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후상(夏侯尙, ? ~ 225년)은 중국 후한 말기 ~ 삼국 시대 위나라의 장수로, 자는 백인(伯仁)이다.
행적
이름 | 하후 상(夏侯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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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후한 ~ 삼국 시대 |
생몰 | ? ~ 황초 6년(225년) |
자 | 백인(伯仁) |
본관 · 출신 | 예주 패국 초현 |
관직 | 군사마(軍司馬)〔조조〕 → 오관장문학(五官將文學)〔조조〕 → 황문시랑(黃文侍郞)〔조조〕 → 산기상시(散騎常侍)〔조조〕 → 중령군(中領軍)〔조조〕 → 정남장군(征南將軍) 영(領) 형주자사(荊州刺史) · 가절(加節) · 도독남방제군사(都督南方諸軍事)〔조비〕 →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영(領) 형주목(荊州牧) · 가절월(假節鉞)〔조비〕 |
작위 | 평릉정후(平陵亭侯)〔조조〕 → 평릉향후(平陵鄕侯)〔조비〕 → 창릉향후(昌陵鄕侯)〔조비〕 |
소속 | 조조 → 조비 |
200년 초반에 조조가 기주를 평정할 때 군사마로 종군했으며, 그 후 오관장문학이 되었다. 대군에서 오환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창이 정토하러 갔는데, 하후상은 조창의 참군으로 수행했다. 위나라 황조가 수립되자 정남장군 겸 형주 자사·가절·도독남방제군사가 되었다. 220년, 상주하여 상용을 기습할 것을 진언해, 서황과 함께 촉나라의 부군장군 유봉을 무찌르고 상용태수 신탐의 항복을 받아 3군 9현을 평정해 정남대장군이 되었다.
황초 3년(222년) 문제가 친히 완에 내려와 남정할 때, 여러 군을 거느리고 조진, 장합과 함께 강릉성을 포위하고, 오나라의 제갈근이 구원군을 이끌고 오자 제갈근 군대의 배를 불태우고 수륙 병진하여 이를 격파했다. 그러나 강릉성은 주연(朱然)이 항전하여 함락할 수 없었다. 《삼국지》 하후상전에서는 “아직 성을 함락하지 않았는데, 군에 역병이 돌았으므로 퇴각했다.”고 서술한다. 《삼국지》 동소전, 반장전과, 또 제갈근전에 배주로 인용된 《오록》의 내용은 조금 다르다. 하후상은 보병과 기병을 배를 통해 삼각주로 들여보내고, 부교를 만들어 남북으로 왕래하려 하였고, 이렇게 하여 성을 함락하고자 했다. 논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작전을 찬성했으며, 실제로 오나라 장군 제갈근과 양찬(楊粲)은 이런 하후상의 전법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동소(董昭)의 상소를 받은 문제가 조칙을 내려 삼각주에서 빠져나오게 했고, 반장이 부교를 전소시킬 작정으로 떼를 만들어 띄우려고 하고 있었으므로 하후상 등의 군대는 삼각주를 빠져나왔다. 열흘 후 동소의 상소대로 물이 불어나 삼각지에 들어간 군대는 고립될 뻔하였다. 강릉현령 요태가 위나라와 내통하려 했으나 들통나 주연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제갈근이 부교를 띄워 공격해 오니, 하후상 등은 이길 수 없게 되었으므로 퇴각했다.
문제는 하후상에게 조서를 내려, 아랫사람에게 형벌과 은혜를 베풀어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게 했다. 하후상은 이것을 장제에게 보였고, 장제는 문제에게 간언하여 이 조서를 물려오게 하였다.
황초 5년(224년), 창릉향후로 옮겨 봉해졌다. 하후상이 애첩이 있어 본부인 조씨를 사랑하지 않자, 문제(조비)는 애첩을 교살했다.(책 "결국은 이기는 사마의"에 따르면 본부인이 조비에게 하소연했다고 한다).
하후상은 비탄에 빠져 발병하여 정신이 이상해졌고, 이미 묻었음에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해 무덤까지 나가서 보았다. 문제는 이를 듣고 분노했으나, 구신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은총은 이전과 같았다. 이듬해, 병이 더욱 깊어져 서울로 돌아왔다. 문제는 여러 차례 찾아갔고, 손을 잡고 울었다. 죽자 시호를 내려 도후(悼侯)라 했다.
[결과적으로 조비의 치졸한 짓으로 꼽히며- 오나라에 포로로 잡혀있다 돌아온 우금도 자결하도록 만들었다-,하후상이 죽은 건 위가 멸망하는 나비효과로서 작용했다. 조비는 동생들을 철저히 실권에서 배척하면서[1] 방계 친족들에게는 군권과 실권을 나눠주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외척과 환관 대신 왕권을 강화했는데[2] 조예 시절에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황가를 지탱하던 조진과 조휴가 죽어버리면서 조씨나 하후씨 중 군권을 부릴 인재가 없어지자 군권이 사마의에게로 몰아졌는데, 이는 고평릉 사변까지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후반기 조씨, 하후씨 일가 중 하후상이 유능한 모습들을 보여줬기에 하후상이 살아있었다면 조휴와 조진이 죽더라도 군권이 사마의에게 가는 상황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조비 때문에 어처구니 없게 죽게 되었으니 조비가 위의 멸망 단초를 제공했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이 내용은 나무위키에서 발췌)]
《삼국지연의》의 하후상
219년 한중 전투에 형 하후덕과 함께 참가했다. 천탕산 전투에서 촉나라의 노장 황충에게 사로잡혔으며, 진식과 포로 교환하는 도중에 황충의 활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이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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