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히키아게샤(일본어: 引揚者,ひきあげしゃ)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1945년 일본 제국의 패망까지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 만주, 대만 등에서 거주했다가 귀국한 일본인을 이르는 표현이다. 이들 중의 일부분은 해당 식민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녀들이다.
한국어 독음으론 인양자라고 읽는데, 한국어에서 인양이라는 표현은 침몰한 배 등을 끌어올릴 때로 한정해서 쓰는 말이다. 의미를 살려서 번역하자면 귀향자, 귀국자. 직설적으로 번역하자면 (몸을)빼 낸 사람 정도가 된다. 관동군이나 일본군으로 참전했다가 돌아온 일본인들은 엄밀히는 히키아게샤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들은 재향군인으로 분류되는데, 정작 관동군 중 상당수는 일본군이 해체되는 바람에 민간인 자격으로 귀국한 사람도 굉장히 많았다. 아니면 소련군한테 잡히지 않으려고 민간인 행세를 했거나.
2. 숫자
제국주의를 내건 일본은 많은 아시아 국가를 침공해 식민지로 삼았다. 이를 겸해 일본 내부의 빈곤 문제나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인들을 이민보냈다. 이렇게 넘어간 해외 체류 일본인들의 숫자는 패전 당시에 230만 명에 이르렀다. 이는 군인을 제외한 숫자다. 만주국이나 중국에 약 110만 명 이상, 사할린에 약 38만 명, 대만에 32만 명, 북아메리카에 30만 명, 남아메리카에 20만명, 조선에 69만 명 수준이었다.[1] 당시 일본 본토의 인구가 1945년 즈음 7천만 정도였다.
이 중에 북미나 남미에 있던 사람들이 귀국하진 않았다. 현재 일본계 남미인들은 그 수가 불어, 브라질에서는 일본계 브라질인이 100만명을 넘었다. 페루에선 알베르토 후지모리 같은 일본계 대통령도 나왔고... 애당초 이들은 해당 국가의 시민권자로서 합법적으로 이주해 거주하고 동화되었고, 여기서는 '식민지로 삼았던 지역에서 귀국한 자'들을 다룬다.
이들은 한탕 해보자는 생각이나 본토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서 식민지로 넘어온 사람들이나 당시 제국주의에 협조하던 일본 대기업들의 회사원이나 그 가족들로 구성됐다. 군인의 가족으로 넘어온 사람도 많았다.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 속 부관연락선[2]에 탑승한 일본인들도 바로 이런 자들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한반도의 경우는 1910년대까지는 거의 상인들과 주재원[3]의 가족 위주였으나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반 농민, 노동자와 식솔들도 많이 넘어온다. 특히 일본의 만주 침공이 가속화되면서는 식민지 정착민이 일종의 붐이 될 정도였는데, 일제가 정착민들에게 땅을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땅은 1911년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이른바 토지조사사업 및 동양 척식 주식회사 등을 통해 조선인들에게서 부당하게 빼앗은 것이었다.
"자네가 가겠다면 나도 가겠네. 흔들리는 일본에선 그만 살겠네..."
사회파 SF소설가로 유명한 고마쓰 사쿄의 일본침몰에 인용된, 1930년대 당시 구전 유행가.
이들 중 초기에 넘어온 일부는 조선에서 큰 상인이나 지주가 되어 소득을 누렸지만 1930년대에 넘어온 계층은 그렇지 못했다. 식민지도 이미 선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끼리 경쟁하고 있던 상황이라 이들은 소상공인 등이 되어 일본인이 많은 도시에 거주했다.
문제는 1945년에 일본이 연합군에게 패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들이 독립했고, 이들은 공식적으로 불법점거자가 되어버렸단 것이다.
