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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암왕국에서 활약한 일본인 용병대장] 야마다 나가마사[山田 長政]

Bawoo 2020. 6. 1. 22:55

 

 

야마다 나가마사

 

 

야마다 나가마사(일본어: 山田 長政, 생년 미상 ~ 1630년)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서 에도 시대 초기의 일본인 모험가로, 주로 시암 왕국에서의 영웅담으로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1590년 시즈오카 출신으로 모험가이자 샴(지금의 타이)과 무역을 한 비즈니스맨이었다. 그는 당시 타이의 아유타야 왕국에 막강한 영향을 끼쳤고 이에 당시 타이 왕은 그를 말레이 반도의 낫콩시 타마라트 지방의 주지사로 임명했다.

​그는 아유타이 왕국의 수도에 있었던 반이픈(Ban Yipun)이라는 일본인 집단거주지의 수장이었다. 이곳에는 천여명의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다.

 

당시 그의 유일한 적으로는 네덜란드가 있었는데, 심지어 그는 인도네시아 바타비야까지 원정해 네덜란드 배를 공격하고 궤멸시켰다. 그의 이런 전설같은 이야기는 지금도 호주에서 회자된다고 한다. 한번은 그의 배가 네덜란들 배에 나포되었는데 그의 용맹에 감탄했었던 네덜란드인들이 그를 정중히 석방했다고 한다.

 

당시 아유타야 송탐 왕은 일본인들의 용맹함을 인정해 일본인들로만 이루어진 ‘일본용병대’를 창설하기도 했다. 야마다 나가마사는 송탐 왕의 전쟁에도 참가해 일본 깃발을 앞에 들고 300여명의 사무라이를 이끌고 나가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공로로 샴 최고의 직위를 받았다.

 

그는 송탐 왕의 사절단과 함께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고 마지막에는 왕위계승전쟁에서 연루되었는데 자기를 아껴준 송탐왕이 살해당하자 그 역시 충성을 지키다가 1630년 사약을 받고 죽는다.

​새롭게 권력을 장악한 프라사트 왕은 군대를 동원하여 일본인 거주지를 공격한다. 그러나 이미 많은 수의 일본인들은 크메르 왕국으로 도주하였다가 1633년에 다시 아유타야로 돌아오게 된다.

같이 보기

 

파타니 왕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파타니 왕국(말레이어: Kerajaan Patani 크라자안 파타니[*], 태국어: อาณาจักรปัตตานี 아나짝 빠따니[*])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말레이 반도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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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루가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o.wikipedia.org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임진왜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611년, 현재 일본 시즈오카 태생의 한 가마꾼이 무역선을 얻어타고 오늘날 태국인 아유타야 왕국으로 넘어갔다. 그는 그곳에 이미 존재했던 일본인 마을인 '방이푼(日本町)'에 있던 사무라이 수천명을 규합해 사무라이 용병대를 구성했고, 아유타야 왕국을 침범했던 에스파냐 군을 무찌른 뒤, 왕위 계승전에도 참전해 일약 영웅이 됐다.

이 입지전적이면서 국제적이었던 가마꾼의 이름은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로 오늘날 시즈오카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있으며 매해 9월에 태국과의 우호를 상징하는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이 축제에선 코끼리에 올라탄 사무라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정부가 해외에 가라고 돈을 줘도 무서워서 나가지 않는다는 폐쇄적인 현대 일본인들의 눈에도 희한한 그의 일대기는 지난 2010년 태국에서 '무사 야마다'라는 영화로 나오기도 했다.

 

사실 그의 일대기는 17세기 초 임진왜란 직후 사무라이들의 대량 해외이민과 연결돼있다. 그가 1611년 태국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일본인 정착촌에는 3000명에서 7000명 사이의 일본인들이 거주했다고 알려져있으며, 상당수가 크리스트교를 믿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들은 도대체 왜 수만리 떨어진 태국까지 흘러들어가 정착촌을 건설하고, 태국왕의 사무라이 용병단 노릇을 했던 것일까?

시즈오카시에 세워진 야마다 나가마사의 흉상 모습(사진=www.shizuoka-bunkazai.jp)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임진왜란 직후 일본의 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군은 1598년 11월, 전쟁의 원흉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사망과 함께 대거 패퇴, 조선에서 완전히 밀려나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또다른 거대한 내전이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분기점으로 본래 도요토미 히데요시 계열 영주들은 대부분 숙청당하거나 명목만 남게 됐으며, 그들 밑에 고용돼있던 사무라이들은 대거 실업자 신세가 됐다.

