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 1883년 8월 23일 ~ 1953년 9월 2일 (70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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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미국 워싱턴주 포트 왈라왈라 |
사망지 | 미국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
별명 | 스키니 짐 |
부모 | 로버트 파월 페이지 웨인라이트(아버지) |
친척 | 조너선 웨인라이트 주니어(삼촌) |
복무 기간 | 1906년 ~ 1947년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대장 |
근무 | 미국 육군 |
지휘 | 제1기병여단 (1938–40) 필리핀 사단(1940–42) 전쟁포로(1942–45) 제2복무사령부(1945–46) 동부 방어 사령부(1945–46) 제4군(1946–47) |
주요 참전 | 모로 반란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서훈 내역 | 명예 훈장 수훈 십자 훈장 수훈장 |
조너선 메이휴 웨인라이트 4세(Jonathan Mayhew Wainwright IV, 1883년 8월 23일 -1953년 9월 2일)는 미국의 군인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1942년 5월 6일 필리핀 전선 코레히도르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일본 제국 육군에 항복을 하여 포로가 되었다. 이후 명예 훈장을 받았고, 최종 계급은 대장이다.
생애
1883년, 워싱턴주 웰라웰라의 육군 주둔지 포트 웰라웰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로버트 파월 페이지 웨인라이트는 기병대 장교로 스페인-미국 전쟁 등에 참전하여, 1902년에 필리핀에서 전사했다.
1906년 고교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에 가서 아버지와 같은 기병 장교의 길을 선택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8년 2월부터 프랑스 전선에 파견되어 제82보병사단 참모장보 등을 역임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20년까지 점령군의 일원으로 독일에 주둔했다.
1942년, 필리핀 전투에서 미국 극동 육군으로 발령 받았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보좌하며 바탄 반도와 코레히도르 요새에 주둔하며 지휘를 했다.
같은 해 3월,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을 탈출하고 미-필리핀 연합군을 지휘했다. 5월 코레히도르 요새가 함락되고 일본군에 항복하면서 전쟁포로의 신분으로 만주로 이송되었다. 1945년 9월 항복 조인식에 참석했다. 1945년 9월 5일 일본의 항복을 받은 직후 그는 대장으로 승진했다. 1946년 1월 웨인라이트는 텍사스주 포트 샘 휴스턴의 제4군 지휘관으로 부임한다. 웨인라이트는 1947년 8월 퇴역했다.
1953년 9월 2일 사망하였다. 웨인라이트는 알링턴 국립 묘지의 제1구역에 매장되었다. 그는 기념 극장에서 장례식이 열린 몇 안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알래스카의 포트 웨인라이트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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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출생~전간기
1906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수석졸업하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기병 병과를 선택, 1908년부터 1910년까지 필리핀에서 복무하며 필리핀 남부의 이슬람 세력들을 토벌하며 군공을 쌓았다. 이때부터 괜찮은 평가를 받기 시작하여 1916년 대위로 진급했고 1917년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유럽원정군에 속하여 사단 참모로 종군했고 전후인 1920년에 귀국했다.
1920년 소령으로 진급했고[1] 이후 기병학교 교관이나 기병부대 장교로 커리어를 쌓다가 1934년 기병학교교장, 1936년 기병연대장을 맡고 1938년에 준장으로 진급한 뒤 1940년 기병여단장까지 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아직 미국이 참전하지 않은 시점에서 이미 웨인라이트는 중요한 인재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운명의 필리핀에 부임하고 더글러스 맥아더는 그를 필리핀에서 가장 중요한 제12보병사단장(필리핀인 사단)[2]에 임명했다. 1941년, 극동군사령부가 신설되고 맥아더가 미 육군의 극동군 사령관[3]이 되면서 웨인라이트는 그의 휘하의 지역사령관이며 당시 기준으로 주둔군중 정예부대가 많이 편제된 루손 섬 북부를 담당하는 북부 루손군 사령관직[4]에 올랐다. 가장 중요한 위치였고, 맥아더도 웨인라이트를 그만큼 신뢰했다는 의미였다.
3. 태평양 전쟁기
이후 맥아더의 지휘하에 웨인라이트는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 홈마 중장의 일본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하여 맥아더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고 2월 7일 수훈십자훈장을 수여받는다. 하지만 일본군은 병력을 증강시켜 다시 바탄 반도로 향했고, 필리핀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워싱턴의 전쟁지도부는 맥아더에게 오스트레일리아로 탈출 명령을 내린다.
맥아더 철수 직후 웨인라이트는 제2대 극동군 사령관이 되었고[5]잔존병력을 재편하며 바탄의 방어전을 지휘했다.[6] 그러나 물자의 부족과 일본군의 증강 끝에 바탄 반도가 무너진다.(4월 9일) 일본군도 바탄 반도 공략 과정에서 약 2만여 명의 사상자를 낼 정도로 바탄 반도 전투는 남방작전 기간 중 가장 격렬한 전투였다.