4. 한국의 히키아게샤
한국에서는 이때 남은 일본인들의 땅이나 거주지(적산가옥)나 재산(적산)등은 전부 몰수되어 신한공사 등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불하되었다. 1950년대~1960년대 일본에서는 이 때 몰수된 재산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정치인들의 발언이 몇 번 있었고, 반대로 한국에서는 일제 식민지배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기에 후일 이런 걸 다 퉁치기로 하고 한일기본조약을 맺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그 외에 일본인들이 급하게 떠나느라 남겼지만 재산이 되지 못할만한 것들은 그냥 방치되거나 6.25 전쟁통에 대부분 훼손되었다. 가령 부산광역시의 아미동 비석마을은 바로 일본인 공동묘지 자리 위에 6.25 전쟁 피난민촌이 형성되어, 일본인들의 비석을 마을 계단, 건물 부재 등으로 사용하였다. 지금도 비석마을에 가면 쇼와 몇 년에 누가 죽었다 같은 일본어가 쓰여진 비석이 계단으로 쓰이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히키아게샤들은 당연히 일본으로 귀환해야 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1945년 일본 정부는 항복하여 실질적으로 GHQ의 하부 기관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이들 히키아게샤들의 귀환에서 일본 정부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4] 상당수의 민간인들이 자력으로 일본으로 복귀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식민지배를 받던 피식민지 사람들의 린치나 소련 점령군들의 약탈, 강간이 일부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원래 북한에 거주하던 이들이나 중국/만주에서 피난하다 북한에서 발이 묶인 히키아게샤들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는데, 미군정 아래에서 안전히 철수한 남한 지역[5]과는 달리 이들은 소군정의 송환이 지연되면서 집단거주지에서 영양실조, 감염병 등으로 수천명이 사망했으며, 이를 견디지 못하고 자력으로 38선을 넘어 탈출한 이들 가운데서도 귀환 과정의 굶주림, 피로, 추위를 견디지 못한 사망자가 다수 발생했다.
한국에 체류했던 히키아게샤도 당연히 있는데, 이들은 거의 대부분 무사히 철수했다. 한국이 일제강점기 와중에 겪은 일들을 감안하면, 이들이 집결한 곳이 부산 용두산공원 등 치안력이 유지되는 도시나 행정 소재지였기에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다. 태평양전쟁 말미에 패전이 가까워 보이자 건국연맹 등과 조선총독부의 밀교섭으로 다수의 일본군과 히키아게샤가 안전히 철수할 수 있었다는 야사가 있다. 시골일 경우 히키아게샤 대다수가 지주와 그 하수인들이었기 때문에 보복 행위가 심했다고 하고, 일본과 가까운 경상도 지방의 보복이 가장 심했다고 전해진다.
이 중에는 한국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들도 많았고, 아예 일본인 이주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이루고 본적을 한국으로 둔 사람들도 있었는데, 패전 후 철수하게 되면서 그 마을은 사라졌고, 그들의 본적은 문서상에만 존재하는 곳이 되었다. 관련된 다큐멘터리도 국내에서 방송된 적이 있으며, 그 마을 출신자들도 고령이지만 아직 일본에 있다. 불이촌(不二村)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곳이었다. 일본어 독음으로는 후지촌이었다고 한다.
인터뷰에 출연한 그 마을 출신 노인이 말하길, 자신들은 그곳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일본으로 강제로 귀국할 때 자신들의 고향을 빼앗긴 마음이었고 억울한 생각도 있었지만, 후에 자신들의 고향인 그 마을 또한 조선인에게 부당하게 빼앗은 땅과 재산으로 이루어진 침탈의 결과라는 것을 알고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고 나온다.
그 외에도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이, 수십 년이 지난 현재 동창회가 열리면 일본에서부터 한국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역사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학교들을 보면 동창회 관련해서 가끔 목격담이 나오기도 하고, 일제강점기부터 쓰던 본관 건물을 새로 짓기로 하자 웬 양복 입은 구부정한 할아버지들이 찾아와서 쳐다보니 일본인이었다는 증언도 있을 정도. 일본인 졸업생들이 귀국 당시라며 보여준 사진을 보면,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이 양쪽으로 도열해서 서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사례는 마산고등학교 이야기인 듯.
물론 일본 본국으로 철수하지 않고 그대로 한국에 남아서 귀화해 한국 국적을 가지게 된 일본계 한국인도 소수 있다. 실제로 마산(현 창원시 마산합포구)의 깡통시장[6]에는 "일본영감"이라는 유명한(?) 히키아게샤가 1970년대까지도 생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핏줄이나 국적은 일본이지만 태어난 곳도 조선의 마산이고 일본에 연고도 없는 날품팔이 노동자라서 그냥 그대로 눌러앉았다고 한다. 또한 1960년대 한국에서 근무한 일본인 외교관의 수기에 따르면, 한일수교 후 한국인과 결혼했다가 사별한 일본인 여성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다고 나온다. 주한일본대사관에서는 그런 여성들을 찾아내서 귀국시키곤 했는데, 그들 중 몇몇은 오히려 일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그 마을에서 사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재한일본인 처들이 결성한 모임이 바로 부용회(芙蓉會)이다. 한때는 이 모임의 사람들이 약 4천~5천명에 달했다고 하나 지금은 90대 노인 분들만 남아 계시고 그들 대부분이 경주시의 나자레원에서 돌봄을 받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재한일본인 항목과 링크를 참조.
