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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법 폐지를 주도하여 자유무역 시대를 연 인물]Richard Cobden

Bawoo 2020. 11. 23. 22:18

세세계경제를 바꾼

                                                                    Richard Cobden사건들 (7) 곡물법 폐지(1846)를 위한 투쟁에서 승리했고 자유무역을 옹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Richard Cobden (3 June 1804 – 2 April 1865) was an English manufacturer, Radical and Liberal MP, associated with two major free trade campaigns, the Anti-Corn Law League and the Cobden–Chevalier Treaty.

 

가난한 농부 집안의 11남매 가운데 4번째 아이로 태어나 친척들 손에서 자라난 그는 이류 기숙학교에 다닌 뒤, 런던에 있는 삼촌의 상점에 들어갔다.

1828년에 2명의 젊은이와 함께 직물도매상을 차렸고, 1831년에는 공업지역인 랭커셔에 직물 염색공장을 세웠다. 그는 해외 여행을 할 수 있을 만큼 돈을 벌자, 1833~39년에 프랑스·독일·스위스·미국·중동지방을 여행했다. 이 시기에 그는 큰 영향을 미친 2권의 소책자 〈잉글랜드·아일랜드·미국 England, Ireland, and America〉(1835)·〈러시아 Russia〉(1836)를 썼다.

여기서 그는 대외정책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제시했는데, 그가 제시한 정책의 기초는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데 있지 않고, 사람과 물자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해 국제적인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근본적인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는 평생 이같은 자유무역론을 계속 전개했다.

1839~46년에 그는 영국 정계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어, 곡물법 폐지를 위해 전력을 쏟았다.

그는 조직자로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해 반(反)곡물법 연맹을 결성했다 1839년에 전국 규모의 조직이 된 이 연맹은 19세기 영국의 압력단체 가운데 가장 효율적이며 성공적인 조직이었다. 그는 웨일스의 처녀 캐서린 윌리엄스와 결혼한 지 1년 뒤인 1841년에 하원의원이 되었다. 그후 그는 여론을 주도하며 로버트 총리와 직접 토론하는 방법으로 정치운동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필 총리는 1846년에 곡물법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는데, 그가 이처럼 태도를 바꾸어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중대한 결단을 내리게 된 데에는 코브던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

7년 동안의 투쟁으로 코브던은 명성을 확립했지만, 경제적으로는 파산했다. 그러자 1847년에 그를 위한 공개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그는 여기서 모인 돈의 일부로 고향 서식스에 집을 사고, 평생 그 집에서 아내와 5명의 딸(외아들은 1856년에 갑작스럽게 죽었음)과 함께 살았다.

그와 견해를 같이하는 대부분의 급진주의자들과는 달리, 그는 잉글랜드 남부 출신이었다. 한편 대부분의 급진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비국교도가 아닌 영국국교회 신자였다. 그러나 그는 퀘이커교도인 존 브라이트와 함께 이른바 맨체스터 학파 운동의 공인된 지도자였다. 이들은 정부의 간섭이 없는 경제체제와 자유무역을 옹호했다. 그는 1847~57년에 요크셔 주 웨스트라이딩 대표로 하원에 진출했고, 1859년부터 죽을 때까지는 존 브라이트의 고향인 로치데일 대표로 하원의석을 차지했다.

그와 브라이트의 관계는 밀접했다.

그들은 자유무역이 군비 축소를 초래해 국제 평화를 증진하리라고 믿었다. 그들은 또한 세금 감면과 제국주의적 팽창에 대한 제재를 요구하는 점에서도 의견이 일치했다. 코브던이 쓴 가장 설득력 있는 소책자 가운데 하나인 〈세 통의 편지에 담긴 1793~1853년 1793 and 1853, in Three Letters〉(1853)은 '과거의 잘못'을 피해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지 말자고 동시대인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그후 3년 동안 크림 전쟁이 시작된 뒤에도 그는 영국이 러시아와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림 전쟁 때 그는 이런 견해 때문에 신랄한 공격을 받았고, 그와 브라이트는 호전적인 여론 앞에 단둘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1857년에 그는 하원의 모든 정파 의원들을 규합해, 파머스턴 총리의 공격적인 중국 정책을 비난하는 동의안을 가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뒤에 실시된 총선에서 파머스턴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고, 코브던은 의석을 잃었다. 1860년대초에 정치적 소강상태가 게속되고 사람들이 정치개혁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자, 그는 초조감에 사로잡혔다.

