군이 도망가듯이 도망가는구나'(麻貴所率㺚子二百餘名,皆持環鞭,亂打如雨疾雷,不及掩耳,銃筒亦不暇放.賊兵之走,亦如我國人之走)' 하고 자조적으로 평가한적도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이순신의 후임으로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 이어서 경상우수사와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605년에는 함경도순변사, 1610년에는 공조판서에 올랐다. 1618년에 전흥부원군에 봉해졌고 훈련대대장도 지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1624년에 이괄의 난에 협조할 우려가 있다는 누명이 씌워져 처형되었다.




  • 이억기



  • 이영남



  • 이운룡



  • 이일



  • 이정암



  • 이지시(李之詩, ? ~ 1592년)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단양, 자는 영이, 호는 송암.

    1567년 무과에 장원 급제해 훈련원정에 임명되었고 1583년 이성현감으로 북방 여진족의 침략을 격퇴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주목사 이경록의 조방장으로 경상도에 나가 여러 번 공을 세웠다. 그러나 구로다 나가마사에 의해 청주가 함락당하고 용인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나갔으나 적의 형세를 알아보지 못해 백광언, 동생 이지례와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 장윤:張潤 (1552년 음력 1월 9일 ~ 1593년 양력 6월 29일)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목천, 자는 명보(明甫)이다.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활동하였으며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 안에서 싸우다가 왜군의 총탄에 맞아서 죽는다.




  • 정걸(丁傑, 1514년 ~ 1597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수군절도사 선배로서 나이도 31살이나 연상인 고령임에도 많은 활약을 했다. 자는 영중(英中), 호는 송정(松亭)이다. 본관은 영광. 1514년 전라도 흥양현(지금의 전라남도 고...




























  • 최진립:주 최씨의 시조로 임진왜란, 병자호란에 참전. 정유재란 때 결사대 100명과 함께 큰 공을 세웠다. 1636년 병자호란 발발 후 69세의 노구를 끌고 청군과 싸우다 용인 험천 전투에서 순절.




  • 최호:1536년 (중종 31년)~1597년 (선조 30년) 8월 27일.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무관.




  • 허욱(許頊):조선 중기의 문신. | 본관은 양천. 자는 공신, 호는 부훤. 할아버지는 대사헌 항이며, 아버지는 응이다. 1572년(선조 5) 춘당대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591년 공주목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강 유역을 굳게 지키고 영규·...





  • 한현 (韓絢)?∼1596(선조 29). 조선 중기의 반란 가담자. | 생애 및 활동사항 서얼 출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맹위를 떨쳤다. 1594년에는 겸사복(兼司僕)으로서 적군이 퇴각한 충청도에 의병들이 갖추어놓았던 군기들을 수습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명나라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의하여 속오법(束伍法)이 시행되면서 속오군을 창설하였는데, 이에 응모하여 선봉장이 되어 이시발(李時發) 휘하에서 호서지방의 속오군을 훈련시켰다.

    이때에 충청도 홍산의 서얼출신으로 무량사(無量寺)에 거처하던 이몽학(李夢鶴)과 결탁하여 난을 도모하였는데, 마침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홍주로 가면서 이몽학에게 먼저 거병하면 뒤에 합세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몽학은 무량사 승려들과 더불어 난을 주도하여 홍산·임천·청양·정산 등 6개의 고을을 점령하고, 그가 있는 홍주로 갔다. 이때 홍주목사가 민병을 수습하고, 남포현감·수사(水使) 등이 수영병(水營兵)을 이끌고 홍주에 들어가자 이몽학은 홍주를 공략하지 못하였다.이러한 기미를 알아챈 그는 면천으로 도망하였으나 면천군수 이원(李援)에게 잡혀 이몽학과 함께 참수형을 당하였다.



    황진











[중국 -명나라]

  • 두사충
  • 마귀
  • 사용재
  • 석성(石星, 생년 미상 ~ 만력 27년(1599년): 1559년 진사(進士)가 되고, 이과급사중(吏科給事中)에 발탁되었다. 만력(萬曆) 초에 재기하여 예부시랑, 병부상서(兵部尙書) 등을 지냈다. 예부시랑 당시에는 자신의 부인 류씨를 구해준 역관 홍순언과의 인연으로 조선의 종계변무도 해결해 주었으며 조선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후 홍순언이 구원병을 청하여 석성은 만력제에게 조선으로의 출병을 청하였다.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달래는 것으로서 일본국왕에 봉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하였으나 실패한 뒤 삭탈관직 및 하옥되어 1599년 옥사하였다. 석성이 죽은 뒤 그의 자식인 , 석재금은 해주 석씨, 성주 석씨, 조주 석씨의 시조가 되었다.
  • 선거이

    심유경 :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조선·일본·명 3국 사이에 강화회담을 맡아 진행하면서 농간을 부림으로써 결국 정유재란을 초래했다.
  • 양호
  • 유정
  • 유숭
  • 이령:1598년 4월 8일에 이광악과 함께 무주성을 침입한 왜군을 격파했지만 4월 20일에 함양에서
  • 정기룡과 함께 함양 사근역에 침입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
  • 이여송
  • 조승훈:명나라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에 먼저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참패한 장수
  • 진구경
  • 진린
  • 천만리1543년 ~ ?)는명나라의 수위사 겸 총독장으로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전공을 세우고 귀화하여 한국 영양 천씨의 중시조가 된 장군이다. 자는 원지(遠之), 호는 사암(思庵),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묘는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방촌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