특히 조선(한반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히키아게샤는 한국인 입장에서 복잡미묘한 주제이다. 정작 이들은 일본에 돌아가서 조선에서 왔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차별을 당했다고 한다.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만 17살에 일본으로 귀국한 일본인 여성은 수기에서 밝히길 자신이 노인이 될 때까지 일본에서 살아도 자신을 키워준 조선인 유모들과 대구의 풍경을 평생 잊지 못하고 실향민[7]이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으며, 자신의 남동생은 일본으로 이주한 이후 갑자기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자살했다고 하였다.
그런 인식이 이들의 문학이나 미디어에서도 드러나고 있어 동정심이 들기는 하지만, 한편 이들이 식민지배의 한 축을 담당했던 식민자(colonizer)들임을 고려하면 마냥 동정적으로 바라보기는 어려운 존재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이들에 대해 다룬 책으로는 《조선을 떠나며》가 있다. 이 책의 저자 이연식은 이후 학술대회에서 재조일본인은 '조선반도는 원래 일본 땅'인 줄 아는 등, 자신들이 식민자라는 자각조차 없었기 때문에[8] 일본에서 히키아게샤 귀환담의 수용이 피해자 의식에 기초하고 있다고 발표했다.(기사1, 기사2, 기사3)
5. 중국의 히키아게샤
중국 쪽에선 그냥 중국인 행세를 하며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식을 알던 중국인에게 맡기고 나중에 데리러 돌아오겠다고 했다고도 한다. 이런 식으로 중국에 잔류한 일본인 고아가 2천 7백명에 이를 정도였고, 중국인과 결혼한 일본인들도 그냥 남았다. 그 숫자도 4천명 정도 됐다고 한다. 그 외에 그냥 중국인 행세하고 남은 일본인은 더 있을 걸로 보인다. 남은 일본인들 중 일부는 문화대혁명 때 조리돌림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1970년대에 중일수교가 복구되면서 일본 정부는 이들을 일본으로 귀국하도록 시도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자기가 일본인인지도 몰랐고 90% 정도는 일본어도 몰랐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과 혈연 관계가 있으면 영주권을 주는 법률에 의해 한 사람의 일본인과 친척 관계를 맺은 수십 명의 중국인들이 넘어오는 일도 있었다. 짐작한 대로 이들은 차별당했고 일부는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기도 했다. 일본어판 위키에 따르면 이들의 2세, 3세가 일본에서 야쿠자가 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하는 걸 보면 가이진(外人) 인식은 완전히 불식되지 않은 듯하다.
일본인 3,000명이 국부군 및 홍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도 있었다. 여기에 조선인민의용군이 개입되어 있다는 의혹도 있다.
6. 일본으로 돌아간 히키아게샤
하여튼 식민 지배에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 입장에선 가해자였지만, 정작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가서 식민지에서 살다 왔고 일본어와 일본 문화에 서투르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차별을 당했다. 패전 직후에 일본에선 일본 제국주의를 연상시키는 이들 히키아게샤에 대한 언급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차별에는 히키아게샤들의 출신이 하류층이었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제는 자국 내의 가난한 사람들이나 빈농, 부락민들을 모아 집단 이민단을 내보내곤 했다. 그러니까 히키아게샤들은 이미 당시 일본에 있을 때부터 하층민이었으므로, 귀국 후라고 해서 그 대우가 달라질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10] 당장 조선을 떠나며란 책에서도 이들이 귀국한 뒤 겪어야 했던 실상들이 상세히 적혀 있다. 이들의 경험이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수기문학이 한동안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하층민이었던 이들 이주자들은, 식민지로 나가서는 현지인들을 핍박하며 수탈하는 일제 침탈의 첨병 노릇을 하며 특권을 누렸다.
또한 어릴 때부터 장기간 식민지에 체류하며 성장한 경우에는 그 나라에 문화적으로 동화된 상태라서 귀국 후에도 문화적 차이 등으로 인해 차별 대우를 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 때문인지 현재까지도 일본 대학에서는 입시 때 히키아게샤와 그 자손에 대한 특별전형을 실시한다.
