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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제국: 만주사변을 일으킨 1인. 1급 전범]도이하라 겐지

Bawoo 2020. 4. 14.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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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하라 겐지
土肥原 賢二
Kenji Doihara.jpg
생애 1883년 8월 8일 ~ 1948년 12월 23일
출생지 일본 오카야마현
사망지 일본 도쿄
별명 만주의 로렌스
복무 일본 제국 육군 군기 일본제국 육군
복무 기간 1904년 ~ 1945년
최종 계급 대장 대장(大将)
근무 특무기관
지휘 일본제국 육군 제14사단,
일본제국 육군 제5군
주요 참전 시베리아 출병
중일 전쟁
제2차 세계대전
전범 재판 당시의 도이하라 겐지


도이하라 겐지 (일본어: 土肥原 賢二, 1883년 8월 8일 ~ 1948년 12월 23일)는 일본제국 육군의 군인이자 대장이다. 그는 만주국 건국 및 화북 분리 공작 등의 모략으로 만주국에 깊숙이 관여했으며, 생전의 별명은 "만주의 로렌스" 였다. 전후 도쿄에서 열린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이 되어 사형되었고,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1]

 

전범 재판 당시의 도이하라 겐지

인물과 경력

도이하라 겐지는 오카야마현 오카야마 시 출신으로 1904년일본 육군사관학교, 1912년에는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1912년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참모 본부 중국과 부대위로서 베이징에서 대 중국 공작을 꾀했으며, 후에는 사카니시 리하치로(板西利八郞) 기관장 보좌관, 톈진 특무 기관장을 지냈다. 1931년 펑텐(奉天) 특무 기관장이 되었고, 만주 사변 때에는 펑텐(奉天) 의 임시 시장이 되었다.

후에는 화베이 분리 공작[2] 을 추진해 진토 협정을 체결하였고, 이 결과 허베이 성기동 방공 자치 정부를 성립시켰다. 그는 펑텐 사건(奉天事件) 을 배후 조종해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는 등, 모략을 불사하는 침략을 자행해 "만주의 로렌스"라는 잘못된 별명을 얻었다.[3]

그는 1941년 대장으로 승진해 육군 항공 총감을 맡았고, 1943년 3월에는 싱가포르로 가서 제7방면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1945년 4월 일본으로 돌아와 육군 교육 총감 직에 임했고,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할 때까지 유임하였다.

전범 재판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에 체포되어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동아시아의 전쟁 범죄인을 심판하기 위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중국측이 강경적으로 그에게 극형을 내릴 것을 주장하였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져 1948년 12월 스가모 구치소 내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으나,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의 전범 7명의 교수형이 집행된 지 30년 만인 1978년, 다른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각주

  1. 《야스쿠니 문제》64쪽
  2. 요미우리, 전쟁당시 지도자 책임 日 언론으론 첫 규명 시도
  3. 《에드거스노 자서전》271쪽

같이 보기

외부 링크

전임
대장 나카무라 고타로
제18대 동부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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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5월 1일 - 1944년 3월 22일
후임
대장 후지에 게이스케
전임
(신설)
제1대 제7방면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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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3월 22일 - 1945년 4월 7일
후임
대장 이타가키 세이시로
전임
대장 하타 슌로쿠
제26대 교육총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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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4월 7일 - 1945년 8월 25일
후임
대장 시모무라 사다무
전임
대장 다나카 시즈이치
제21대 동부군 사령관
War flag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svg
1945년 8월 22일 - 1945년 9월 23일
후임
대장 기타노 겐조
전임
대장 스기야마 하지메
제2대 제1총군 사령관
War flag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svg
1945년 9월 14일 - 1945년 9월 23일
후임
대장 우메즈 요시지로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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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의 군인. 특무기관장으로 중국에서 일본군의 각종 간첩행위와 공작에 관여하는 등 일본 제국의 중국 침략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후 A급 전범으로 사형당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이력[편집]

1883년 8월 8일, 오카야마현의 무사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형 역시 군인이었다. 센다이 유년학교,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04년 일본육군사관학교 보병과를 16기로 졸업, 1912년 11월,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참모본부 지나과에 배치되어 1913년부터 20년 동안 중국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중국어와 그 사투리를 포함, 11개의 언어에 능통하였다. 1913년 천진주둔 13보병연대장에 임명되어 중국에 발을 디뎠으며 봉천군벌을 위한 관동군 고문 이타노(板西利入郞) 중장의 부관으로 10년간 근무하였다. 이때 돤치루이의 친위파벌인 안복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며 이후 천진특무기관장으로 있으면서 장쭤린과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또한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시베리아 출병에 참여했으며 1924년 2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관동군을 선동하여 장쭤린을 원조하게 하였다.