뒤이어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의 거성인 오사카를 포위, 섬멸시키는 오사카 전투가 끝난 후 또 한번 수많은 사무라이들이 숙청당했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변화와 도쿠가와 막부의 크리스트교 탄압이 겹쳐지면서 많은 사무라이들이 국외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당시까지는 일본이 완전히 쇄국무역으로 돌아서기 전 상황이었고, 동남아시아로 진출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의 교역도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무역선을 타고 동남아시아로 이동한 일본인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태국 뿐만 아니라 동남아 전역으로 흩어졌으며 네덜란드, 스페인, 영국 등 당시 동남아 일대 식민지 건설에 나섰던 서양세력의 용병으로 활약했다. 야마다 나가마사가 정착한 일본인 정착촌에는 수천명 규모의 용병대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이들은 동남아의 덥고 습한 환경과 밀림 속에서도 뛰어난 인내력과 전투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흑인이나 백인용병보다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야마다 나가마사의 일대기를 기념하는 일본 내 축제의 모습(http://shinjo-matsuri.jp)

야마다 나가마사의 경우 가마꾼으로 알려져있지만, 훗날 태국에서 보여준 전투에서의 활약상을 생각하면 단순한 가마꾼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출생연도는 모르지만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몰락한 사무라이 가문의 후손이거나 아니면 크리스트교를 믿다가 박해받은 가문의 일원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론 정권다툼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본을 탈출, 태국의 용병부대가 됐다는 점에선 그보다 먼저 태국에 도착한 일본인 정착촌 주민들과 같은 신세였을 것으로 보인다.

성공한 이민자로 끝날 것 같았던 그의 인생은 말년으로 흘러가면서 위기를 맞는다. 아유타야 왕국에선 점차 일본인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나가마사와 정착촌 주민들을 핍박하기 시작했고, 이에 그는 남은 사무라이 세력들을 이끌고 보르네오 섬에 새로운 정착촌을 만들던 도중 1630년, 현지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한편 그 사이 중국 대륙을 비롯한 동북아에는 새로운 외교 역학관계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기존의 중국을 지배하던 명 왕조가 1644년 무너지고, 청 왕조가 들어섰으며 도쿠가와 막부는 1637년 일본 내 크리스트교인들이 주축이 돼 일어난 것으로 알려진 시마바라의 난을 계기로 쇄국정책으로 돌아선다. 일본인들의 사사로운 해외 이민이 금지되면서 각지의 동남아 정착촌은 점점 세력을 잃고 사라지게 됐다. 이후 이들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에 의해 역사의 무덤에서 끄집어 올려져 새롭게 주목 받게 된다. 나가마사가 일본 내에서 유명하게 된 것도 그 이후부터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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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ada Nagamasa (山田 長政, 1590–1630) was a Japanese adventurer who gained considerable influence in the Ayutthaya Kingdom at the beginning of the 17th century and became the governor of Nakhon Si Thammarat province, which is on the Malay Peninsula in present-day Southern Thailand.

From 1617 until his death in 1630, Yamada Nagamasa was head of the Thai village referred to as Ban Yipun ('Japanese village') in the Thai language. This village was within the city of Ayutthaya (the capital city of the Ayutthaya Kingdom). Ban Yipun was home to roughly 1,000 Japanese citizens and was headed by a Japanese chief who was nominated by Ayutthayan authorities. Its inhabitants were a combination of traders, Christian converts who had fled their home country following the persecutions of Toyotomi Hideyoshi and Tokugawa Ieyasu and Rōnin (unemployed former samurai) who had been on the losing side at the battle of Sekigahara (1600) or the Siege of Osaka (1614–15). The Christian community seems to have been in the hundreds, as described by Padre António Francisco Cardim, who recounted having administered sacraments to around 400 Japanese Christians in 1627 in the city of Ayutthay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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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rly life[edit]

Yamada Nagamasa was born in Numazu, Shizuoka in 1590. He is said to have been a palanquin bearer for the lord of Numazu. He became involved in Japanese trade activities with Southeast Asia during the period of the Red seal ships and settled in the Ayutthaya Kingdom (modern-day Thailand) around 1612.

