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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인동 장씨 수난 사건]인동작변(仁同作變)

Bawoo 2020. 7. 25. 22:50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인동장씨와 인동작변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인동장씨와 인동작변

1800년 6월 정조가 갑자기 승하해 나라가 어수선할 무렵, 경상도 인동고을(현 구미시 인동)에서는 부사 이갑회가 부친 생일잔치를 벌이면서 지역 유력 사족인 인동장씨 장윤혁을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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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작변(仁同作變)

1800년 6월 28일에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인산(因山)이 이루어지지도 않았으나 당시 인동 부사였던 노론 무관 출신 이갑회(李甲會)는 풍악을 울리며 부친의 생일 잔치를 마련하였다. 이에 분개한 장윤종의 동생 장윤혁(張胤爀, 1734~1800)이 생일 잔치의 초청을 거절하자 부사 이갑회는 추석날 장윤혁의 후원에 소머리를 던져놓고는 인산 전에 소를 도축하였다는 혐의로 장윤혁의 가노(家奴)를 구금하였다. 그리고 항의하던 인동 장씨 일가와 군졸의 충돌이 있자 이갑회는 장씨 일가를 정조의 독살설에 연결시키면서 장씨 일가가 관아를 침범하여 무기와 군량을 탈취한 다음 서울로 진격하려고 한다는 혐의로 체포토록 하였다. 이에 장윤혁의 아들 장시경과 장시호 형제는 천생산으로 도망가서 낙수암에서 자살하였다. 일이 여기까지 이르자 이갑회는 경상 감사에게 장씨 형제들이 모반을 일으키려 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감사는 8월 29일에 중앙으로 보고하였으며, 중앙에서는 이서구를 안핵사로 선임하여 파견하였다. 9월 23일에 안핵사 이서구와 경상 감사는 모반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 사건으로 여헌 종손 장윤종은 유배지인 정읍에서 타계 하였고 장윤혁의 자손들은 변방으로 흩어 유배되었고 장윤종의 아들과 조카(장윤문의 아들)들은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만인 1810년(순조10) 수감자 가운데 장윤종과 장윤문(張胤文)의 아들 형제가 석방되어 인동으로 돌아왔다.

 

2, 연미정 장석규에 대하여

 

장석규(張錫奎)의 자는 사운(師雲)이고 호는 연미정(戀美亭)이며 본관은 인동이다.

아버지는 시호(時皥)이며, 어머니는 분성 배씨(盆城裵氏)로 동환(東渙)의 딸이다.

경신년(1800) 죄에 연좌되어 옥중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누이와 함께 강진(康津)의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었다.

1808, 순조8)에 어머니와 누님이 밤에 진리(鎭吏 향리(鄕吏))가 돌연이 침입하여 겁탈하려 하자 모두 곧바로 바다에 달려가 몸을 던져 죽었다. 삼일 뒤 저녁에 모녀가 서로 끌어안은 채 죽은 시신이 바다에 떠서 밖으로 밀려나왔다.

 

당시 강진에 유배 생활을 하던 정약용은 이 사건을 글로 남겼는데

 

기사년(1809, 순조 9) 가을이었는데, 큰딸은 22세, 작은 딸은 14세, 사내애는 겨우 10여 세였다. 하루는 진영(鎭營)의 군졸 하나가 술에 취하여 돌아가다가 울타리 구멍으로 큰딸을 엿보고 유혹하는 말로 그를 꾀었는데, 이 뒤로 계속하여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비록 거절한다 해도 끝내는 나의 처가 될 것이다.”

 

하였다. 큰딸은 너무도 비분한 나머지 남몰래 항구(港口)로 나아가 조수를 바라보다가 푸른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어머니가 재빨리 그녀를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자 또한 푸른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7월 28일의 일이었다. 그때 작은딸이 따라 죽으려 하자 어머니가,

 

“너는 돌아가 관가에 알려 원수를 갚고, 또 네 동생을 길러야 한다.”

 

하였으므로, 이에 멈추고 뒤따르지 않았다.

 

돌아가서 보장(堡將)에게 알리니, 보장은 현(縣)에 그 말을 상신하였고, 현감(縣監) 이건식(李健植)은 검시(檢屍)한 뒤에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 이윽고 수일 후 해남수군사(海南水軍使) 권탁(權逴)이 장계(狀啓)를 올려 신지도(薪智島) 수장(守將)과 지방관인 강진현감을 아울러 파출(罷出)할 것을 청했는데, 이는 고례(故例)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파출당하게 된 건식은 곧 아전과 의논하여 천냥(千兩)을 비장(裨將)에게 뇌물로 주었다. 그러자 관찰사가 검안(檢案)을 현에 되돌려주고 장계는 수영(水營)으로 되돌려보냈다. 그래서 관(官)은 무사하게 되었고 그 군졸의 죄도 불문에 부쳐졌다.