하지만 별볼일 없는 집안 때문에 40세가 되도록 소좌에 머물며 승진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고 예편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도이하라는 자신의 사촌 여동생을 황족에게 첩으로 바쳐서 황실에 연줄을 만들어 출세하게 되었고 1926년, 베이징의 일본 공사관 무관보로 전임하게 되는데 이때 그가 보좌한 공사관 무관이 그의 한기수 후배이자 훗날 총리가 되는 도조 히데키였고 그는 도조 히데키라는 또 다른 연줄을 만들게 된다.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로 장쭤린이 만주로 패퇴하자 고모토 다이사쿠와 결탁하여 황고둔 사건에 참여하였다. 1929년, 베이징의 인줄을 이용하여 국민정부의 군사고문관으로 초빙되었다. 1930년 대좌로 승진하였으며 1931년 봉천특무기관장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봉천특무기관장으로 있으며 백군 잔당, 비적들과 합작하여 거대한 아편 거래망, 매춘시장을 형성하여 만주로 일본 자본을 대대적으로 침투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볼셰비키를 피해 도주했던 상당한 숫자의 백계 러시아인 여자들이 아편에 중독되어 일본군의 매춘부로 전락했다.

2.2. 만주사변[편집]

나카무라 사건이 발생한 후 무력행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본측은 중국을 업신여기고 중국측은 일본을 업신여기고 있기 때문에 양국의 세력이 미치고 있는 만주에서는 언제 어떠한 돌발 상태가 일어날지 모르는 우려할만한 상태이다. 또한 만주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의 신경은 매우 날카로워져 있으며 관헌 역시 포악하고 오만하여 양자의 대립 관념은 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라고 선동했다. 또한 기자회견을 통해 나카무라 사건이 외무성의 손에서 해결되지 않으면 무력으로 해결할 것이며 중국 측이 문제 해결에 성의가 없다고 보고했다. 외상 시데하라 기주로는 이에 대해 자제를 요청했으나 소용이 없어 군부의 중견층이 강경론을 지지하게 되었다. 또한 중원대전 후 다롄으로 망명해 있던 옌시산에게 비행기를 제공하여 타이위안으로 귀국시켜 장쉐량을 교란케하는 한편 스여우싼, 한푸쥐를 지원하고 1차 양광사변에 참여한 쩌우루에게도 힘을 실어주는 등 화북의 정세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1931년 9월 18일, 관동군 봉천기관장으로 재직하면서 관동군 참모 이시와라 간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관동군 특무 하나야 타다시 등과 함께 류탸오후 사건을 조작,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9월 19일, 봉천시가 함락되자 다음날인 20일에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의 포고에 따라 임시 시장에 임명되었다. 2달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장 재임 기간 동안 만철부속지에 시공서를 설치하여 봉천 도시계획을 수립하였다. 일본의 손에 들어온 만주의 운명에 대해서 가장 먼저 일본인이 맹주가 되는 오족공화국을 건설하여 만주를 중국에서 분리하여 친일 괴뢰국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만약 일본인이 맹주가 되는 형식이 부담이 된다면 선통제나 산동반도의 쿵더청을 추대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만주 전역을 일본 영토로 점령해야 한다. 지금까지 관동군에서 연구해왔듯이 점령지 통치로 가는 게 좋다."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이에 대해서 성급하다고 반대했으나 하시모토 긴고로가 도이하라의 주장에 찬동하면서 만주국 건국이 결정되었고 도이하라는 천진으로 가 푸이에게 만주국 황제 자리에 오를 것을 제안하여 그의 승낙을 받았다. 한달 반 후 봉천시장직을 한간 조흔백에게 양도한 도이하라는 천진으로 이동, 1931년 11월 8일, 선통제를 만주로 탈출시키기 위해 천진사변을 조작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성공적으로 푸이를 만주로 데려와 온천에 숨겼다. 1932년 1월, 북만주에서 저항하던 마잔산에게 군비와 흑룡강성 성장 자리를 제시하여 그의 항복을 받아냈다.

