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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 Giovanni Battista Pergolesi)

Bawoo 2020. 5. 31. 20:10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이탈리아어: 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년 1월 4일 ~ 1736년 3월 16일)은 이탈리아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 오르간 연주자였다. 그는 장중한 바로크 음악양식으로부터 명쾌한 고전파양식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활약하고 27의 나이로 단명한 천재적 작곡가로 오페라 부파의 초기의 중요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생애

중부 이탈리아 출신으로 소년 시대에 현저한 재능을 보였기 때문에 영주의 경제적 원조를 얻어 나폴리에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웠다. 그는 바이올린에 뛰어났으며 특히 교사들이 감탄해 마지 않는 즉흥 연주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1731년 21세로 음악원을 졸업하였다. 오페라 및 종교음악의 작곡가로서 데뷔했으나 그 뒤 불과 5년간 작곡가로 활약한 데 지나지 않았다. 한동안 나폴리 귀족의 악장으로 일했으나 그 동안 나폴리의 오페라 극장에도 진출하여 1733년에 발표한 막간극(幕間劇) <마님이 된 하녀>의 성공으로 페르골레시의 이름은 곧 전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죽은 후 파리에서 상연된 <마님이 된 하녀>가 루소를 중심으로 이른바 '부퐁 논쟁'을 야기시킨 일은 유명하다. 1734년 2월, 24세의 젊은 나이로 나폴리시의 예배당 악장 대리에 취임했다. 그러나 1735년경부터 지병(持病)인 폐병이 악화되어 다음해 2월 의사의 권유로 전지요양을 떠났으나 3월 16일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풍은 장대한 구성력이 부족다는 평이 있지만 멜로디의 매끄러움, 신선한 아름다움과 풍부한 화성의 뉘앙스, 그리고 섬세함으로 걸출하다. 특히 성악의 텍스처(書法)는 광채를 느낄 수 있다.

  • 마님이 된 하녀

그의 일생일대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18세기 후반에 볼 수 있는 오페라 부파의 전성 계기를 만든 역사적 작품이다. 등장 인물은 불과 세 사람이고 게다가 한 사람은 벙어리여서 전혀 노래를 하지 못한다. 오케스트라도 현악기만으로 된 소규모이다. 전부가 2막으로 되었다. 나폴리의 부호 우베르트는 하녀인 세르피나가 너무나 횡포를 부려, 결혼하여 세르피나를 내보내려고 결혼상대를 구해 오라고 세르피나에게 명령한다. 세르피나는 한 계략을 생각하여, 벙어리 하인 베스포네의 힘을 빌려 멋지게 우베르트의 부인으로 들어앉는다는 줄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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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국의 모차르트’로 불리며 천재 음악가의 계보를 잇는 페르골레시는 불과 26세로 생을 마감했다. 1733년 상연된 〈마님이 된 하녀〉(La Serva Padrona)는 페르골레시의 대표작이다. 까다롭고 돈 많은 노인을 섬기는 꾀가 많은 하녀가 계략을 꾸며 결국은 마님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는 2막짜리 희극은 원래는 정가극 중 한 장면이었으나 이 부분만이 압도적인 인기를 끌자 독립시켜 계속 상연되었으며, 그 후 오페라 작곡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나폴리파의 오페라 작곡가 페르골레시에 의한 희가극의 개척이 없었다면 모차르트의 〈코시 판 투테〉나 〈피가로의 결혼〉도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산타키아라 교회는 나폴리에서 가장 큰 성당인데, 1313년에서 1340년 사이 나폴리의 왕 앙주 가의 로베르 1세(Robert of Anjou)가 왕비를 위해 세웠다. 이 성당에는 페르골레시의 슬픈 사랑이 숨겨져 있다. 페르골레시는 귀족의 딸 마리아 스피넬리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당시는 신분이 낮은 음악가가 귀족과 결혼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했고 늘 병약했던 페르골레시는 외모도 볼품이 없었다. 따라서 마리아의 오빠들은 마리아에게 칼을 주면서 명령했다.

“사흘 이내에 신분에 맞는 귀족 출신 남편감을 찾든지, 아니면 페르골레시를 죽여라.”

사흘 후 마리아는 오빠들에게 “나는 귀한 신랑을 찾았다”라고 말하고 즉시 산타키아라 성당 수녀원으로 들어가 버렸고 마리아는 곧 죽었다.

페르골레시는 슬픔에 잠겼고 이후 종교 음악에 전념하여 〈진혼미사곡〉을 작곡하여 마리아를 추모했다. 페르골레시는 〈스타바트 마테르〉 (Stabat Mater)를 마지막으로 작곡한 후, 마리아가 죽은 지 1년 후에 죽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젊디 젊은 26세였다.[모차르트와 떠나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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