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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선조가 선언했다 "가짜 도굴범을 진범으로 처형하고 국교를 열다

Bawoo 2019. 9. 30. 23:01


왜란 후 국교 정상화와 선정릉 도굴 조작사건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선정릉 도굴되다

임진왜란 개전 다섯 달 뒤 왕세자인 광해군에게 이런 보고가 올라왔다. '정릉(靖陵)이 파헤쳐지는 변괴가 있었다.'(1592년 9월 27일 '선조실록') 정릉(靖陵)은 광해군의 증조부 중종의 릉이다. 그때 광해군은 평남 성천에 있었다. 의주에 있던 선조에게는 사흘 뒤 보고가 들어갔다. 정확한 사태가 파악된 때는 7개월 뒤였다. 선조의 할아버지 중종 분묘가 파헤쳐지고 시신이 불탔으며, 산 너머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가 묻힌 선릉(宣陵)은 시신이 아예 사라졌다는 것이다.

왕릉 파괴 첩보를 처음 접한 사람은 관악산에서 한성 수복 작전에 돌입한 의병장 김천일이었다. 1593년 4월 17일 밤 김천일은 휘하 이준경과 서개똥(徐介同), 왕실 사람 이충윤을 현장으로 보냈다. 서개똥이 정릉 분묘 아래 광중(壙中)에 들어가 보니 관은 다 타버렸고 그 안에 시체가 가로놓여 있는데 머리털과 수염이 전혀 없었다. 주위에는 불탄 흔적, 밥을 해먹은 흔적이 있었다. 옆에 있는 선릉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1593년 8월 24일 '선조실록')

주인 없이 텅 빈 왕릉, 서울 강남 도심에 있는 선정릉(宣靖陵) 이야기다. 왕릉 도굴 사건을 둘러싸고 전쟁 후 한·일 국교 회복 과정에서 벌어진 이야기다(영화 '식스센스'에 버금가는 반전이 있다).

'사수(死守)' 외치며 도주한 선조

1592년 정월부터 이상한 동요가 도성에 퍼졌다. 맨 끝 가사는 '경기감사 우장직령(京畿監司雨裝直領) 큰달마기(大月乙麻其)'였다. 난리가 끝난 뒤 사람들이 이렇게 해석했다. '임금이 4월에 도망갔으니 그 달이 큰 달이며 큰달마기는 4월 그믐이라는 뜻이다. 마침 큰비가 내려 경기감사가 비옷과 직령(외투)을 입고 임금 가마를 뒤따르게 된다는 뜻이다.'(1592년 4월 30일 '선조실록')

4월 29일 선조가 선언했다. "마땅히 도망가지 않고 경들과 더불어 목숨을 바치겠노라(當與卿等 效死勿去)." 다음 날 새벽 어영대장 윤두수가 끄는 가마를 타고 선조가 북쪽으로 달아났다. 폭우가 쏟아졌다. '큰달마기'였다.

6월 2일 평양에서 선조가 백성들에게 말했다. "죽음으로써 지키겠노라(以死守)." 여드레 뒤 중전이 평양성을 빠져나가다가 노비가 군(軍)과 민(民) 몽둥이를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성 안은 창과 칼과 고함 소리가 가득했다. 다음 날 선조는 평양을 떠나 영변으로 향했다(上發平壤 向寧邊).'(6월 11일 '선조실록') 이후 전쟁 과정은 생략한다. 전쟁은 의병과 이순신과 류성룡이 치렀다. 7년 만에 전쟁이 끝났다.