 

이듬해 경오년(1810, 순조 10) 7월 28일 큰 바람이 남쪽에서 일어나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 바다에 이르자 파도가 은산(銀山)이나 설악(雪嶽)처럼 일었다. 물거품이 공중에 날아 소금비가 되어 산꼭대기까지 이르렀다. 해변의 곡식과 초목이 모두 소금에 젖어 말라죽어서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었다.

 

나는 다산(茶山)에 있으면서 염우부(鹽雨賦)를 지어 그 일을 기록하였다. 또 이듬해 그날도 바람의 재앙이 지난해와 같았다. 바닷가 백성들은 그 바람을 처녀풍(處女風)이라고 하였다. 그 뒤 암행어사(暗行御史) 홍대호(洪大浩)도 그 사연을 들었지만 역시 묵인하고 가버렸다.

라고 기록하였다.

 

9세에 고아가 된 장석규는 모친과 누님을 따라 죽으려 하다가 다시 생각하기를 “이몸이 살아 있어야 부모 조상의 원한을 설치 할 수 있고 어머니와 누님의 정렬을 세상에 있지 않겠는가 하고 또 마음속으로 다짐하기를 “글을 모르면 원통한 사실을 알릴 수 없고 재물이 없으면 원한을 풀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다” 하고 마을 서당에 에 가서 배움을 청했으나 죄인의 아들이라 하여 받아 주지 않자 문 밖에서 들으며 암송하고 의심나는 글은 손바닥에 적어 길을 지나는 선비들에게 물어 학문이 크게 이루어 졌고, 열심히 품팔이를 하여 모은 재물이 수천 금이 되었다.

 

40세에 낳은 아들 기원이 15세가 되자 서울로 보내면서 말하기를 “내 일생에 마음을 조리고 간장을 태워 매양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피눈물을 흘리며 살기를 50년이라 너는 아비의 뜻을 알고 천만 노력하라” 하였다.

 

기원이 서울로 가서 임금의 행차가 있을 때마다 격장을 치며 호소하기를 5여년 간 행하였다. 1861년(철종12) 마침내 국구 김문근이 그 지성에 감동하여 간곡하게 주달하여 사면의 명을 받게 되었다.

 

기원이 사면 공문을 가지고 돌아오니 장석규의 병이 이미 위중하였는데 아들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우리 집의 철천 원한을 이제 풀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나를 선조들이 잠들어 계시는 고향 땅에다 묻어 주기를 바란다”

하고 죽으니 섬사람들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아들이 유명에 따라 유해를 운구하여 선산 별현산에 안장하였다.

 

공에 대한 기록은 사미헌 장복추가 행장을 지었고 이조참판 운초 장인원이 묘지명을 형조판서 유헌 장석룡이 묘갈명을, 방산 허훈이 연미정 장공 전과 어머니 배씨전을 지어 효행 과 열행을 널리 알렸다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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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경은 여헌 장현광의 후손으로 인동부(지금의 구미·선산·칠곡)에 살았다. 1800년 6월 28일에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인산(因山)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인동부사였던 이갑회(李甲會)는 분위기 파악도 못했는지, 하필 이때 풍악을 울리면서 부친의 생신연을 마련하였다. 이에 분개한 장현경의 아버지 장시경(張時景)은 잔치에 초청을 받았으나, 국상 중에 예의에 어긋난다며 거절하였다. 이갑회는 이에 앙심을 품고 오히려 ‘장시경 형제가 정조 독살설을 유포해서 세력을 모아 서울로 진격, 노론벽파를 제거하려 한다’고 관찰사에게 고변을 했다. 졸지에 역모죄를 뒤집어 쓴 장씨 일가에 대한 대대적인 처벌이 이어졌고, 인동은 10월 도호부에서 현으로 강등되기까지 했다.



여유당전서. 정약용이 지었다. 이 책 ‘다산시문선’에 ‘기고금도장씨녀자사’란 제목으로 장씨 딸에 대한 내막이 적혀 있다.



