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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관련- 다대포 전투에서 순절한 장군] 尹興信( ? ~ 1592년)

Bawoo 2019. 8. 10. 21:54

尹興信 (? ~ 1592년)

조선 중기의 무관으로 임진왜란 발발 당시 다대포[1] 첨사였다. 본관은 파평 윤씨로 중종 시절 권신으로 알려진 윤임[2]의 다섯째 아들이다[3]. 아버지가 을사사화숙청될 당시에는 나이가 어려 죽음을 피한 대신에 신분이 노비로 떨어졌지만 선조에 의해 윤임의 명예가 복권된 후 다시 양반의 신분을 회복하자 바로 무과에 응시해 장수가 되었다.
허나 노비의 신분으로 자란 탓에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여 명문가의 후손임에도 양반 주류 사회에 편입되지 못하였고, 문자 해독을 못한다하여 파직되기도 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부산진 전투 직후 일본군 일부는 동래성으로 향하고 일부는 다대포와 서평포[4]를 공격해왔는데 4월 13일의 첫 번째 공격은 격퇴하여 시간을 벌었으나 익일 4월 14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휘하 병력이 불과 800명밖에 없어 거의 19,000명에 육박하는 왜군을 상대로 분전 끝에 전사하였다. 다대포진성 전투 항목 참조. 지금의 부산 광역시 사하구 다대 초등학교 건너편에 윤흥신을 기리는 '윤공단'이 세워져 지금까지 남아있으며, 동래구충렬사에도 배향되었다. 전사할 때의 나이는 불분명하나, 아버지 윤임이 1545년에 사사되었으므로 그 이전에 태어난게 거의 분명하며 따라서 나이는 적게 잡아도 40대 후반으로 추정한다.다만 1545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만 16살이 넘으면 안되므로[5] 아무리 많이 잡아봤자 60살 정도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윤흥신의 생년은 1530~1545년 사이라고 볼 수 있다.


[1] 지금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일대[2] 윤원형과 달리 윤임에 대한 평가는 다소 논란이 있는 편이나 어느 쪽도 '악명'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악명과는 별개로 윤임이 정치력이 뛰어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 하는 분위기. 애초에 정계에서 닳고닳은 문신이 아니라, 무장 출신이다. 윤임이 좀 더 현명하게 처신했다면 사화는 피할 수 있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인종이 일찍 죽고 경원 대군에게 전위하기로 결정된 순간 이미 윤임은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였다.[3] 적자로는 막내이다[4] 현재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일대[5] 역적으로 몰려 구족이 멸하더라도 만 15세 미만이면 살았다. 윤흥신이 1530년 이전 출생자였더라면 이 때 아버지와 같이 나란히 사형당했을 것이다.


[출처: 나무 위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파평이다. 중종의 제3계비 장경왕후의 조카이고, 대윤 윤임의 아들이다. 진천현감 등을 거쳐 다대포 첨사로 재직 중,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초기에 부산 다대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생애

임진왜란 전

을사사화에서 화를 입은, 윤임의 5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현풍곽씨(1517 ~ 1589)로 병마절도사 곽한(郭翰)의 딸이다. 윤여필은 할아버지이고, 그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사망한 중종의 제3계비 장경왕후는 그의 고모가 된다. 그에게는 위로 이복 형제 3명이 있었는데 맏형 윤흥인은 처형당하기 전, 아들 윤호가 중종경빈 박씨 소생 서녀 혜정옹주의 딸 홍옥환과 결혼하였다. 을사사화 당시 친동생들 및 어린 서출 동생들과 같이 살아남았다.

1582년, 진천현감이 되었으나, 문자를 해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1592년, 수군에 등용되어, 다대진을 수비하는 다대포 첨사가 되었다.

임진왜란과 전사

윤흥신이 다대포 첨사로 부임한지 얼마 안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왜군은 부산진 함락 이후 첨사 윤흥신과 군사 800명이 지키는 다대진을 공격해왔다. 윤흥신 장군은 아우 윤흥제와 함께 적은 병력으로 분전하여 1만의 왜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첫 전투에서 대부분의 물자를 소비한 조선군은 다음날 다시 왜군의 재공격을 받아 모두 순국했고 윤흥신은 아우 윤흥제와 함께 성에 남아 끝까지 항거하다가 전사했다.