선정릉 도굴 사건 보고서

선정릉 현장 보고는 참담했다. 이미 1592년 12월 강릉(명종릉)과 태릉(문정왕후릉), 헌릉(태종 부부릉)이 일본군에 훼손됐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정도는 심하지 않았다.(1593년 1월 22일 '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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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에 있는 선정릉(宣靖陵)은 조선 성종과 정현왕후, 중종이 묻힌 릉이다. 임진왜란 첫해 선정릉은 일본군에 의해 파괴됐다. 시신도 불타 사라졌다. 종전 후 조선정부는 전쟁 사과국서와 왕릉 파괴범 색출을 국교 정상화 조건으로 내걸었다. 민(民)이 입은 피해 배상은 뒷전이었다. 사진은 중종릉인 정릉. /박종인 기자

선릉에는 재만 남았고 정릉에는 정체불명의 시신이 있었다. 주변에는 밥을 해먹은 흔적, 옷을 태운 흔적이 있었다.(1593년 5월 4일 '선조실록') 선조는 "속히 처리하라"며 울었다. "생전에 중종 얼굴을 본 사람을 찾아 시신을 확인하라"며 얼굴을 가리고 또 울었다. 최초로 현장을 찾았던 이준경 일행은 석 달 뒤 시신이 '가로놓여 있었다(橫置)'고 보고했다.(8월 24일 '선조실록')

6월 28일 영의정 최흥원이 보고했다. 생전 중종을 기억하는 다섯 명이 그림을 그려 확인한 바, 중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척하고 갸름하며 턱 끝이 굽고 콧등은 높고 키는 크되 풍만하지 않았던' 중종과 다르다는 것이다. 여든이 넘은 판돈녕부사 송찬(宋贊)이 말했다. "확인할 길이 없으니 꿈같이 아득할 뿐입니다(恍然夢想而已)." 결국 그해 7월 21일과 8월 15일 시신을 찾지 못한 채 선릉과 정릉이 개장(改葬)됐다. 선조는 명나라 총사령관 송응창에게 '선조(先祖)에 대한 망극한 애통을 호소한다'며 복수를 촉구했다.(1593년 4월 16일 '선조실록')

종전, 그리고 국교 협상

전쟁이 종료되면 당사국끼리 국교 협상을 벌인다. 요체는 전쟁 책임과 피해 배상이다. 조선 정부에게 그 책임은 일본의 사과였고 배상은 선정릉 도굴범 색출이었다. 이게 선조실록에 끊임없이 나오는 '2건(二件)', 바로 일본 국왕 사과 국서와 도굴범 압송이다.(1606년 7월 5일 '선조실록' 등)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가 정권을 잡았다. 도쿠가와 정권은 대마도에 조선과 국교 정상화 협상을 맡겼다. 종전 이듬해인 1599년 7월 14일 대마도주 소요시토시(宗義智)는 명군(明軍) 인질과 피로인(被虜人) 즉 조선인 포로를 송환하며 국교 정상화를 요청했다. 이듬해 2월 57명을 돌려주며 정상화가 안 되면 재침(再侵)하겠다고 위협했다. 1601년 4월 고니시 유키나가가 도쿠가와 이에야쓰에 의해 처형됐다. 소요시토시는 고니시의 사위였다. 목숨이 위태로운 소요시토시는 협상에 목숨을 걸었다.

1605년 5월 1년 전 대마도로 떠났던 사명당 유정이 피로인 3000여명을 데리고 귀국했다.(1605년 4월 1일 '선조수정실록'. '선조실록' 5월 24일에는 1390명으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일본 국왕 명의 사과 문서는 없었다. 도굴범 색출도 없었다. 납치됐던 국민들이 돌아왔지만, 국교 정상화는 불가능했다. 조선 정부는 두 가지 요구 사항을 거듭 요청했다. 이듬해 대마도는 이를 받아들였다.(1606년 7월 4일~6일 '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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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대문에서 서울역쪽 길가에 있는 조선통신사 표석. 1607년 1월 12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조선 회답 겸 쇄환사 일행이 출발한 곳을 표시했다.

넉 달 뒤 11월 대마도 사신이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국서를 가지고 왔다. '누추한 우리나라가 전대(前代)의 잘못을 고치는 것에 대해서 지난해 사명당과 사신 손문욱에게 모두 이야기하였으니 지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1606년 11월 12일 '선조실록') 명의는 일본국(日本國) 원가강(源家康)이었고 일본 국왕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범능지적(犯陵之賊)', 왕릉을 능멸한 범인 2명도 함께였다! 최고 지도자 관심 사항인지라, 경상우수사는 '부산 앞바다에 전선 11척을 띄워 군대의 위엄을 성대하게 베풀었다.'(같은 날 선조실록) 이날 사관(史官)은 "하찮은 죄인 두 명이 올 뿐인데 온 나라가 밥 먹을 틈도 없이 서두른다"고 평했다.