일본 현지에서도 한동안 언급을 기피했던 점을 볼 때, 해외에서 이들을 다룬 문헌이나 연구는 극히 드물다.
군만두가 만주계 히키아게샤들이 가지고 들어온 문화라는 설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군만두는 일본 음식치고 별나게 마늘이 들어가서 '군만두를 먹으면 입에서 마늘 냄새가 심하게 난다'는 인식이 강한데, 정작 중국 쪽 만두 문화에는 마늘을 안 넣는다(...). 찐만두를 재차 기름에 튀기듯 굽는 방식이나 마늘을 넣는 방식이나 만주계 히키아게샤들을 가교 삼아 일본에 정착하게 된 스타일.
명란젓도 부산에 살던 일본인이 일본에 돌아가서 전파한 음식 중 하나이다.
일본의 나리타 국제공항과도 관련되어 있다. 알박기 문서와 나리타 국제공항/건설 역사 문서 참고.
7. 실존 인물
7.1. 한국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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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타 유타카(成田豊, 1929-2011) - 일본 최대의 광고 기업인 덴츠의 전 회장으로 천안 출신이다. 다만 사람들에게 천안이 어딘지 설명하기가 귀찮아서 서울 출신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자란 배경 탓인지 한일관계 개선에 신경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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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시마 다케오(富島健夫,1931.10.25~1998.2.5) - 일본의 소설가. 그 유명한 <여인추억>의 작가다. 조선 경성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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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토시카즈(前田利一, 1921-2002) - 일본의 외교관. 인천 출신으로 조선총독부 부설 경성중학교[11]와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한일기본조약 당시 오히라 마사요시의 통역관이었고, 1981년부터 84년까지 주한일본대사를 지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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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바야시 치토세 (小林千登勢, 1937~2003) - 배우로 경성 출생. 자전소설인 별님의 레일이 1993년에 애니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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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이 히데토(藤井秀人(가명) 1930? ~ ?)[13] - 1945년 해방 당시 가족과 함께 춘천에 살고 있던 일본인으로, 일본으로 돌아갈 길이 끊겨서 '일본에서 막 귀국한 한국인' 행세를 하면서 연명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6.25 전쟁 때 인민군으로 징집되었다가 전투에서 낙오되어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일본인이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대신 1953년 6월에 반공포로로 석방되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수용소에서 풀려나와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부산역으로 가는 도중에 병역기피자들을 색출하는 체포조에게 체포되어 다시 국군에 강제입영되었다(...). 이 전후 사정을 받아들인 당시 대한민국 외무부에서 귀국허가를 함으로써 그를 근거로 1955년 10월에 제대하여 1956년 2월에야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7.2. 중국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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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후네 토시로(三船敏郎, 1920-1997) - 일본의 유명 영화 배우. 중국 칭다오에서 사진 기사인 일본인 부부 밑에서 태어나서 중국에서 지내다가 2차대전이 일어나면서 군대에 징집되어 20살인 1940년에야 일본에 난생 처음 가봤다. 사진병이 되어 전투사진을 찍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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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우치 히로시(宮内 洋, 1947. 6.14) - 일본의 유명 배우. 만주 봉천성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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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세이지(小澤 征爾) - 일본의 유명 지휘자, 만주 펑텐(선양)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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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츠카 후지오(赤塚不二夫) - 일본의 유명 개그 코미디 만화가. 대표작으로 오소마츠 군이 있다. 만주국의 러허성에서 관동군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패전 직후 아버지가 소련으로 연행되어 남은 가족들과 자력으로 일본에 귀향하였고 정착했을 때 직·간접적인 차별을 당한 경력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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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다 아키오(山田昭男, 1931-2014) - 미라이 공업 창업주이자, 1대 사장으로 1931년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전후 처음 일본 본토로 들어가서 일본인이 인력거를 끌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선입견을 조심하게 되었다는 교훈 겸 자전적 일화를 국내에 번역된 책 중 하나에서 서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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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샹란(李香蘭,1920-2014) - 본명은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 리샹란은 중국에서 활동했을 때 쓰던 예명으로, 일본어로는 리코란이라고 읽는다.