Career[edit]

Yamada Nagamasa is alleged to have carried on the business of a privateer from the period of 1620, attacking and plundering Dutch ships in and around Batavia (present-day Jakarta). Stories of Yamada burying his treasure on the east coast of Australia (and in particular, Magnetic Island off Townsville) persist but it is highly unlikely that Yamada would have ventured into that area as there were no trade routes in this region and the only ships to venture to this region were the ones blown off course during the summer storms. Furthermore, Yamada would have passed thousands of islands in the Torres Strait and Coral Sea and these would have provided safekeeping for any treasure and avoided a very long recovery voyage in the future.

The Ban Yipun colony was active in trade, particularly in the export of deer hide to Japan in exchange for Japanese silver and handicrafts (swords, lacquered boxes, high-quality papers). The Japanese were noted by the Dutch for challenging the trade monopoly of the Dutch East India Company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The colony also had an important military role in the Ayutthaya Kingdom.

Military involvement and lordship

 

The Japanese colony was highly valued for its military expertise, and was organized under a "Department of Japanese Volunteers" (Krom Asa Yipun) by the King of Ayutthaya.

In the space of 15 years, Yamada Nagamasa rose from the low Thai nobility rank of Khun to the senior of Ok-ya, his title becoming Ok-ya Senaphimuk (Thai : ออกญาเสนาภิมุข). He became the head of the Japanese colony, and in this position supported the military campaigns of King Songtham, at the head of a Japanese army flying the Japanese flag. He fought successfully, and was finally nominated Ligor (modern Nakhon Si Thammarat), in the southern peninsula in 1630, accompanied by 300 samurai.

Travels between Siam and Japan

 

Yamada Nagasama's fighting ship, 17th-century painting

 

After more than 12 years in Siam, Yamada Nagamasa went to Japan in 1624 on board one of his ships, where he sold a cargo of Siamese deer hide in Nagasaki. He stayed in Japan for three years, trying to obtain a Red Seal permit, but finally left in 1627, with the simple status of a foreign ship.

In 1626, Nagamasa offered a painting of one of his fighting ships to a temple of his hometown in Shizuoka. That painting was lost in a fire, but a copy of it remains to this day. It portrays a ship with Western-style rigging, 18 cannons, and sailors in samurai gear. He returned to Siam in 1627.

In 1628, one of his ships transporting rice from Ayutthaya to Malacca was arrested by a Dutch warship blockading the city. The ship was released once the identity of the owner became clear, since the Dutch knew that Yamada was held in great respect by the King of Siam, and they did not wish to enter into a diplomatic conflict. Yamada was also valued by the Dutch as a supplier of deer hide, and they invited him to trade more with Batavia. [2]

Death

In 1629, Yamada Nagamasa visited Japan with a delegation from King Songtham.

He soon travelled back to Siam, but became involved in a succession war following the death of the King Songtham by Prasat Thong. Prasat Thong had acted as "king-maker" before assuming the throne, by performing the double regicide of King Songtham's sons. Yamada or Okya Seniphimok, heard of the coup at Ayutthaya and rebelled. Prasat Thong had Praya Chaiya poison him in 1630, and then expelled the remaining Japanese.[3]

End of relations between Siam and Japan

Following Yamada's death in 1630, the new ruler and usurper king of Siam Prasat Thong (1630–1655) sent an army of 4,000 soldiers to destroy the Japanese settlement in Ayutthaya, but many Japanese managed to flee to the Khmer Kingdom. A few years later in 1633, returnees (300–400 Japanese) from Indochina were able to re-establish the Japanese settlement in Ayutthaya .

From 1634, the shōgun, informed of these troubles and what he perceived as attacks on his authority, refused to issue further Red Seal ship permits for Siam.

Desirous to renew trade, however, the king of Siam sent a trading ship and an embassy to Japan in 1636, but the embassies were rejected by the shogun, thus putting an end to direct relations between Japan and Siam. Japan was concomitantly closing itself to the world at that time, a period known as Sakoku.

The Dutch took advantage of the Japanese withdrawal, increasing their trade and offering naval support. Japan lost influence for 300 years after being expelled by Prasat Thong.[3]

Memorial

Yamada now rests in his hometown in the area of Otani. The remnants of the Japanese quarters in Ayutthuya are still visible to visitors, as well as a statue of Yamada in Siamese military uniform.

 

[정보] 책 -일본인 이야기. 1: 전쟁과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