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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처를 비롯 5명이 죽고 아들 세 명이 납치되는 비극을 겪은 문신]이성구[李聖求]

Bawoo 2019. 12. 19. 21:22

이성구[李聖求]


출생

1584(선조 17)
사망1644(인조 22)
국적 조선, 한국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이(子異), 호는 분사(汾沙). 아버지는 〈지봉유설 芝峯類說〉을 지은 수광이다. 1603년(선조 36) 진사가 되었고, 1608년(광해군 즉위)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광해군 때 검열·감찰·예조좌랑·부교리·헌납·병조정랑 등을 거쳤다.

지평으로 재직중 이항복(李恒福)이 대북의 탄핵을 받자 그를 옹호했으며, 1618년 영평판관(永平判官)으로 있을 때 이항복이 죽자, 사우(祠宇)를 세웠다 하여 대북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서인정권이 들어서자 관직에 복귀하여 사간·대사간·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이조참의로 세자의 전주 피난길에 호종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병조판서로서 인조의 남한산성 피난에 호종했다. 주화론(主和論)과 주전론(主戰論)이 대립하자 최명길(崔鳴吉)에 동조하여 주화론을 주장했다.

1637년 우의정·좌의정으로 재직중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게 되자 수행했다. 1638년 영돈녕부사가 되었고, 1641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다음해 승지 홍무적의 탄핵으로 사직했다. 이어 영중추부사로 재직하던 중 선천부사 이계(李烓)가 명나라 상선과 밀무역을 하다 청나라에 발각되어 조정에서 이계를 죽였는데, 이때 신중히 처리할 것을 주장하다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후 양화강(楊花江) 부근에 만휴암(晩休庵)을 짓고 시문을 논하며 여생을 보냈다. 젊어서 헌납으로 재직할 때는 아버지가 대사헌으로 있고, 동생 민구(敏求)는 홍문관에 있어, 3부자가 3사(三司)를 지낸다는 말을 들었다.


그의 아내 권씨는 병자호란 때 강화가 함락되자 며느리 및 두 딸과 함께 목을 매고 자결했다.


저서로 〈분사집〉이 있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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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비극사 보충] 아들 상규(당시 19세)는 어머니 권씨가 자결하는 옆을 지키다가 청군에게 13발의 화살을 맞아 살해되고 상규의 아내 구씨, 출가했던 두 누이도 청군에게 저항하다가 살해된다. 상규의 세 동생은 청군에게 잡혀가고 다른 아들 한 명(석규, 10세)만 어머니의 옷을 돌려달라면서 애걸하여 끌려가는 것을 면한다.

결과적으로 부인, 아들 부부, 두 딸까지 5명이 죽고 아들 세 명은 청군에게 끌려가, 살아남은 가족은 첩 정씨와 10살 짜리 아들 한 명만 남는 비극을 당한다.

[출처: 한명기 저  최명길 평전 368쪽]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이(子異), 호는 분사(分沙)·동사(東沙). 태종의 아들인 경녕군(敬寧君) 이비(李礻+非)의 후손이며, 신당부령(神堂副令) 이정(李禎)의 증손으로[이성구의 생증조부는 하동령(河東令) 이유(李礻+谷)], 할아버지는 병조판서 이희검(李希儉)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이수광(李晬光)이며, 어머니는 도사(都事) 김대섭(金大涉)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3년(선조 36) 진사에 오르고, 1608년(광해군 1)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한원(翰苑: 예문관)에 들어가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광해군 초기에 전적·감찰을 거친 후 예조·병조·형조의 좌랑, 부교리·헌납·병조정랑·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헌납으로 있을 때 아버지는 대사헌을, 동생 이민구(李敏求)는 홍문관부제학을 지내, 삼부자가 삼사의 언관직에 같이 있어 세인들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지평으로 있을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시론(時論)에 반대했으며,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정협(鄭浹)을 천거해 종성판관으로 삼자 이를 문제삼는 간당(奸黨)들을 저지하다가 파직되었다. 1614년 이천현감(伊川縣監)을 거쳐 1616년 영평판관(永平判官)이 되어 포천도 함께 다스렸다.

이 때 이항복이 북청의 유배지에서 죽자 포천의 향민들이 운구해 장사지내고 서원을 세워 봉사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무고당해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때에는 사간으로 기용되어 폐해가 심한 정치를 일신시키고,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인정을 받아 강화부윤·부승지·예조참의를 거쳐 1625년(인조 3) 대사간, 이듬해 병조참지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이조참의로서 왕세자를 전주로 호종하고, 이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어 이듬 해 전라감사에 부임하였다.

그 뒤 대사간·좌승지·도승지·병조참판·대사헌·형조참판·경기감사 등을 지냈으며, 1636년 형조판서·이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와 체찰부사(體察副使)를 겸했고, 병자호란 때에는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다.

이 때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론에 동조했으며, 1637년 왕세자가 심양(瀋陽)에 갈 때 좌의정이 되어 수행하였다. 이듬해 영돈녕부사가 되고, 1640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가서 명나라를 칠 원군을 보낼 수 없음을 전하고 왔다.

1641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승지 홍무적(洪茂績)의 모함으로 사직했다가 곧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그런데 다시 선천부사 이계(李烓)가 청나라에 기밀을 누설한 사건을 논하다가 파직되어 양화강(楊花江) 부근에 만휴암(晩休庵)을 지어 소요하며 지냈고, 향인(鄕人)을 권장해 「서호향약기(西湖鄕約記)」라는 향약을 만들기도 하였다.

다시 영중추부사에 서용되었으나 나오지 않고 강호에 살다 죽으니, 인조가 조회를 폐하고 조제(弔祭)했다 한다. 이시백(李時白)은 “반정 이후 인조가 발탁한 정승 중에서 이성구의 인물됨이 첫째이다.”라고 하였다. 저서로는 『분사집(分沙集)』이 있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참고문헌

  •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 『인조실록(仁祖實錄)』
  • ・ 『동문휘고별편(同文彙考別編)』
  •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 『국조방목(國朝榜目)』
  • ・ 『동주집(東州集)』
  • ・ 『성호문집(星湖文集)』
  • ・ 『기언별집(記言別集)』
  • ・ 『청태종실록(淸太宗實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