19세기 영국인들 가운데 코브던보다 더 미국의 장래를 확신한 사람은 없었다. 그가 노예제도 폐지를 지지하는 미국 정치가 찰스 섬너와 나눈 편지는 영국과 미국 사이에 이루어진 중요한 비공식 접촉이었다. 그가 말년에 성공을 거둔 가장 중요한 활동은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시도였다. 파머스턴은 코브던과 정치적 견해가 달랐지만, 1859년에 연립내각을 구성할 때 상무장관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코브던은 이 제의를 거절했지만, 1860년에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맺기 위해 끈질기게 애썼다. 이 조약에 포함된 '최혜국 조항', 즉 어느 쪽도 상대국에 대해 다른 나라에 적용되지 않는 수입이나 수출 금지 조치를 시행할 수 없다는 조항은 그후 다른 나라들과 맺은 수많은 협정에도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코브던은 자유무역에 대한 그의 소망이 퇴색하는 것을 보기 전에 죽었지만 그의 원칙을 영속시키기 위해 창설된 코브던 클럽은 이 소망을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질질 끄는 영국·프랑스 협상의 긴장으로 건강을 해친 그는 여러 달 동안 런던을 떠나 있어야 했다. 1865년에 그는 새로운 국방비 지출에 반대표를 던지러 의회의사당에 가기 위해 병석에서 벗어나려고 마지막 안간힘을 쓰다가 죽었다.곡물[다음백과]

 

[정보]책- 무역의 세계사(양장본 HardCover):윌리엄 번스타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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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내용 보기-한국경제]

 

[세계 경제사] 애덤 스미스에 동조한 영국 귀족…자유무역 시대를 열다

 

세계경제를 바꾼 사건들 (7) 곡물법 폐지

1815년 영국에 도입된 곡물법
수입 곡물에 높은 관세 부과
보호정책 어리석음 지적하며 反 곡물법 운동에 결국 폐지)


美, 유럽국가와 상업협정 맺어 기계 수출로 산업화도 촉진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곡물법(Corn Law)은 1815년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외국의 값싼 곡물 수입으로부터 자국 곡물 생산자를 보호하기 위해 도입됐다가 1846년 폐지됐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곡물법에 따라 여러 종류의 수입 곡물에 대해 높은 관세를 부과했다. 정치적으로 강력한 힘을 지녔던 지주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곡물 소비자들의 이익을 희생시킨 특권적 법률이었다. 그런 점에서 곡물법 폐지는 자유(무역)주의의 승리를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1839년 반(反) 곡물법 동맹이 영국 맨체스터의 방직업자 리처드 코브던, 퀘이커 교도인 존 브라이트의 주도로 결성됐다. 이들은 ‘보호’정책의 어리석음을 밝히고, 국제적 거래 자유와 곡물법 폐지를 요구하며 자신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선거 후보자들을 지지하는 운동에 나선다. 코브던도 이런 운동 덕분에 의원으로 당선돼 당시 토리당을 이끌며 곡물법을 지키는 선봉이었던 로버트 필 총리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필은 자유무역의 일반적 원칙들을 수용했지만 농업은 예외라고 보았다. 곡물시장의 개방은 상업적 이익을 넘어서는 사회적 불안을 창출하며, 곡물법 아래에서도 영국의 제조업은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코브던은 1845년 무렵부터 곡물법이 농부와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폐해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곡물법 아래서는 농지를 개량해도 지대 인상으로 끝난다. 농지개량이나 투자의욕이 사라져 저생산성과 빈곤이 만연한다. 도시의 노동자들도 높은 곡물가격으로 살기 힘들다. 곡물법 폐지가 임금을 올릴 것이다. 토리당은 봉건적 특권을 포기하라.”  

