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
1757년에 인도의 플라시 지방에서 인도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영국 동인도 회사 군대와 프랑스의 벵골 토후(土侯) 사라지울라 웃다 연합군이 벌인 싸움. 영국이 승리하여 인도 지배의 발판을 만들었다.[The Battle of Plassey was a decisive victory of the British East India Company over the Nawab of Bengal and his French[1] allies on 23 June 1757, under the leadership of Robert Clive which was possible due to the defection of Mir Jafar Ali Khan, who was Siraj-ud-Daulah's commander in chief. The battle helped the Company seize control of Bengal. Over the next hundred years, they seized control of most of the entire Indian subcontinent, Myanmar, and Afghanistan. ]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
Clive meeting with Mir Jafar after the Battle of Plassey, oil on canvas (Francis Hayman, c. 1762)
18세기 후반 인도의 일부 지역은 영국의 영향권 아래 놓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특히 영국 동인도 회사는 벵골 지역에서 밀무역을 행하여 그 지역의 경제 질서를 어지럽혔다. 이를 간파한 당시 벵골 태수 웃다울라는 영국의 부당 행위에 항의했고, 영국인들을 콜카타에서 추방했다. 그 결과 1757년 6월에 콜카타 북서쪽에 위치한 플라시에서 영국군과 인도의 벵골이 군사적 충돌하였는데, 이를 플라시 전투라고 한다.
플라시 전투는 클라이브가 이끄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합세한 벵골 태수 군대와의 전투로, 처음에는 벵골 태수의 군대가 우세했다. 하지만 벵골의 부대장들이 영국에 매수되어 전세는 곧 영국 쪽으로 기울었다. 또한, 벵골 태수 자신도 배신한 부하에게 잡혀 처형당했다. 이로써 영국의 인도 전역의 식민지화는 더욱 구체화되었다.[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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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가 물러난 후 영국 동인도 회사는 무굴 제국의 상업권을 두고 프랑스와 경쟁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보다 더 많은 인구와 상권을 자신의 세력에 편입시켰고, 벵골을 중심으로 무굴 제국 전체를 통치하고자 했다. 이는 영국과 무굴 제국이 손을 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프랑스가 무굴 제국 변방의 주요 왕국을 동맹 관계로 성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그 지역의 토후와 벵골의 태수 정규군과 연합하여 영국군을 격파하려고 하였다. 영국군은 네덜란드와 무굴 제국과 연합하여 프랑스를 고립시키려고 하였다. 벵골 태수 웃다울라는 영국 동인도 회사와 그 직원의 밀무역이 벵골의 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주고 있다고 항의하고, 영국인들을 캘커타 시에서 추방하여 양군은 충돌하게 되었다.
1757년, 영국의 로버트 클라이브 장군은 3,000명의 군대로 벵골로 진격하였다. 그리고 6월, 벵골의 플라시에서 소수의 프랑스군을 포함하는 태수군과 전투를 벌였다. 병력은 태수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으나, 부장들이 영국측에 매수되었기 때문에 참패를 당하고, 태수 자신도 배신한 미르 자파르의 아들에 잡혀 처형당하였다. 이후 미르 자파르가 벵골의 태수가 되었으나 그는 영국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고, 이로써 영국은 벵골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인도 전토의 식민지화를 위한 침략의 교두보로 삼았다.[과목별 학습백과 세계사 고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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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자료 보기]
2017.10.21
그나마도 대부분이 인도인 현지 용병인 세포이였다. 두 군대는 1757년 플라시라는 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표면상으로는 병력이 훨씬 우세한 벵골 태수측의 압도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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