중국 봉천성(현재의 랴오닝 성) 출신. 1943년에 중국에서 항일의식 고취를 위해 아편전쟁 100주년 기념으로 제작한 만세유방(萬世流芳)에서 주역으로 출연하여 중국인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1938년에 배우로서 데뷔했던 곳이 만주영화협회였고, 전속배우로서 활동한 경력이 전후에 문제가 되었다. 당시에는 중국인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일제의 선전영화에 계속해서 출연했으니 한간죄가 성립하게 되고, 그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까지 갔었다. 중국어 실력이 꽤 되었기 때문에 일본 호적을 제출하기 전까지는 모두들 중국인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인이라는 게 확인되어 국외추방의 형식으로 귀국했다. 이 때 재판을 담당한 재판관은 '본 법정은 중국인이면서 중국을 배신한 한간을 재판하는 곳이므로 일본국적을 완전히 입증한 당신은 무죄이다. 하지만 논리상, 도의상의 문제는 하나 남아있다. 그것은 중국인의 이름으로 '지나의 밤' 등 일련의 영화에 출연한 것이다. 법률상 한간재판과는 관련없으나 본 법정은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의견을 덧붙였고,[14] 이에 그녀는 '젊어서 그런 게 아니고 생각을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겠습니다.'고 사죄했다고 한다. 후에는 홍콩에서 배우로 출연하고, 동시에 주제가 앨범이 발매되면서 다시 이향란의 이름을 중국어권에서 부활시키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참의원에서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초기에는 다나카 가쿠에이와 관계가 있었지만 록히드 사건 이후로는 미야자와 파로 돌아선다. 2014년 9월 14일 별세. 등려군의 노래로 알려진 夜來香(야래향)과 何日君再來(하일군재래, 님은 언제 다시 오시나)는 사실 이 사람의 원곡이다. 1990년대에는 장학우가 이 사람과 동명의 광동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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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야 테츠 - 일본의 만화가. 중국 베이징 출생.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
8. 가상 인물 및 관련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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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의 소설 잔등 - 2016학년도 9월 모의평가 A형에 해당 부분이 출제 되었으며 작품 전체에서는 주인공이 히키아게샤들을 증오하는 소년과 동정하는 국밥집 할머니를 만나지만 해당 지문에서는 할머니가 젊은 시절 남편을 잃고 독립운동하는 아들까지 잃은 불행한 인물이지만 거지가 되버린 잔류 일본인들은 동정하고 관대하게 여기는 시각이 드러난 장면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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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가의 술 2부 - 가난한 소작농에게 만주국의 토지를 준다며 만주로 이주시키는 상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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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 이야기 - 재조선 일본인을 다루긴 하지만, 일본인의 입장에 치우친 편견으로 가득 차 있어 주의가 필요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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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별은 살아있다 - 남편이 징병당해 소식이 끊긴 만주국 히키아게샤가 자녀들을 데리고 만주 장춘에서 도보로 남하, 선천과 부산을 거쳐 1년만에 일본으로 귀환하는 여정을 다룬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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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마사키의 1962년작 영화인 인간의 조건 3부는 관동군으로 참전했다가 일본으로 돌아가는 주인공 카지의 관점에서 히키아게샤 이야기도 일부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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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용과 같이 제로: 맹세의 장소의 핵심 조연인 타치바나 테츠와 마키무라 마코토(본명은 샤오헤이) 남매 역시 히키아게샤 출신.[16] 타치바나는 집안 출신이 출신이라 사회적 냉대 속에 15세 때부터 삼합회에 들어갔다는 언급이 있고, 중국인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걸 참다 못해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왔지만 일본에선 되려 중국인 취급 받았다는 등 여간 고생이 심한 게 아니었다는 언급이 있다. 마코토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빠를 찾으러 왔다가 그 오빠의 오른팔인 오다 준[17]에게 실명+인신매매 크리로 인생 막장 테크를 타나 싶다가 때마침 팔려간 조직과 세력권 전쟁을 벌이던 본토 삼합회 청부업자였던 리웬하이에게 우연히 발견되어서 거두어졌다.[18] 이 남매의 사연들을 듣고 있자면 4편의 불행 남매였던 사에지마 타이가·사에지마 야스코 남매 이상으로 안구에 습기가 찬다.[19] 거기다 타치바나는 친동생과 해후하지도 못한 채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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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성 플래시맨 - 중국의 히키아게샤 고아를 모티브로 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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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탈 컴뱃 시리즈 - 섹터(본명 텟켄)와 린 쿠에이의 수장인 아버지 오니로. 출신지는 어스렐름 중국이지만 모탈 컴뱃 X에서 트라이보그 미러 매치에서 본명이 텟켄임이 드러났다. 일본어로 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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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1Q84 - 남자 주인공인 가와나 덴고의 아버지는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중일전쟁 중에 만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으나,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본국으로 추방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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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식당에서 현 점주의 할아버지, 즉 선대 점주가 대륙에서 일본으로 귀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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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길언의 <전쟁놀이>, <그때 나는 열한살이었다>, <못자국> 3부작 - 제주도 출신 소년 세철의 유년시절을 다룬 소설로 전쟁놀이는 일제 패망 직전의 시점을, 그때 나는 열한살이었다는 4.3 사건을, 못자국은 6.25 전쟁을 다루고 있다. 이중 그때 나는 열한살이었다에서 일본인 교장 일가를 숨겨주는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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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기아 레코드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외전 - 츈 메이유이는 일제 치하의 중국에서 살던 일본인의 후손이다.