고전학파의 임금철칙설을 믿었던 필은 곡물가격 하락이 임금도 낮출 것이라고 보았지만 코브던의 주장에 동의하게 되면서 자유무역이 반드시 임금 인하로 귀결되지는 않음을 인정했다. 필은 결국 곡물법 폐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바꾸었고 이에 따라 토리당의 분열을 가져왔지만, 필을 따르던 귀족-지주의 대다수가 곡물법 폐지에 찬성 투표함으로써 곡물법은 1846년 마침내 폐지됐다. 곡물법 폐지는 흔히 영국에서 지주-귀족 계급이 몰락하고, 신흥 부르주아지가 의회 진출을 확대하면서 자신들의 이해를 추구한 결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곡물법 폐지를 애덤 스미스 등 자유무역 사상의 영향을 빼고서 설명하기는 어렵다. 코브던은 스미스의 자유무역 사상의 추종자였다.  

그럼 지주·귀족 출신 정치가들은 왜 자신들의 이해를 해치는 곡물법 폐지를 지지했을까.

 

우선 1832년의 1차 선거법 개정은 피선거권을 확대했지만 지주·귀족들의 정치적 권력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당시 영국 의회의 절대다수는 지주·귀족 출신이었다. 이들이 곡물법 유지에 따른 이해관계가 약화된 것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여전히 그들의 기득권은 농지에 있었다. 그런데 왜 이들 가운데 다수가 곡물법 폐지 결정에 찬성한 것인지는 사상적 동조를 빼면 설명할 수 없다.

필 총리가 아일랜드의 기근을 해결해야 하는 현실적 이유 때문에 곡물 수입이 필요해 곡물법 폐지로 돌아섰다는 설명도 있지만, 기근 해결을 위해서라면 왜 즉각 폐지하지 않고 3년에 걸쳐 서서히 폐지하는 정책을 택했는지 설명이 안된다. 더구나 필은 논리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코브던의 경우에도 그가 열렬한 스미스 찬미자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곡물법 폐지보다는 섬유업의 이해에 중요한 품목들의 관세인하를 시도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1846년 곡물법 폐지 이후 영국은 코브던의 활약 아래 전쟁 준비 소문 등의 악재를 극복하고 프랑스와 지금의 자유무역협정(FTA)격인 상업협정을 맺었다. 1870년 무렵엔 유럽 27개국과 유사한 협정을 마쳤다. 그 결과는 엄청났다. 이들 국가와의 교역은 10년 전인 1860년에 비해 총교역량이 82%(총수입은 86%, 총수출은 77%) 증가했다. 유럽 이외의 지역까지 고려한 영국의 총수입은 1850년 약 6000만파운드에서 20년 뒤 약 3억6000만파운드로 5배 이상 늘어났다. 1840년 5000만파운드 선이던 총수출은 1870년 2억5000만파운드로 4배 이상 증가했다. 당시는 금본위제여서 물가상승이나 하락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1874년 영국 가정의 식단에는 평균 매일 식빵 재료 2.5파운드, 0.75파운드의 설탕이 외국산이었고, 1주일마다 베이컨 0.8파운드, 버터 0.5파운드, 치즈 2.5파운드, 쌀 1파운드, 차 0.3파운드가 외국에서 실려 왔다. 인구는 1841년 이후 1870년대 초까지 17.5% 증가했지만, 빈곤율은 25% 이상 감소했다.

 

 

 

1849년엔 항해법이 폐지됐으며, 동인도회사 등 특허 회사들이 누리던 무역독점권뿐 아니라 거의 모든 관세가 폐지됐다. 그래서 당시 영국과 유럽에서 벌어진 엄청난 변화의 원인을 곡물법 폐지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고전적 자유주의자 스미스의 ‘자연적 자유의 간단한 시스템’을 국제무역에 적용해 거둔 놀라운 결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 곡물법 폐지 전후를 비교한 애시워스는 이렇게 말했다.

“종전에 겪던 굶주림은 소위 (국가의) ‘보호’로부터 비롯됐지만, 상업의 자유가 풍성한 식량과 고용을 가져다 주었다. 인류는 한 가족이며 서로의 평안을 위해 서로 필요하다.”[한 -김이석 < 시장경제제도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