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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은인자중하여라, 우리는 나라를 등진 사람이니라"

Bawoo 2019. 9. 26. 21:15


항왜(降倭) 김성인과 임진왜란

임진왜란 초기, 明 원군 투입으로 降倭 급증, 조선에 투항한 일본군 실록 기록만 1만 명 넘어
조총, 실전 능력 겸비
'말만 많고 실천 없다' 정부 비판하며 목숨 바친 항왜
조선 정부로부터 성과 이름 받은 항왜도
임란 초기 투항 '沙汝某' 병자호란 때 아들과 참전해 전사
사여모, 김성인 후손… 청도 함박골에 은둔해 살아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서기 1620년 음력 10월 사여모(沙汝某)라는 무장(武將)이 광해군으로부터 교지(敎旨)를 받았다. 임명된 직급과 직책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다. 가선대부는 종2품이고 중추부는 무임소 관료 조직이다. 그 이전 직책은 기록에 없다. 1년 뒤인 1621년 광해군은 사여모의 아들을 조선 중앙군인 5위 부대 중 하나, 호분위 장교인 상호군(上護軍)에 임명했다. 직급은 정3품 당하관 어모장군이다. 또 1년 뒤 6월 아버지 사여모는 정2품 자헌대부로 승진했다. 장관급이다. 같은 날 아들은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으로 승진했다. 훗날 아버지는 병자호란 때 퇴각하는 조선군을 지키다 쌍령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사여모였던 아버지 이름이 장관급 교지를 받을 때는 김성인(金誠仁)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아들 이름은 김귀성(金貴成)이다. 성을 바꿨다? 사연이 길고 깊다.

426년 전 조선에서 벌어진 동아시아 세계대전,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투항한 일본군이 있다. 많은 이가 조선 정부로부터 성과 이름을 받고 정착했다. 이들을 항왜(降倭) 혹은 향화(向化)라 한다. 김성인 부자(父子)가 그, 항왜다. 임진왜란 발발 426년 만에 찾아간, 항왜(抗倭) 이야기.

戰爭, 바닥 없는 지옥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 통일을 완성했다. 2년 뒤 각 번(藩) 군사를 모아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에서 '분로쿠의 역(文祿の役)', 중국에서 '만력조선역(萬曆朝鮮役)'이라 부르는 국제전, 임진왜란(壬辰倭亂)이다. 1592년 4월 13일 시작된 전쟁은 정유재란까지 7년을 끌었다. 예비 병력을 포함해 20만 대군이 조선을 침략했다.

전쟁은 지옥이다. 바닥없는 지옥, 무저갱(無底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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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광역시는 정유재란 최후의 육전(陸戰)이 벌어진 곳이다. 가토 기요마사 군단은 이곳에 왜성을 쌓고 조명연합군과 전투를 치렀다. 항왜(抗倭) 여여문은 이 전투에서 조선을 위해 싸우다 명나라 병사들에게 죽었다. 왜성 흔적 위로 벚꽃이 흩날린다. /박종인 기자

일본 지도층 모두가 동의한 전쟁은 아니었다. 도요토미는 조선 침략 대본영인 나고야 성(城)에 각 영주 식솔을 가둬놓고 전쟁을 독려했다. 군사를 숨겨둔 영주들은 처벌됐다. 부산진에 상륙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진격했다. 조선 국왕 선조는 아들 광해군을 서둘러 왕세자에 책봉하고 정부 지휘를 맡겼다. 나머지 아들 임해군과 순화군을 관북 지역으로 보내 모병(募兵)과 백성 위무를 맡겼다. 자신은 평양을 거쳐 의주로 달아났다. 조선 백성은 원치 않는 전쟁에 징발된 일본군 앞에 내팽개쳤다.

