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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항일운동가, 노동운동가] 강주룡[姜周龍]

Bawoo 2020. 1. 21. 21:27


강주룡[姜周龍]

1901년(고종 38) ~1931년 8월 13일



개설

           

평양 소재 평원(平元)고무공장의 여공으로 1931년 동맹파업을 벌였다. 을밀대(乙密台) 고공투쟁으로 여론을 환기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단식 투쟁 끝에 30세에 요절하였다.


생애

1901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난 강주룡은 14세 때 가난에 쫓긴 가족을 따라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1921년 20세의 나이로 통화현의 5세 연하 남편 최전빈을 만나 혼인하였다. 24세 때 채찬(蔡燦)의 지도 아래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남편이 병사하자, ‘남편 죽인 년’이 되어 시집에서 쫓겨났다. 이후 가족들과 귀국하여 평원고무공장의 여공으로 가장 역할을 했다. 1931년 평원고무공장 파업이 일어났고, 일경에 의해 주모자로 체포된 강주룡은 고공투쟁의 여장부로 신문지상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으나, 극도의 신경쇠약과 소화불량 등으로 보석을 받았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출감 두 달 만인 1931년 8월 13일, 평양 빈민굴에서 30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활동사항

당시 조선의 고무공업계는 1929년 세계공황기를 맞아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1930년 5월 서울에서 전조선고무공업자대회를 열고 임금 인하를 결의하였다. 1930년 8월 초 평양고무공업조합이 종래 임금의 17% 삭감을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하자, 노동자들은 일제와 결탁한 자본가들을 비판하며 반대투쟁을 일으켰다.

1931년 5월 16일 평원고무공장 여공들의 단식 파업은 평양의 2300명 고무직공들의 임금 삭감에 대한 항의에서 비롯되었다. 강주룡은 1931년 5월 평원고무공장 파업을 주도하던 중 일경의 간섭으로 공장에서 쫓겨나자 을밀대 지붕으로 올라가 무산자의 단결과 노동생활의 참상을 호소하였다. 광목을 찢어 줄을 만들고 감아 올려 줄타기하듯 올라간 지상 12m 을밀대 지붕 위에 앉아 평양의 새벽을 가르고 “여성 해방, 노동 해방”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당시 일제는 만주 침략을 위한 군국체제로 치달리면서 조선에 대한 탄압과 수탈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강화되어갔다. 일반 사회의 무관심 속에 여공들은 자신들의 투쟁을 사회에 알리고 여론을 환기시킬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여기에 한국 최초 노동자 고공투쟁이란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일반인들의 심장에 꽂히도록 외치던 8시간 만에 일경에 의해 강제로 끌려 내려진 그는 계속 단식하며 임금 삭감에 저항하였다. 고용주의 비 인도성을 거세게 비판하며 벌인 단식투쟁에 1주일의 구류처분을 받고, 옥중에서도 54시간 단식을 결행하였다. 강주룡을 비롯한 여공들의 처절한 생존권 투쟁은 별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지만, 이 사건을 통하여 여성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이 항일민족운동으로 연결되는 의미를 갖게 해주었다.


상훈과 추모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 『여성이 여성을 노래하다』(신영숙, 늘품 플러스, 2015)
  • ・ 『인물여성사』 한국편(박석분·박은봉, 새날, 1994)
  • ・ 『독립운동사』 제10권(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국가보훈처, 1978)
  • ・ 『동광(東光)』 제23호(1931.7)
  • ・ 『동아일보』 (1931.6.1; 6.3;6.11~13; 1932.6.10; 8.17; 1933.3.25)
  • ・ 국가보훈처 나라사랑광장(www.mpva.go.kr)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박서련 작가의 "체공녀 강주룡"이란 작품이 있다.[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