이 사건으로 장현경의 처와 자식들이 1800년 8월에 고금도로 유배되었다. 유배를 온지 9년이 지난 1809년의 일이었다. 이때 큰딸은 스물두 살, 작은 딸은 열네 살, 사내애는 겨우 열 살이 되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진((鎭)이 있었는데, 하루는 진영의 군졸 한명이 술에 취해서 돌아가다가 울타리 구멍으로 큰딸을 엿보고 유혹하기 시작했다. 큰 딸은 아예 상대도 하지 않았으나, 군졸의 추태 행위는 계속되었다. 군졸은 ‘네가 아무리 거절해봤자 끝내는 내 여자가 될 것’이라며 겁을 줬다. 분을 참지 못한 큰 딸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가 곧바로 바닷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소식을 들은 그의 어미도 바다에 투신했다. 이를 보고 둘째 딸도 물에 뛰어들려고 했으나, 어미가 “너는 살아서 관가에 가 이 사실을 알려 원수를 갚고, 또 네 동생을 길러야 한다”며 만류해 죽지는 않았다.

둘째 딸이 섬의 보장(堡將)에게 찾아가 자초지종을 알렸다. 보장은 이 사실을 강진현에 보고했고, 현감 이건식(李健植)이 현장에 나가 검시(檢屍)를 한 후 전라도관찰사에게 수사기록 일체를 넘겼다. 민심이 뒤끓고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해남 수군사(水軍使) 권탁(權逴)도 나섰다. 관찰사에게 고금도 수장(守將)과 강진현감을 파직시켜야 한다는 장계까지 올렸다. 갑자기 파직 위기에 처한 현감은 아전과 의논하여 비장(裨將 관찰사 수행비서)에게 돈 천 냥을 뇌물로 썼다. 그러자 관찰사가 검안(檢案) 서류 일체를 현에 되돌려주고, 수영(水營)에서 올린 장계도 되돌려보냈다. 현감은 끄떡없이 살아남았고 추행을 했던 군졸과 상관의 죄도 불문에 부쳐졌다. 사건이 사장(死藏)되어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이 섬에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다음해 7월 28일, 장씨 처와 큰 딸이 죽은 지 꼭 1년이 되는 기일(忌日)이었다. 큰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 바다에서는 은산(銀山)이나 설악(雪嶽)과도 같은 파도가 일었다. 바람에 파도의 물거품이 공중으로 올라가더니 산꼭대기까지 소금비를 뿌렸다. 염분을 맞은 곡식과 초목들은 모두 말라 죽어 섬 전체가 흉년이 들었다. 이듬해 같은 날도 바람의 재앙이 지난해와 같았다. 바닷가 백성들은 이 바람이 억울하게 죽은 장씨 딸의 원혼(冤魂)이라고 하여 ‘처녀풍(處女風)’이라고 불렀다. 얼마 후 암행어사로 홍대호(洪大浩)란 사람이 내려왔는데, 그도 이 기막힌 사연을 들었지만 역시 묵인하고 가버렸다.

다산 정약용은 이 사실을 강진 다산초당에 있을 때 전해들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진실을 파헤쳐 탐관오리들을 처벌할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없었던 것이다. 동병상련이랄까. 그는 조용히 ‘소금비(鹽雨)’란 시문(賦)을 짓고, 그 경위를 ‘고금도 장씨 딸에 대한 기사’란 제목으로 자세하게 남겼다. 그래서 다산 시문집에 그 전말이 전한다.



고금도. 참으로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도 해당 관리들이 그 억울함을 풀어주기는커녕 뇌물을 받고 사건을 없애버린 ‘고금도 장씨 여자 사건’의 현장이다.



다산은 이후 여성 유배인들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목민심서’에도 여성 유배인들에 대한 처우를 거론하고 있다. 유배지에서 이루어지는 점고(點考)가 문제였다. 유배인들은 달마다 두 번씩 삭망점고(朔望點考)를 받아야만 했다.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수령에게 가서 점검을 받았던 것이다. 이외에 수시로 받는 별점고(別點考)도 있었다. 질이 좋지 않은 수령은 이런 점고를 빙자해서 딴 마음을 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를 안 다산은 ‘여성 유배자의 거주지에는 남자들의 출입을 금하며, 여성 유배인이 점고를 받을 때는 얼굴을 가리고 관아에 들어오게 하고, 수령은 문을 닫아걸고 여자를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심문을 마친 뒤에는 관비를 시켜서 집에 호송하게 하고, 남자들이 주위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여, 여성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전도 그 이후도 다산의 이와 같은 권고가 받아들여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출처 : 경북매일(http://www.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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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책 -영남좌도 역사 산책(도서출판세종신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