이듬해 1월 명나라 원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총사령관은 성주 이씨 중시조인 고려 문벌 이장경의 후손 이여송이다. 그가 이끄는 조명연합군이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차지한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이순신이 활약한 바다에 이어 육지까지 전세가 역전됐다. 이후 밑도 끝도 없는 전쟁터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왜적이 (이여송) 제독의 군전에 투항해 백 명에 이르는데 제독이 대부분 죽이지 않고 군대를 따라 정벌에 나아가게 했다.'(1593년 '선조실록' 26년 5월 23일) 그러니까, 한꺼번에 백 명에 이르는 일본군이 집단 투항을 했다는 것이다. 명군은 이들을 죽이지 않고 본국으로 끌고 갔다.

희귀하게도, 조선 정부는 명나라 말이면 무조건 동의하던 관례를 깨고 이 조치에 항의했다. 항복을 가장한 첩자들이 명나라로 가는 길에 평안도 정세를 파악해 달아날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선조 26년 5월 22일) 그런데 남쪽 전선(戰線)에서 '항왜는 군사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무신들 보고가 이어졌다. 의주 피란지 책상머리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던 문신들 생각은 바뀌었다. 이듬해 4월 선조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항왜를 죽이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굶주리지 않게 하고 직책도 제수하여 마음을 위로하라.'(1594년 선조 27년 4월 17일)

집단 투항한 사람들, 항왜

항왜 사여모가 광해군으로부터 받은 교지.
항왜 사여모가 광해군으로부터 받은 교지.

위로는 전쟁을 원치 않는 장교들이 있었고 아래로는 강제징용을 당한 병사들이 있었다. 쉽게 이길 듯했던 전쟁이 무기한 늘어지자 이들이 대오에서 이탈해 투항 행렬을 이뤘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들 항왜 숫자는 기록상 1만 명에 이르렀다.(1597년 선조 30년 5월 18일)

전쟁 동안 포로로 끌려갔던 선비 강항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들은 평생 부모 형제를 보지 못하고 태반이 처자가 없다(平生不見父母兄弟 太半無妻子). 또 조선을 토지가 비옥하고 의식이 풍족하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조선은 즐거운 나라이고 일본은 더러운 나라라고 읊는다(朝鮮誠樂國也日本誠陋邦也).'(강항·'간양록'·적중봉소) 돌아가도 살 방도가 없고, 처자식도 없는 자들이었다.

지옥을 탈출하기 위하여, 첨단 무기 조총으로 무장하고 전국 전쟁으로 갈고닦은 실전 병력이 떼로 들어왔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항복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조선 지도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바가 있었다.



항왜, 그들의 처연한 삶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조선 정부는 항왜들을 함경도로 보냈다. 대륙 신흥 세력인 여진족 방어용이었다. 그런데 그 숫자가 많아지고 오지(奧地)에 대한 불만이 터지자 정부는 이들을 한산도로 내려보낸다.(1594년 선조 27년 9월 14일) 바로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있는 조선해군사령부다. 그곳에서 많은 항왜들이 주로 노 젓는 군인으로 근무했다. 그렇듯 전쟁은 대개 무명(無名)이다. 하나 이름을 남긴 항왜 또한 부지기수다.

사백구라는 항왜는 김해부사 백사림을 구해주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 군영에 들어가 식량을 구해 살려주었다. '우리나라 유식한 무리들도 가장이나 처자식을 구제하지 않고 있는데 사람으로서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1597년 선조 30년 9월 8일) 그해 11월 22일 의령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항왜 연시로는 말에서 떨어져 칼을 맞고 죽었고, 사고여무와 요질기, 사야가, 염지가 적의 목을 베었으며 다수 무기와 소 4마리, 말 1필과 포로 100여 명을 빼앗았다.('선조실록')

여여문(呂汝文)이라는 항왜는 이리 말했다. '일본이 다시 출동하면 전라도부터 범할 것이 틀림없다. 성 밑 나무까지 다 베어 목책을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설치하지 않고 있으니 매우 잘못되었다. 우리 조선에 마음을 다하는 자를 가려서 적장을 모살하면 자기가 죽더라도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1597년 선조 30년 1월 4일) 그리고 여여문이 덧붙였다. '우리 조선 사람들은 계획만 세우고 의논은 많으나 실행이 적다. 할 수 있는 일은 급히 실시하여 기회를 잃지 말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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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여모, 김성인의 무덤. 경북 청도 주머니골에 있다.