증직으로 병조참의추증되었다가 뒤에 다시 병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1604년(선조 37년) 6월 25일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추록되었다. 1736년(영조 12) 동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윤흥신의 출생일

윤흥신의 부친인, 윤임이 1545년 사망한 것을 보면, 윤흥신은 1545년 이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윤흥신공 석상

부산시는 장군의 애국정신을 기려 1981년 9월, 초량3동 1143번지 일대에 석상을 건립하였다.[1] 

 윤흥신 석상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다대포진 첨절제사 윤흥신 장군 사적기

공은 장경왕후의 오빠 되시는 좌찬성 윤임(尹任)의 아들로 을사사화 때 아버지와 두 형이 죽음을 당하고 가족과 재산도 몰수되었다. 1570년(선조 3)과 1577년(선조 10) 두 차례에 걸쳐 관작을 복구하고 재산을 찾고 남은 아들을 등용하도록 하니 공은 그 형제 중에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공이 다대첨사가 되기까지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을사사화만 없었더라면 공은 왕실의 외척으로 권세를 누릴 사람이었다.

윤공의 전망사적은 충렬사지에 대강 나타나 있다. 즉 임신 4월 14일에 적의 일부 병력이 침투해 와서 성을 포위하였으나 역전하여 이를 물리쳤다. 이튿날 적은 대부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덮어 공격해 왔다. 부하들은 피신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를 물리치고 성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하였다. 성문을 굳게 닫고 남은 부하들과 같이 물밀듯 닥치는 적 앞에서 지주(砥柱)처럼 우뚝하게 성을 지키다가 시진도절(矢盡刀折)하여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가문의 불행을 딛고 풍운아 급한 때를 당해 죽음의 땅으로 부임하여 충척(充斥)한 적 앞에서 외로운 성을 끝까지 지키다가 의연히 죽음을 택하니 그 슬픔 비록 크다 해도 그 절의 어둠 속에 한 가닥 빛을 남기니 거룩한 일이다. 비록 선무원종공신이 되었으나 변방의 일이라 그 사적이 오래 드러나지 않았다.

영조 대에 와서 원임 부제학(原任副提學) 조엄(趙嚴)이 전망사적서(戰亡事蹟書)를 써서 충렬사에 합사할 것을 건의하고 동래부사 강필리는 사절기(死節記)를 적어 또한 합사를 강조하여 1772년(영조 48) 영조의 품의를 거쳐 합사하였다.
그 뒤로는 충렬사와 윤공단에서 해마다 제사를 모셨는데 근자에 부산시는 다시 선열유적을 정화하고 송공, 정공, 윤공의 동상과 석상을 세우게 되니 이에 공의 사적을 석상에 부쳐 추모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일천구백팔십삼년 구월 십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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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출처: 위키백과]


[참고 자료] 심강우 작가의 단편 모음집 전망대 혹은 세상의 끝 에는

화우(和雨)라는 작품이 실려있는데  여기에 윤흥신 공의 이야기가 나온다.


[내용 요약 -인터넷 교보문고]


3백여 년 전 〈화우〉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싸우다 순절한 윤흥신 공과 그를 흠모하던 기생 화우에 관한 이야기다. 먼 과거의 이야기라 낯설지만, 한결같이 한사람을 바라보는 기생의 사랑이 두드러지면서 시간의 간극을 넘어선다. 이혼소송 중인 아내와의 불화를 겪고 있는 나는 그래서 3백여 년 전 화우의 변하지 않는 사랑은 더욱 돋보인다. 먼 과거에서 전해오는 지순한 사랑이 ‘때깔 고운 나전함 하나’에 담겨 있다는 생각에 이르면, 현재의 일상적 시간을 벗어나 미래와 과거를 오고 간 것이 결국 사랑을 말하기 위함이었음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