국교 정상화 조건이 충족됐다. 2개월 뒤인 1607년 1월 12일 아침 국서에 대한 회답과 포로 송환을 위한 회답 겸 쇄환사 일행이 서울 남대문을 출발했다. 규모는 정사 여우길(呂祐吉), 부사 경섬(慶暹)을 단장으로 한 507명이었다.(경섬, '해사록(海槎錄)', 1607년) 조선과 일본은 1609년 기유약조를 통해 정식으로 국교를 재수립했다. 이제, 반전이다.

'나는 도굴범이 아니올시다'

왜놈들에게 혹독한 고문이 시작됐다. 서른일곱 먹은 마고사구(麻古沙九)는 "전쟁 동안 서울에는 올라오지도 않았다"고 부인했다. 인두로 지져도 "이럴 줄 알았다면 배를 갈라 죽을지언정 어찌 나올 리가 있었겠는가"라고 했다. 스물일곱 살짜리 마다화지(麻多化之)는 "조선땅 자체가 처음"이라며 "'조선에 가서 허튼소리 하지 않는다면 너의 어미와 아내는 후하게 보살피겠다'는 말에 속았다"고 했다. 11월 18일 시작된 고문은 한 달을 끌었다. 좌부승지 박진원(朴震元)은 "모래에 파묻어도 봤지만 발악만 하고 있다(但有發毒)"고 보고했다.(1606년 11월 19일 '선조실록') 마고사구와 마다회지에게는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12월 18일 추국청이 보고했다. "범행이 미심쩍기는 하나 속히 처참하는 것이 마땅함." 선조가 일렀다. "진범이 아니라도 왜인으로서 적이 아닌 자가 있겠는가." 처형을 허락하며 선조가 덧붙였다. "헌부례(獻俘禮)만 하지 않으면 된다(不爲獻俘)." 헌부례는 전쟁 포로를 종묘에 바치는 의식이다. 종묘까지 속이는 기만적 승리였다. 왕실 조상에게는 알리지 말라는 뜻이다. 두 사람은 12월 20일 길거리에서 살갗이 한 점씩 도려지고 목이 잘렸다.

'국서도 가짜올시다'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보낸 국서도 가짜였다. 1636년 인조 14년 일본으로 간 통신사 정사 임계와 부사 김세렴에게 막부 다이묘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가 털어놓았다. "간사한 역적이 부도(不道)한 짓을 되풀이하여 국서(國書)와 도장을 고치고 바꾸어 두 나라를 속였다. '일본국(日本國)' 글자 밑에 '왕(王)'자를 덧붙였고, 국서에만 쓰는 도장을 맘대로 팠고, 귀국이 보낸 예단(禮單) 목록을 늘렸다. 그밖에 교묘히 어긴 것이 하나만이 아니어서(하략)."(김세렴, '해사록(海槎錄)', 1636년) 조선이 목매달던 2건, 국서와 범인 송환은 모두 가짜였다. 대마도주 소요시토시가 일본이 사과를 먼저 하고 조선이 수교를 요청한 것으로 문서를 뜯어고친 것이다. 돌이킬 수 없었고, 돌이키지도 않았다. 이를 '야나가와 사건(柳川一件)'이라 한다.

쇄환사를 통해 귀국한 피로인은 1607년 1400여 명, 1617년 321명, 1624년 146명이다.(김정호, ' 사행록을 통해 본 피랍조선인 쇄환교섭의 정치외교사적 특성') 합쳐도 사명당이 데려온 3000명에 못 미친다. 돌아가면 천민으로 천대받거나, 북쪽 국경으로 가서 군역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10만 피로인 대부분이 귀국을 거부했다. 비겁한 군주가, 명분에 집착해, 하늘 같은 민(民)을 짚신짝 취급한 탓이다. 그 가소로움을 보려면, 텅 빈 선정릉을 보면 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14/201808140371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