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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를 보호하려다가 사형당한 인물]조재호(趙載浩)

Bawoo 2019. 12. 25. 20:16

                                        

조재호 영정, 〈한국명인초상대감〉



조재호(趙載浩, 1702년 , 숙종 28~ 1762년, 영조 38)는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외척으로, 효장세자의 비 현빈 조씨의 친오빠이며, 정조의 양 외삼촌이다. 당색은 소론으로 좌의정판중추부사를 지냈다. 본관은 풍양으로, 풍릉부원군 조문명의 아들이자 풍원부원군 조현명의 조카이며, 한국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조동호의 7대 방조이다.

생애

당색은 소론이나 당론이 해결된 다음에 관직에 오르겠다며 번번히 사직소를 제출하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홍봉한, 홍인한 등 처족과 정후겸, 홍계희, 김한구 가문 등 노론계 외척들의 감시를 받던 사도세자는 그에게 비밀리에 도움을 청했다가, 이를 빌미로 영조에 의해 위리안치되었다가 사형당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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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풍양. 자는 경대(景大), 호는 손재(損齋). 아버지는 소론 완론탕평파의 거두인 좌의정 문명(文命)이며, 어머니는 김창업(金昌業)의 딸이다. 동생이 진종(眞宗 : 영조의 아들인 효장세자)의 비 효순왕후(孝純王后)이다.

1739년(영조 15)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의 추천으로 세자시강원에 등용되어 서연에 참여했다. 1744년 홍산현감(鴻山縣監)으로 재직중 춘당대문과에 급제했고, 승지로 특진한 뒤 지돈녕부사·경상도관찰사·이조판서·우빈객을 역임했다. 1752년 소론 준론(峻論)의 거두였던 이광좌(李光佐)의 사후 관직 추탈을 탄원하여 준론계의 미움을 받았다. 1754년 우의정이 되었고, 다음해 세자책봉 문제를 정리한 〈천의소감 闡義昭鑑〉 편찬의 도제조를 겸했다.

1759년 영돈녕부사로 있을 때 계비 책립의 문제가 대두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임천에 부처(付處)되었다. 다음해 풀려났으나 향리에 은거했다. 1762년 장헌세자의 폐위문제가 대두되자, 세자를 보호하기 위한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역모 혐의가 씌워져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1775년 신원되었다. 저서로 〈손재집〉이 있다(→ 사도세자사건).[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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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9년(영조 15)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의 천거로 세자시강원에 등용되었다. 그 뒤 홍산현감(鴻山縣監)으로 있으면서 춘당대시(春塘臺試)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승지로 특진되었고, 이어 경상도관찰사·이조판서 등을 거쳐 1752년 우의정이 되어 『천의소감(闡義昭鑑)』의 편찬을 주장(主掌)하기도 하였다.

1759년 돈녕부영사로 있으면서 계비(繼妃)의 책립을 반대한 죄로 임천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나 춘천에 은거하였다. 1762년장헌세자(莊獻世子)가 화를 입게 되자 그를 구하려고 서울로 올라왔으나, 오히려 역모로 몰려 종성으로 유배, 사사되었다가 1775년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저서로 『손재집』 15권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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