2.3. 화북분리공작[편집]

1933년, 카와시마 요시코로부터 만주국의 마적단을 규합하여 만주국의 특공대로 삼겠다는 제안을 받고 20만엔의 자금을 지원하였다. 1934년 4월 17일, 일본 외무성 정보부장 아모우가 아모우 성명을 발표하여 중국에 대한 모든 종류의 원조에 반대함을 천명하자 이에 호응하여 <화북인민애국협회>를 조직하고 참모본부에 <화북을 구제할 정책>이라는 보고서를 제출, "극동 지역에서 대전을 모면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획득하기 위해 현재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새로운 화북 정권을 세우는 것이다."라고 주장함으로 화북분리공작을 최초로 고안했다. 1934~1935년,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첩보활동을 하였으며 첩보활동을 마치고 1935년 2월 16일, 칭다오에서 상하이로 이동하여 장제스가 반일 음모를 꾸미며 배일운동을 선동하고 있다면서 장제스가 이를 수정하지 않으면 중일 제휴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장제스를 공격했다. 2월 하순, 난징으로 이동한 도이하라는 국민정부의 주요 인물들과 회담한 후 <중일 친선의 구체적 방안>을 제출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제안했다.
  • 1. 중국과 만주국 간에 비무장 지역을 설치한다.(해당 구역 범위는 장성 일대로부터 시작하여 회하(淮河) 유역을 거쳐 산동 전지역과 안휘 북부, 강소 북부 모두가 포함된다.)
  • 3. 화북의 당무활동을 정지한다.
  • 4. 일본 정부는 중국의 공산당 토벌을 원조한다.

만주국으로 돌아온 도이하라는 3월, 관동군 막료 회의를 신경에서 개최하여 새롭게 대중국 정책을 심의, 화북의 중국 정권을 굴복시키고 일본의 권익을 증대시키로 결의하였다. 이후 관동군 다롄회의에 참석하여 일본군의 만주, 화북 방침을 결정하였으며 이때 만주의 국정방침을 치안 제일주의에서 경제 제일주의로 변경, 화북에 대해 측면공격을 통해 '최후 목적'에 도달하기로 하였다. 1935년 5월, 중일 외교관계가 대사급으로 격상되자 히로타 고키의 협화외교에 반대를 표명하였다. 이후 쑹저위안, 푸쭤이, 허잉친 등을 핍박, 하매 협정진토 협정 등의 체결에 적극 관여하였다. 이후 관동군에게 만철을 중심으로 화북 지역에 독립된 경제블록을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고 1935년 7월, 만철은 천진에 경제조사단을 파견하여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이용하여 화북을 근대화하겠다고 주장했다. 이후 쑨촨팡 옹립 음모, 풍대 사건 등을 연달아 일으켰다. 이때 육사 시절에 친분이 있는 옌시산을 포섭하려고도 시도했으나 옌시산은 이를 묵살하였다.

1935년 10월, 관동군 사령관 미나미 지로는 도이하라를 천진 주둔군에 파견하였고 도이하라는 천진에서 더욱 적극적인 화북분리공작에 매달렸다. 도이하라는 타다 성명 이후 쑹저위안 등을 선동하기 위해 향하 사건을 조작하였고 국민정부의 법폐개혁을 방해하기 위해 쑹저위안을 협박하여 관동군 제1혼성여단을 움직여 무력시위를 벌였으나 이는 국민정부를 자극하여 1935년 11월, 장제스가 '최저한도'에 도달하게 된다면 일본에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이라고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다. 쑹저위안을 포섭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도이하라는 12월, 란유행정독찰전원 인루겅을 포섭하여 기동사변을 일으킴으로 지둥방공자치정부를 수립하였다. 1936년 3월, 푸이의 권위를 높여주기 위해 그를 알현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2.4. 태평양 전쟁과 죽음[편집]

