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제주도와 강한 그녀, 제주 여자
돌 많고 바람 많고 女子 많은 제주도
조선왕조 내내 가혹한 '전복' 진상
육지로 탈출하는 남자들 급증, 여자의 섬으로 변해
1629년 인조 '출륙 금지령' 내려… 수탈로 인해 생겨난 '여자의 섬'
고단하고 강인한 제주 여자의 삶, '설문대할망' 신화에 그대로 투영
송시열, 김정희 그리고 제주
뭍사람에게 제주는 아름답다. 옛날도 그랬다. 육지에서 유배당한 지식인, 권력자 눈에도 그랬다. 1689년 음력 3월 3일 조선 후기 권력자 송시열은 제주 유배 나흘 만에 이렇게 쓴다. '한라산에 눈이 쌓였고 산 아래는 꽃들이 화려하게 피었다. 나 같은 죄인을 이런 곳에서 쉬도록 해 주시니 감사함 한이 없다(漢挐之山積雪甚厚而山下則花事爛熳使此纍臣假息於此間感戴釐祝)'(송자대전, '권치도에 보내는 편지')
151년 뒤 제주도로 유배 온 추사 김정희도 그랬다. 그는 대놓고 '천하의 큰 구경거리(天下大觀)'라고 했다. 산야(山野)와 밭에 흰 눈이 광대하게 쌓여 있는 듯(漫漫如白雲), 온천지에 새하얀 수선화가 가득 핀 것이다. '눈을 뜨면 눈에 가득 들어오니, 어떻게 해야 눈을 차단하여 보이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開眼則便滿眼而來何以遮眼截住耶)?'(완당선생전집, '권이제에 보내는 편지')
그런데 두 사람 편지 앞뒤를 읽어보면 제주도는, '살 만한 곳은 못 되고(非人所居, 송시열)' '이를 귀히 여기지 않고 우마에게 먹이는 사람들(土人則不知貴焉牛馬食齕, 김정희)'이 사는 곳이다. 외지인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나, 오래 머물 수는 없는 곳이 바로 제주다. 심지어 송시열은 '천외(天外)', 하늘 바깥이라고 했다.
돌 바람 여자, 三多島
그럴 만도 했다. 화산섬인지라 온통 구멍 뚫린 검은 돌밭이었다. 뭐라도 심으려면 그 돌을 다 걷어내야 했다. 하늘도 사방이 뚫려 바람은 좀 많은가. 청명한 하늘을 구경할 짬도 없었고, 수선화를 완상할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먹고 살아야 했다. 척박하기 그지없기에 원악도(遠惡島), '멀고 악한 섬'이라 하여 조선 정부는 중죄인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곤 했다. 수선화를 호미로 걷어내 우마를 먹이고, 돌밭을 일궈 김매고 씨 뿌리는 일은 주로 여자들이 했다. 여자가 많아서? 아니다. 더 정확한 답은 남자가 없어서다. 문제는, 몸에도 좋고 맛도 좋다는 '전복(全鰒)'이었다.
전복 공물과 인구 급감
조선 시대 지방에서 중앙정부에 바치는 세금에 공물(貢物)이 있었다. 왕실에서 필요한 현물을 그 지역 특산물로 조달받는 제도였다. 산에서는 짐승 가죽, 바다에서는 해산물(山郡貢皮物海郡貢魚物)을 받았다.(예종실록 1469년 6월 29일) 고려 시대 이래 제주 공물은 좋은 말(良馬)이었다. 불행했다. 제주도에는 바다까지 있었으니까.
조선 후기까지 제주 사람들은 해산물, 그 가운데 전복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었다. 전복이 국가 재정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 턱이 없으나, 왕실에 전복은 제주도의 존재 이유 그 자체였다.
1505년 음력 7월 24일 연산군이 동생 이봉의 첩 내은이를 임숭재의 첩으로 주라 명했다. 이봉은 배다른 동생이다. 임숭재는 연산군 입속 혀와 같은 간신이다. 등극 11년째, 연산군이 제대로 폭군 기색을 드러내던 때다. 같은 날 이렇게 하교했다.
"왜전복(倭全鰒)이 있다 하니 사서 바치도록 하라. 이 물건뿐 아니라 모든 특이하게 맛난 것은 널리 구해서 바치라."(연산군일기 1505년 7월 24일) 미친 군주가 전복에도 미친 것이다.
전복을 잡는 사람을 포작(鮑作)이라고 한다. 원래 포작은 남자 일이었다. 제주 여자는 남편과 함께 바다에 들어가 미역을 걷었다. 그런데 도가 지나쳤다.
