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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부터 사할린 섬을 빼앗은 인물]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레자노프

Bawoo 2020. 8. 24. 22:52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레자노프(러시아어: 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Резанов, 1764년 3월 28일 - 1807년 3월 13일)

 

러시아의 무역상·외교가·행정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알래스카와 북태평양 지역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러시아아메리카회사를 설립했다(→ 러시아아메리카회사). 그는 북아메리카의 서해안지역을 러시아에 병합하고 이 지역에 러시아인의 대규모 이주를 장려하고자 했으나 그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는 그 계획을 거의 실현하지 못했다. 이것은 1867년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미국에 파는 실수를 초래한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

 

레자노프는 셸레크호프골리코프모피회사의 사원이었다가 1795년 사장이 되어 북아메리카 북서부 해안지역의 러시아 식민지에서 무역업을 했다. 1799년 그와 셸레크호프의 후계자 그리고리 1세는 황제 파벨을 설득하여 러시아아메리카회사에 면허장을 수여하도록 했다.

이 면허로 이 회사는 북위 55° 이북의 아메리카 해안지역과 알류산 열도 및 쿠릴 열도에서 20년간 독점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위탁은 우선 레자노프와 황실의 일원을 포함한 여러 다른 주주들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준 원천이 되었다.

레자노프는 러시아인 최초의 세계일주(1803~06)를 후원했으며, 아담 요한 쿠르센스테른이 지휘한 이 탐험대와 함께 브라쇼브로부터 서쪽으로 혼 곶을 돌아 캄차카 반도까지 항해했다. 1804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대사로서 일본을 방문했지만 방문성과는 없었다. 그는 이 회사 내의 폐단을 시정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아 북태평양 연안지역에 머물렀다.

이 회사의 식민지경영 중심지인 알래스카의 싯카(노보아르항겔스크 또는 뉴아르항젤)에서 1805~06년 겨울을 보냈다.

그후 그는 모피를 식량과 교환하는 방식을 통해 스페인 식민지로부터 지속적인 식량조달을 위한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의 스페인 식민지로 항해했다. 1806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그는 스페인 식민지의 대외무역이 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레자노프는 스페인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고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샌프란시스코 사령관의 딸[Concepción Argüello] 과 약혼하게 되었다.

 

María de la Concepción Marcela Argüello y Moraga (1791-1857)

* 레자노프 사후(1807년, 당시 16세)다른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냈다.

 

그는 제안된 조약 사본을 스페인으로 보내겠다는 스페인 총독 돈 호세 아르귀엘로의 약속을 받아 식량 1척분을 가득 싣고 싯카로 돌아왔다.

 

 

그는 캄차카에서 사업을 하면서, 배를 보내 사할린 섬을 일본으로부터 강제로 빼앗았다. 그뒤 스페인과의 조약을 알렉산드르 1세로부터 재가받기 위해 육로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출발했으나 시베리아의 한 도시에서 열병과 피로로 죽었다. 그가 구상한 조약은 결국 체결되지 못했다.[다음백과, 영어위키]

The Ryazanov Monument in Krasnoyarsk

 

[정보] 책 - 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메디치 WEA 총서 4):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