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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소속 독립운동가]박재혁[朴載赫]

Bawoo 2019. 12. 16. 21:53

박재혁 ( 朴載赫 )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아버지는 박희선(朴喜善)이고, 어머니는 이치수(李致守)이다.


[활동 사항]
박재혁(朴載赫)[1895~1921]은 1895년 5월 17일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 여동생과 생활하였다. 태어나서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부산에서 성장하였다. 1911년 3월 22일 사립육영학교(현 부산진초등학교)를 수료하였고 1915년 3월 22일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제4회로 졸업하였다.

학생 시절부터 강렬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항일 운동에 참여하였다. 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 중에 최천택(崔天澤), 김병태(金餠泰), 박홍규 등과 함께 대한제국에서 간행한 보통학교 국사 교과서인 『동국 역사(東國歷史)』를 비밀리에 등사하여 배포하였다. 1913년에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최천택, 김병태, 박홍규, 오택(吳澤) 등과 구세단(救世團)을 결성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단보를 발행하여 부산과 경상남도 일대에 배포하였다. 이러한 구세단의 활동으로 일찌감치 일제의 요시찰 대상 인물이 되었다.

1915년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홀어머니와 여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조선가스전기주식회사에 근무하기도 하였고, 경상북도 왜관 등지에서 상업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17년 무렵부터 해외 무역업에 종사하였는데, 이 때문에 상하이[上海]를 중심으로 중국 각지와 싱가포르 등 동남아 지역을 다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륙의 정세에 눈뜨게 되었고, 중국에서 활동하는 항일 운동가와 교류하면서 1920년 8월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1919년 11월 김원봉을 단장으로 중국 둥베이[東北]의 길림에서 결성된 의열단은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身命)을 희생’한다는 공약을 내걸고 일제 고관 암살과 주요 관공서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비밀 결사였다. 1920년 3월 의열단이 감행한 진영·밀양 폭탄 사건은 비록 실패로 끝났고 곽재기·윤치형·윤세주·이성우 등의 대대적인 검거로 귀결되었지만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이후 의열단이 계획한 거사는 바로 진영·밀양 폭탄 사건에서 의열단 탄압에 앞장선 부산경찰서에 대한 응징이었다. 의열단장 김원봉은 이 일에 박재혁이 적임이라고 여겼고, 박재혁은 민족 해방을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설 것을 결심하였다.

거사 준비 과정에서 박재혁은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가 고서적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무역업을 하던 경험을 살려 중국 고서 상인으로 위장하였다. 귀국 경로를 선택하면서 다시 한 번 기지를 발휘하였다. 본래 일본 나가사키[長岐]에서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부산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계 탓에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나가사키에서 대마도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경로를 선택하였다. 이를 상하이의 동지들에게 알리기 위해 보낸 엽서에는 상업 현황, 장삿길, 수익과 같은 용어를 써서 상업 활동을 보고하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또한 엽서의 말미에 ‘熱落仙他地末古 大馬渡路徐看多[연락선 타지 말고 대마도로서 간다]’라고 써서,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연락선을 타지 않고 대마도를 거쳐 귀국한다는 것을 알렸던 것이다.

그 결과 나가사키에서 대마도를 통해 부산으로 잠입하는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부산에 도착하자 최천택, 오택 등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거사를 준비하였다. 1920년 9월 14일 고서적 상인으로 위장하고 부산경찰서로 찾아간 박재혁은 부산경찰서장과 직접 대면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경찰서 2층 서장실에서 하시모토 서장이 고서에 한눈을 파는 사이 숨겨온 폭탄을 꺼냈다. 그리고 하시모토 서장을 향해 준비해 온 전단을 보이며 자신이 의열단임을 밝히고 폭탄을 던졌다. 이때 하시모토 서장은 중상을 입어 사건이 일어난 지 오래되지 않아 사망하였다.

폭탄 투척 당시 박재혁도 중상을 입어 탈출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평소 친분이 있던 김영주·최천택·오택 모두가 공범으로 체포되었다. 박재혁은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대구복심법원과 경성고등법원을 거쳐 1921년 3월 31일 사형을 최종 선고 받았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폭탄 투척 당시의 상처로 고통을 겪는 와중에 폐병까지 얻게 되었지만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일제에 의해 욕되게 죽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단식에 나서 사형이 집행되기 전인 1921년 5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박재혁의 시신은 1921년 5월 14일 부산으로 인도되어 부산진 좌천동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해방 이후 1969년 10월 20일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2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46년 10월 오랜 친구이자 동지인 최천택과 오택을 필두로 부산진 일대의 유지들은 박재혁의 항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정공단(鄭公壇) 옆에 박재혁 의사비를 세웠다. 이 추모비는 1981년 5월 8일 박재혁이 다녔던 부산진초등학교로 이전되었다. 부산시는 1998년 5월 12일 부산진구 초읍동에 있는 부산 어린이 대공원 내에 박재혁 동상 朴載赫 銅像 을 건립하여 민족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항일 정신을 기리고 있다.



『부산시사』1(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89)
『부상 백년사』(부산상업고등학교, 1995)
『(20세기)부산을 빛낸 인물』1(부산광역시, 2004)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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