히키아게샤와 유사한 사례는 20세기 전반까지 제국주의 정책을 펼쳤던 식민제국 대다수가 겪은 문제들이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피에 누아르(Pied-Noir)가 있다. '검은 발'이라는 뜻을 가진 이들은 식민지 알제리에 살던 프랑스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1960년 당시 100만명 이상이 살고 있었으나 알제리 전쟁 여파로 모조리 프랑스로 내쫓겨났다. 피에 누아르로 유명한 인물이라면 알베르 카뮈와 이브 생로랑이 있다.
네덜란드의 경우 자국 치하의 인도네시아로 이주하여 살던 네덜란드인들이 태평양 전쟁 때 인도네시아가 일본의 식민지로 바뀌자 일본군을 피해 네덜란드 본토로 도망친 사례가 있다.[20]
포르투갈의 경우 살라자르 정권 시기까지 수많은 포르투갈인들이 앙골라, 모잠비크 같은 식민지에 옮겨 살기도 했는데, 카네이션 혁명 이후 모두 본토로 귀국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생긴 문제들 역시 히키아게샤, 피에 누아르와 유사하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령 폴란드가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점령당했을 때도 러시아령 폴란드에 거주하던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들이 러시아 제국 본토로 도망치는 일이 많았으며, 미처 도망치지 못한 이들은 토착 폴란드인들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명목으로(말 그대로 명목에 불과했지만[21]) 엄청난 탄압의 희생양이 되었다.[22]
일본과 같은 추축국인 독일에서는 전후 독일인의 추방과 도주가 있다.
10. 관련 문서
[1] 합이 230만밖에 되지 않는 이유는, 당시 일본은 식민지인 조선과 대만을 일본으로 포함했기 때문. 당시 조선인의 인구가 한반도에 2,500만, 중화권에 2백만, 일본 본토에 2백만, 소련 일대에 수십만 정도로 분산되었음을 고려하면,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난 조선인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2]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배[3] 상술한 대기업 사원, 조선 주둔군, 일본 공무원 등을 말한다.[4]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당시 김일성은 북한에 필요한 일본인 기술자들과 그 일가를 억류해, 한반도 북부에 집중건설된 구일본의 공업 시설과 발전소를 움직이고, 자체 기술인력을 가르치도록 했다. 이런 특성으로 전쟁후까지 북한 공업은 전화의 피해를 복구하는 재생력과 시설복제에 있어서는 대단한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양적 성장이 질적 성장으로 이어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것저것 해보면 경험이 쌓이고 체제 특성상 인재와 재원의 집중투입은 잘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모여 북한이 전후 꽤 오래 중공업과 군수공업에서 앞서가는 바탕이 되었다.[5] 특히 남한 거주 일본인과 주둔 일본군의 철수의 매 행렬마다 미군이 호위로 붙어서 부산까지 호송했는데 심지어, 매 행렬에 있던 소수의 일본군에겐 소총 휴대를 허용하여 남한인들의 린치를 저지하게끔 하기도 했다.[6] 현재는 없어지고 두월동 통술거리, 반월동 시장 등으로 흔적이 남아있다. 현 월영마을 자리에 있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물자를 사고파는 곳이었으며 그래서 이름도 유래도 부산의 깡통시장과 똑같다.[7] 일본으로 이주한 이후 자신에게는 조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의 역사문제로 인해 한국을 감히 고향이라고 부르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이 여성은 자신의 집(Home)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바다라고 표현했으며, 조선의 어머니들(유모들)이 자신을 정성을 다해 키워주었으므로 대구는 자신에게 '어머니의 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8] 패전 후 자신들이 왜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재조일본인들이 이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9] 그런데 이 통화사건은 잔류했던 일본 관동군이 먼저 공격을 한 것이었다.