중일전쟁 발발 후 왕커민의 옹립에 반대하고 탕사오이, 우페이푸를 포섭할 것을 주장했다. 1938년 가게사 사다아키 등이 주도한 왕징웨이 공작을 원조하여 왕징웨이왕징웨이 정권의 대리주석으로 옹립하였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관동군 사령관으로 재직하였으며 이후 1940년, 육군사관학교 교장 겸 군사참의원 참의관에 임명되었다. 제5군 사령관을 거쳐 1941년에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였으며 그해 11월 4일, 도조 히데키, 데라우치 히사이치,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야마다 오토조, 오이카와 오시로, 요시다 젠고 등과 함께 쇼와 덴노가 참석했던 군사참의관 회의에 참석하여 진주만 공습남방작전을 검토하였다. 1943년, 군사참의원에서 물러나 동부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가 1944년, 싱가포르의 제7방면군 사령관으로 이임했고 말레이 반도,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에서 연합군 포로들을 학대하였다. 전쟁 최말기인 1945년 4월, 일본으로 돌아와 교육총감에 임명되었고 8월에 도쿄를 방어할 12방면군 사령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14일에 열린 육군성 수뇌회의에서 육군상 아나미 고레치카가 주도한 히로히토의 종전 결정에 무조건 찬성하기로 한 결의문에 아나미 육상, 우메즈 요시지로 참모총장과 함께 서명하였다.

1945년 9월,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극동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때 다나카 류키치황고둔 사건 등이 일본군의 음모라는 점을 대대적으로 폭로하였고 이에 대해 동료를 배신한다고 큰 불쾌감을 표시하였으나 어찌 되었건 간에 만주사변에 앞장서는 등 침략전쟁에 가담한 것이 확실했으므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를 두고 역시나 만주사변에 참석했던 가타쿠라 다다시는 도이하라는 이시와라의 졸개에 불과했는데 정작 이시와라는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으면서 도이하라를 사형에 처한 것은 조연을 죽이는 일이라고 논평했다. 이시와라 간지 역시 검사단의 질문에 "세간에 대단한 역할을 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건 오해다. 도이하라는 만주사변 돌발 당시 중대한 활동은 하지 않았다."라고 증언했으나 별로 소용은 없었다.

사형선고 후 정토종에 귀의하여 비로소야 삶의 참된 가치를 깨달았다고 밝히면서 가족들에게도 모두 정토종에게 개종할 것을 권유했다. 이후 일본과 동북아시아에서 '골치 아픈 사상'이 퍼지고 있다고 논평하였으며 "나는 이 극히 중차대한 시점에 우리를 구할 위대한 인물이 출현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천황폐하 만세!"라고 가족들에게 편지를 쓴 후 1948년 12월 22일, 전범들 중 가장 먼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유골이 합사되었다.

3. 매체에서[편집]

호이4에서 일본의 육군 장군과 뜬금없이 공군 참모총장으로 등장한다. 공군 참모 총장으로서는 악천후 페널티 10%감소라는 괜찮은 특징을 가지지만 육군 장군으로서는 1레벨에다가 최악의 트레잇인 약물 남용자[1]가 달려있어서 폐급이다. 심지어 약물 남용자 트레잇은 게임에서 유일하게 달고 있다.

4. 참고문헌[편집]

4.1. 저서[편집]

  • 일제의 대륙침략사, 소운서, 이문영, 고려원.
  • 쇼와 육군, 호사카 마사야스, 글항아리.
  • 불교 파시즘,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교양인.
  • 쇼와 유신, 한상일, 까치.
  • 히로히토 평전, 허버트 빅스, 삼인.
  • 가와시마 요시코, 필리스 번바움, 사일런스.
  •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 호사마카 마사야스, 페이퍼로드.
  • 세기의 스파이, 박상민, 좋은땅.

4.2. 논문[편집]

  • 박상수, 중일전쟁기 화북의 대일 '협력자', 아세아연구 49(4),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 황묘희, 침략전쟁기시 천진의 친일한인조직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 김주용, 심양(봉천) 근대도시화의 양면성, 사학연구 (85), 한국사학회.
  • [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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