'지아비는 포작에 선원 노릇을 겸하는 등 힘든 일이 허다하며, 지어미는 일 년 내내 진상할 미역과 전복을 마련해 바쳐야 하니 그 고역이 말치기(牧子)보다 10배나 된다.'(제주목사 이형상의 장계(狀啓), 1702년)
그뿐 아니었다. '추복(槌鰒) 3900여 첩, 조복(條鰒) 260여 첩, 인복(引鰒) 1100여 첩 등 도합 9100여 첩과 오징어 860여 첩 및 분곽(粉藿), 조곽(早藿), 곽이(藿耳).' '복(鰒)'은 모두 전복이다. 한 해에 80명 갓 넘는 어민이 진상해야 하는 해산물량이 1만 마리에 달했다.
목사 이형상의 보고서가 이어진다. '포민(浦民)이 죽기를 무릅쓰고 도망하려 함은 당연한 이치다. 대대로 살아온 뿌리가 박혀 꼼짝할 수 없는 자를 제외하고는 대개가 흩어져 달아났다.' 달아날 수 있는 자는 모두 달아났다는 뜻이다. 사방이 바다로 막힌 섬이다. 남자들은 공물과 군역을 피해 육지로 달아났다. 어느덧 섬에는 여자들만 남게 되었다. 바람 많고 돌 많은 섬 제주에 여자가 많게 된 근본 이유다. 바로, 전복이다.
출륙금지령과 여자
문제는 가혹한 수탈이었다. 하지만 중앙에서 보는 눈은 엉뚱했다. 전복을 비롯해 공물이 줄어들자, 왕실에서는 아예 제주에 육지 통행을 금지시켜버린다. '비국이 도민(島民)의 출입을 엄금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인조실록 1629년 8월 13일) 정묘호란 여파가 가시지 않은 때였지만, 왕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제주민은 백성이 아니라 공물 생산 혹은 채집인이었다. 그들은 자유를 박탈당했다. 남자들은 떠나고, 땅 살림과 바다 살림은 여자가 맡게 되었다.
고단하고 강한 제주 여자
삶은 고단하였다. '(제주는) 가난하여 의지할 바가 없고 역(役)이 다른 곳 배나 되어 부모, 처자를 팔며 자기 자신이 품을 살고 동생을 파는 지경까지 이르렀다.'(숙종실록 1702년 7월 12일)
출륙금지령 73년 뒤 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은 그때 '여자 역할이 매우 무겁다(女役甚重)'라고 했다. '미역, 전복, 물 떠오는 일, 곡식 장만하는 일, 땔감 일 등 무릇 모든 힘든 일은 전부 여자가 한다.'('남환박물(南宦博物)', 1702년) 1710년 제주에 유배 왔던 김춘택(金春澤)에게 한 해녀가 이리 말했다. '함께 작업하던 사람이 급히 죽거나 얼어 죽거나 돌과 벌레 같은 동물 때문에 죽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는 요행히 살아났지만 병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시험 삼아 제 얼굴을 살펴보십시오.'('북헌거사집(北軒居士集)', 1710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제주 여자는 땅에서 일했고 바다에서 일했다. 인구가 급감하고 남자가 사라져버린 섬나라에서, 여자는 스스로 강해야 살 수 있었다. 결국 1800년, 정조는 전복 진상을 전면 금지했다. '전복을 잡지 말도록 한 제주(濟州)의 규례에 의해 다시는 거론하지 말도록 하라.'(정조실록 1800년 4월 7일) 거듭된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전복 진상이 이어지자 내린 조치였다.
거대한 여신, 설문대
그 신산한 제주 여자네 삶이 투영된 신화가 설문대할망이다. 한라산을 베고 누우면 다리 하나는 제주시 앞바다에, 다리 하나는 성산일출봉에 닿는 거대한 여자다. 그녀 몸에 난 털이 풀이 되고 나무가 되었고 그녀가 던진 흙이 오름이 되었고 그녀가 뿌린 오줌이 바다가 되었다. 제주를 창조한 여신(女神)이다.
아들을 오백이나 낳았는데, 아들들이 일하러 간 사이에 가뭄이 들었다. 할망이 백록담에 죽통을 걸고 죽을 쑤다가 그만 빠져 죽고 말았다. 집에 돌아온 아들들이 죽을 맛있게 먹고 통을 비우니, 거기에 죽은 할망이 나왔다. 세상을 창조하고 아들들을 먹여 살리던 여신이 그렇게 헌신(獻身)을 하고 죽었다.
제주 한림에는 금릉석물원이 있다. 석장(石匠) 장공익이 평생 걸려 만든 석물들이 전시돼 있다. 이제는 정과 망치를 놓은 이 명장은 그 석물원에 설문대할망을 만들어놓았다. 그녀가, 축 늘어진 젖무덤 세 개로 오백 아들을 먹여 살리는 그녀가 제주 여자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09/201805090032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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