학살되었다고 하는 일본인들은 중국군의 진압과정과 그 후에 발생한 것인데 애초에 일본군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10] 이는 초기 아메리카 식민지의 주민 대부분이 영국 하층민 출신이었던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본국에서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뭐 아쉬워서 미개한(본국 입장에서) 식민지에서 살고자 하겠는가?[11] 광복 이후 경성중 건물을 미군정이 인수해 오늘날의 서울고등학교가 되었다.[12] 이계진 당시 아나운서가 쓴 책인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딸꾹!'에서도 나온다. 이름이 도시가스처럼 들릴 수 있어서, 이 사람이 나오는 뉴스에서는 '마에다 (주한일본)대사'라고 하면 그만인데도 장난삼아 일부러 이름까지 넣는 일도 있었다고.[13] 일본 미야기 현 출생으로, 1945년 해방 당시 15살이라고 했으니 출생년도는 1930년도로 추정. 이후 행적은 미상. 1992년 경향신문 보도 당시 62세로 표기됨.[14] 당시 이향란을 보는 중국인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리라.[15] 주성치 주연의 영화 007 북경특급에서 본드걸로 나온 이향금(원영의)의 어머니라는 설정이다. 극중에서도 주성치가 전술한 장학우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다.[16] 대놓고 히키아게샤라고 불리지는 않고 "중국 잔류 일본인 출신", "잔류 고아"라는 식으로 간접 언급된다.[17] 물론 오다도 타치바나도 전혀 몰랐다. 이 무렵 오다는 그냥 양아치였고, 마코토가 인신매매로 팔려가고 얼마 후에 타치바나와 만나 그의 부하가 됐다.[18] 리는 자신을 은인이라 철썩같이 믿던 마코토를 보자 병으로 세상을 떠난 딸이 생각나 살인청부업자를 관두고 의원을 열어 마코토를 지키기로 결심한다.[19] 남매끼리 극장에 갔는데 어둠 속에서 주변 중국인들에게 온갖 위협을 당했다거나, 여동생 마코토는 기껏 혈육이라고 해서 어머니랑 일본에 있는 할아버지를 찾아 왔더니 처음에만 환대하고 말이 안 통해서 다시 냉대, 그래서 기껏 중국어를 까먹을 정도로 일본어를 배웠더니 막상 어머니가 적응 못하고 자살. 더 골때리게도 그 할아버지는 "한 평의 땅"을 알박기 해놓고 킬러 라오구이에게 살해당하는 바람에 난데없이 상속권자가 된 마코토는 순식간에 땅을 노리던 도지마구미의 타겟이 된다.[20] 이 때 미처 인도네시아를 탈출하지 못한 네덜란드인들은 일본군에 의해 잔혹한 탄압을 받았는데,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인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게 대표적이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네덜란드는 서방 국가들 중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의 만행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라가 되었다.[21] 당시 독일 제국이 명목상 토착 폴란드인들의 문화를 존중한 것도 그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여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만약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이 승리했다면 독일 제국은 이전부터 지배해왔던 포젠의 폴란드인들에게 했던 것처럼 구 러시아령 폴란드의 토착 폴란드인들을 독일화시키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22] 토착 폴란드인들 중에서도 조상 대에 완전히 정교회로 개종하여 러시아의 지배에 순응한 것 때문에 태생이 정교회 신자였던 이들은 마찬가지로 독일 제국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 러시아의 탄압을 피해 정교회 신자 행세를 하면서 가톨릭 신앙을 몰래 지켜낸 이들은 훗날 독일 제국 치하에서 자신이 가톨릭 신자임을 고백했기 때문에 독일 제국의 탄압은 받지 않았지만.[23] 히키아게샤들은 일본제국의 식민지배 및 침략 피해국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첨병이었다.[namu.wiki/w/히키아게샤 나무위키]
[정보] 책-한일공동정부:조용준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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