일본군 작전까지 꿰뚫고 있었으니, 여여문은 고위급 장교였음이 분명했다. '우리' 조선이 입만 살고 움직이지 않음을 한탄하니, 조선 지도층 행태도 제대로 파악했음이 틀림없다.

그 여여문은 1598년 음력 1월 울산왜성 전투 때 가토 기요마사 휘하 병사 넷의 목을 베고 퇴각하던 중 전사했다. 명나라 군사가 죽였다. 오인이었는지, 공이 탐나서인지는 모른다. 석 달 뒤인 4월 10일 기오질기와 사이소가 거창에서 일본군 17명을 투항시켰다. 경상우병사 정기룡이 이 가운데 열한 명의 목을 베어 자기 공으로 돌렸다. 군중(軍中) 모두가 잘못된 일이라 했다.

마침내 선조가 불같이 화를 낸다. "항왜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나만 그렇지 않다고 밝혔으나 군신들 저지에 끝내 시행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보아라. 지금 항왜들이 자기 몸이 다쳐도 돌아보지도 않고 있으니, 항왜만 충성을 제대로 바치고 있다. 과연 너희 관리들 말처럼 적과 내응하고 적을 끌어들였는가. 모두 당상으로 승진시키라."(1597년 선조 30년 8월17일)

자헌대부 항왜 김성인

전쟁이 끝났다. 항왜는 대부분 궁벽한 북쪽 국경 지대로 가서 군인이 되었다. 대개가 글 모르고 가난한 자들이라, 혹자는 그 궁벽함을 견디지 못하고 1624년 함경 북병사 이괄의 난 때 반란군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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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왜성에 떨어진 동백과 벚꽃.

공을 세운 몇몇은 나라에서 본관과 성(姓)과 이름을 받았다. 그중 한 사람이 사여모(沙汝某)다. 사여모는 임진왜란 발발 이튿날 상관인 사야가(沙也可)와 함께 투항했다. 그리고 일본군과 싸웠다. 광해군 때 사여모는 북방 국경 수비를 자원해 나라로부터 김해 김씨 성과 성인(誠仁)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사야가 또한 선조로부터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성명을 받았다. 김성인 행록에 따르면, '김성인과 김충선과 김계충은 이 전쟁이 명분 없음을 일찍 알고 예의의 나라에 투항했다.'('모하당문집'·김성인 행록)

병자호란이 터지고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도주했다. 김성인은 동료 김계수, 아들 김귀성, 상관 김충선과 함께 쌍령에서 청나라 군사를 저지하다 전사했다. 늙은 김충선을 대신해 싸우다 죽었다. 아들 김귀성 또한 북방 경계를 자원해 평생을 살았다. 그리고 경상북도 청도군 함박골에 들어와 살았다.

이후 사여모 김성인 가문은 잊혀 살았다. 김성인 11세손 김병육(66)이 말했다. "귀화했으되 섞여 살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하여 이 첩첩산중에 은인자중하며 숨어살지 않았을까."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이 되고 그 후손들이 모여 본관을 '함박'이라 고치고 지금껏 청도에 산다. 할 아버지들이 받은 교지 석 장, 청도 함박골과 주머니골 조상 묘소를 400년 동안 부둥켜안고 산다. 단순한 종잇조각, 단순한 무덤이 아니다. 뿌리다. 후손 김병육이 말했다. "교지를, 뿌리를 지켜온 선조들이 그저 고맙다"고.

벚꽃 찬란하던 봄날 밤이었다. 주머니골 산중(山中)을 헤맨 끝에 별빛 아래 김성인 부자 묘를 만날 수 있었다. 밤하늘만큼이나, 먹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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