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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반민족 행위자]이병무(李秉武)

Bawoo 2019. 10. 5.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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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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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
자작
후임자 이홍묵
신상정보
출생일 1864년 2월 8일
출생지 조선 충청도 공주목
사망일 1926년 12월 6일(1926-12-06) (62세)
자녀 양자 이홍묵

이병무(李秉武, 1864년 2월 8일(음력 1월 1일)~1926년 양력 12월 6일)는 정미칠적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된 대한제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전주로, 정종의 서자인 무림군의 후손이다. 1881년 음서로써 관료 관직에 천거된 그는 1894년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 등 무관 벼슬을 지냈다.

1894년에 의친왕 이강을 수행하여 도일하였고, 1895년부터 약 1년간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한 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이때부터 일본과 가깝게 지내면서 군사 분야의 친일파로 활동했다. 1900년에는 일본으로 피신한 망명자와 연락한 혐의로 2년 동안 구금되고 유배형을 받기도 했다.

다시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1904년 복관한 이후로는 승진을 거듭했고, 1905년에는 고종의 사촌 동생인 완순군 이재완을 수행하여 일본에 가서 훈장을 받고 귀국했다.

1907년 고종황제가 이완용, 송병준에게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퇴위를 강요받자, 태자에게 군국의 대사를 대리하게 하였으나, 양위는 하지 않았다. 이에 이병무 등이 황제를 알현하고 퇴위를 강요하였다. 고종이 허락하지 않자 칼을 뽑아 자기 목을 찌르려 하면서, 폐하는 지금이 어떤 세상인 줄 아시느냐고 물었고, 고종은 그 위협을 이기지 못하여 퇴위하였다.

1907년 이완용의 친일 내각에 군부대신으로 입각하여, 한일신협약 체결로 군대를 해산할 때, 이를 주도했으며, 해산된 군대를 중심으로 의병 항쟁이 일어났을 때 의병 탄압을 지휘했다. 1909년 군부 가 폐지되고 친위부가 설치되자 초대 친위부 대신이 되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때 시종무관장으로 조약 체결에 적극 협조하여 자작에 봉해졌다.

일본 정부로부터 1907년 훈1등 욱일장,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다이쇼대례기념장을 받았으며, 이병무 사망 이틀 후인 1926년 12월 8일 일본 정부는 욱일동화대수장을 추서했다.

사후[편집]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는 그의 작위를 습작 받은 양아들 이홍묵과 함께 선정되었다.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이 발표되었을 때도 포함되었다. [위키백과]

참고 자료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6년 12월). 〈이병무〉 (PDF). 《2006년도 조사보고서 II -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이유서》. 서울. 76~98쪽쪽. 발간등록번호 11-1560010-0000002-10. 
  •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긍한(李肯漢), 등생은 일본군 보병 중좌를 지낸 이병규(李秉規)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86년(고종 23) 무과에 급제하였고, 1894년 친군장위영좌대우참령관·친군장위영우대부령관으로 임명되어 보빙사(報聘使) 의화군(義和君) 이강(李堈)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간 뒤 일본 육군교도단에 입학하였다가 1895년에 졸업하였다.

    1895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896년 졸업하였고, 귀국 후 육군보병 정위로 임관되어 육군무관학교 교관으로 발령 받았다. 1897년 육군보병참령, 1898년 무관학교 교두, 1899년 북청지방대 대대장 등을 지냈다. 1900년 북청진위대 대대장, 진위 제5연대 2대대 대대장이 되었다가 일본에 있던 망명자에게 국내 사정을 알려준 혐의로 해임되었다.

    러일전쟁 직후인 1904년 6월 육군보병참령으로 복관된 뒤 육군무관학교 교관, 군제의정관, 육군보병 부령으로 진급해 육군무관학교장으로 부임하였고 육군유년학교장을 겸임하였다. 1905년 육군보병 정령·군부교육국장·육군참장으로 발령받았다. 1906년 보빙사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진위 각대 검열사로 임명되었다. 이 해 1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3등 팔괘장, 3월 일본 정부로부터 훈2등 서보장을 받았다.

    1907년 육군부장·군부대신·군법회의 판사장으로 임명되었고, 시종무관장 임시서리를 겸임하였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주도하였고, 이에 저항한 군인 및 의병을 진압하도록 명령하였다. 같은 해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2등 태극장(太極章)과 훈1등 태극장을 받았다.


  • 1908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후원하는 친일 유교단체 대동학회에 참여하였고, 도쿄(東京)에 있는 황태자 이은(李垠)의 생일 문안차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 육군 특별연습을 배관하였다.

    1911년 1월 5만원의 은사공채를 받았으며,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5년 일제가 식민통치의 성과를 선전하는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에 기부금을 내고 특별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일본 천황 다이쇼 즉위대례식에 조선 귀족 총대로 처와 함께 참석하여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7년 불교옹호회 고문을 맡았고, 1922년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평의원을 맡았다.

    1926년 12월 6일 사망하자 양자 이홍묵(李鴻黙)이 작위를 물려받았다.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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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자료 있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