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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인도 벵골의 초대총독]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

Bawoo 2020. 11. 24. 21:35

Lord Clive in military uniform. The Battle of Plassey is shown behind him.
By Nathaniel Dance.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Robert Clive[로버트 클라이브]

 

벵골의 초대 영국 행정관을 지냈다.

인도에 영국의 세력을 처음으로 구축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벵골 총독으로서의 첫번째 임기중(1755~60) 플라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벵골의 명실상부한 일인자가 되었으며, 2번째 임기중(1764~67)에는 벵골 식민지를 재정립했다(대영제국). 18세가 되던 1743년 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로 파견되어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근무했다.

까다로운 성미인 그는 걸핏하면 시비를 걸었으며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고, 한번은 결투를 벌이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총독의 도서관에서 위안을 얻었는데 바로 여기서 실제적인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영국 동인도회사와 프랑스 동인도회사 간의 반목이 심화되고 양측이 인도의 각 군주들을 경쟁적으로 지원함에 따라 클라이브는 군에 입대했으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클라이브는 게릴라 전술의 뛰어난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1749년 병참장교로 임명된 후 1753년 3월 자신의 신부 마거릿 매스컬라인과 함께 상당한 재산을 지니고 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를 떠났다. 1755년 의회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후 다시 인도로 떠났다(인도사).

1756년 6월 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에 도착한 후 곧 벵골 문제에 관여하게 되었는데 이후 그의 운명은 줄곧 벵골 문제와 이어졌다.

그때까지 벵골은 명목상의 존재인 무굴 제국 황제의 태수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으며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이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무역을 수행했다. 대표적 도시인 캘커타(지금의 콜카타)는 무역 중심지로서 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와 경쟁관계에 있었으며 캘커타(지금의 콜카타)에서 이루어지는 통상은 인도에서 가장 값진 것이었다. 1756년 이 도시를 요새로 만드는 문제를 둘러싸고 영국측과 분쟁이 일자 새로이 벵골의 나와브(무굴 제국의 태수)가 된 시라지 웃 다울라가 캘커타(지금의 콜카타)의 성채를 공격·점령했다(무굴왕조). 1756년 8월 캘커타(지금의 콜카타) 함락소식이 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에 전해졌다.

잠시 지체한 후 클라이브는 캘커타(지금의 콜카타)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이 원정에서 승리함으로써 클라이브는 사실상 벵골의 주인이 되었다. 벵골 총독 첫 임기는 1760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행정분야의 업적

클라이브가 정치가로서 명성을 얻은 주요원인은 벵골 총독으로 2번째 임기에 이룩한 업적에 있다.

이 업적은 3가지 부문, 즉 대외정책에서 거둔 성과, 벵골 지역에서의 정착사업, 동인도회사의 개혁이었다. 대외정책을 통해 그는 정치가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그것은 바로 어느 정도에서 자제해야 하는가를 아는 것이었다. 샤 알람 2세를 델리에 복귀시키고 인도 북부를 그의 이름으로 통치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클라이브는 현명한 판단을 내려 벵골과 비하르에 대한 동인도회사의 간섭에 제한을 두었다.

영국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

영국 동인도회사의 행정관인 클라이브와 무굴 황제 샤 알람2세의 모습

ⓒ -revi / wikipedia | Public Domain

 

오우드를 시라지 웃 다울라에게 반환하여 벵골과 소요가 끊이지 않은 북서부지역의 완충지대로 삼았다. 매년 공물을 바침으로써 무굴 제국의 황제를 무마했으며 대신 벵골 정부의 세수(稅收) 관할부처(데와네)를 동인도회사에 넘겨주었는데, 이같은 양도는 클라이브의 2번째 업적, 즉 벵골 정착사업의 기조가 되었다.

이로써 동인도회사는 벵골과 비하르에 대한 합법적 징세권을 갖게 되었으며 황제에게는 매년 공물만을 보내면 되었다. 데와네는 동인도회사가 임명하는 나와브의 대리인으로 구성되었다. 벵골의 나와브는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여전히 치안행정권을 행사하고 있었으나 동인도회사의 대리인을 지명해 자신의 일을 대신하도록 했다. 이를 이른바 클라이브의 이중체제라고 하는데 이 체제는 동인도회사를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2개 주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만들었다.

클라이브의 3번째 업적은 동인도회사를 개혁한 것이다. 인도에 도착한 지 2일 만에 그는 캘커타(지금의 콜카타) 평의회를 새로이 교체했는데 이 평의회는 그의 전임자인 헨리 밴시터트를 얕잡아보고는 했었다. 클라이브는 모든 평의원들의 사표를 수리하고 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에서 새로운 인물을 영입해 면모를 일신함으로써 기강을 확립했다.

회사의 모든 직원은 총독의 승인 없이 1,000루피가 넘는 값어치의 선물을 받지 않는다는 서약서에 서명해야 했다. 지나치게 성행함으로써 전쟁까지 야기했던 사무역(私貿易)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사무역 금지조치는 회사직원들의 급료가 충분치 못한데다 그밖에 달리 생계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클라이브는 소금전매권을 관장하는 무역회사를 세우고 직원들에게 직급에 따라 주식을 배당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다.

이러한 조치는 단지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는 데 그쳤지만 거의 10년 동안 벵골에서 무모하게 자행되었던 횡령과 부정이 사라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끝으로 클라이브는 다른 부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군대문제를 다루었다. 지나치게 팽창한 군인들의 급여를 삭감했으며 불만을 품은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불굴의 용기를 갖고 한때 거의 단독으로 이에 맞섰다.

1767년 1월 그는 캘커타(지금의 콜카타)를 떠났다.

그의 2번째 총독 임기는 대단한 업적을 이룩한 때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많은 적을 만들어냈다. 채텀 경이 지원하는 적극적인 그룹은 인도에서 부(富)가 유입됨으로써 영국의 공공생활에 나쁜 영향이 미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1772년 파산의 위기에 처한 동인도회사가 영국정부에 구조를 요청하자 클라이브가 구축해놓은 벵골의 정부체제가 기대했던 것만큼 탄탄하지 않은 것으로 비쳐졌다. 의회의 2개 위원회는 동인도회사 직원들 사이의 부정을 발견했으며 이에 따라 클라이브는 부정을 총괄적으로 꾸민 인물로 공격을 받게 되었다.

1773년 그는 의회에서 힘 있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을 변호했다. 양떼 도둑과 같이 취급받는 것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면서 "나의 자제심이 놀라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그해에 의회는 클라이브의 활약이 영국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다고 천명했다. 이러한 승리는 그의 생애에 마지막 영광이었다. 그는 이미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으며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1774년 11월 런던의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탁월한 재능을 지녔으며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 비해 절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룩한 업적은 인도에 대한 영국 식민지 지배의 진정한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다음백과]

 

 

A statue of Clive stands tall in Shrewsbury Square

 

[정보] 책 - 무역의 세계사(양장본 HardCover):윌리엄 번스타인 지음 연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