그러나 이 지경이 되었음에도 웨인라이트는 항복을 거부, 잔여병력과 함께 코레히도르 섬에 웅거하며 일본군이 뒷목잡게 만들었다. 웨인라이트는 항복만 거부한 것이 아니라 워싱턴에서 내려온 탈출명령[7]도 거부하였다. 맥아더에 이어 자신까지 철수하면 극동군은 물론 필리핀에도 안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이유였다. 웨인라이트는 그렇게 마지막 그 날까지 휘하 병사들을 독려하며 일본군에게 최대한의 출혈을 강요했고 끝내 일본군이 격전 끝에 코레히도르 섬에 상륙, 해안방어선을 돌파한 직후인 5월 7일에서야 항복한다.
웨인라이트의 분전은 개전 초기 전황에 여러 영향을 끼쳤는데, 일단 안 그래도 부족한 일본군 육군 병력 상당수를 필리핀에 붙잡아놓고 또 희생시켰다.[8] 일본군은 바탄 반도, 그리고 코레히도르 섬을 공략하기 위해 개전 이후 사실상 5개월여를 필리핀에 붙잡혀 있었고 그러는 동안 맥아더는 오스트레일리아, 뉴기니에서 전선을 정비할 수 있었다.이는 형편없는 졸전 끝에 항복한 싱가포르의 영국군 지휘관 아서 퍼시발이나, 일본군이 섬에 상륙하자마자 항복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각 총독들과도 확연히 비교되는 것이었다. 남방작전 기간 제일 먼저 공격받고 제일 마지막에 항복한 곳이 필리핀이었다.[9]
그러나 이 분전을 뒤로, 웨인라이트는 일본군으로부터 온갖 모욕을 당했다. 필리핀에서 항전 중인 아군에 대한 항복요구 방송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바로 그 바탄 죽음의 행진에 극동군 사령관인 웨인라이트도 예외없이 참가해야 했다. 보통 고위급 포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가 있기 마련인데 그런 것조차 없었다.
이후 웨인라이트는 장성급 포로라는 이유로 대만을 거쳐 만주로 이송되었고[10] 다른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구타와 모욕을 당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 선전잡지에 사진이 찍혀 나가는 굴욕도 당하고, 부족한 식량과 구타 등으로 인해 체중이 크게 빠지고 잔병도 생기는 등 엄청 고생을 했다. 장성급 포로가 영양실조에 걸렸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러면서도 웨인라이트는 설사 전쟁이 끝나더라도 국민들은 끝까지 싸우지 않고 항복한 자신을 비겁자, 겁쟁이라고 욕할 것이라는 사실을 더 두려워했다.
웨인라이트를 포옹해주는 맥아더 |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직후 만주는 소련군에게 해방되었다. 웨인라이트도 이 과정에서 석방되었고, 직후 도쿄로 옮겨졌고, 맥아더가 거처중인 호텔로 안내받았다.
그러나 웨인라이트는 항장인 자신이 무슨 염치로 옛 상관을 만나겠냐며 호텔 현관에서 머뭇거렸다. 이에 맥아더가 직접 현관으로 달려나가 포옹하며 웨인라이트를 격하게 환영했다.
이후 맥아더에 의해 9월 2일 미주리 함상에서의 항복문서 조인식에 초대받았고, 항복문서 서명에 사용된 만년필 중 하나[12]를 기념품으로 선물받았다. 9월 5일, 대장으로 진급하며 사성장군이 되었고 그 직후 귀국하여 9월 13일에는 뉴욕에서 개선 기념 퍼레이드까지 열렸다. 상술했듯 웨인라이트는 조국이 자신을 겁쟁이, 비겁자로 여기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으나 조국은 그를 열악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선전한 전쟁영웅으로 대우해주었다.[13] 같은 달 19일에는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으로부터 바탄과 코레히도르의 용전을 치하받으며 군인에게 최고의 영예라는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웨인라이트는 약간의 요양기간을 보낸 후 1946년 미 본토의 제4군 사령관을 맡았다. 4군은 미 본토 해안방어를 전담하며 전선에 보낼 병력들의 훈련, 재편을 맡는 부대로 전시에도 한직이었고, 평시에는 더더욱 그랬다. 장기간의 포로생활로 건강이 악화된 전쟁영웅에게 마지막으로 군 사령관이라는 커리어를 주려는 예우차원의 직책이었다. 웨인라이트는 이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다가 1947년 8월 31일자로 퇴역했다.
이후 1953년 9월, 샌안토니오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고,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4. 평가
표현은 이렇게 했지만 이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웨인라이트는 물자, 병력, 화력 모든 것이 열세인 상황, 심지어 워싱턴의 전쟁지도부조차 필리핀을 포기하고 본인에게 철수를 지시하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최대한의 지연전을 펼쳤다. 맥아더 철수일을 기준으로도 웨인라이트는 무려 2달을 더 버텼고, 바탄 반도가 무너진 이후에도 그 작은 섬에서 1달을 저항하여 일본군의 필리핀 완전 점령을 최대한 지연시켰다.
아울러 인격적으로도 대인배여서, 코레히도르에서 항전할 때도 무조건 싸우라고 명령하기보단 오늘 하루만 더 버텨보자는 식으로 부하들을 설득시켰기에 존경받았고, 훗날 맥아더가 자신의 명예훈장 수여에 반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섭섭해 했을 뿐 화를 내진 않았으며 여전히 맥아더를 신뢰했고 맥아더의 대통령 후보 출마를 지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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