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샹란
李香蘭
Shirley Yamaguchi
야마구치 요시코(일본어: 山口淑子, 1920년 2월 12일 국민정부 시대 중화민국 대륙 본토 만저우 지방 펑톈 성 푸순 출생 ~ 2014년 9월 7일[1] 일본 도쿄에서 별세.)은 만주(현재 중국 대륙 동북부)에서 출생한 가수, 배우이다.
생애
2차 대전 전까지는 리향란(李香蘭 Lǐ Xiānglán[*], 리샹란)이란 예명으로 국민정부 중화민국 대륙 본토 땅에서 살았다.
국민정부 시대 중화민국 대륙 본토 만저우 지방 펑톈 성 푸순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국민정부 시대 중화민국 대륙 본토 만저우 지방 펑톈 성 펑톈과 일본 사가현 기시마를 거쳐 국민정부 시대 중화민국 대륙 본토 만저우 지방 펑톈 성 랴오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1925년 이후 국민정부 시대 중화민국 대륙 본토 베이핑에서 성장하였다. 1940년대 중국 칠대가성 가운데 한 사람이다.
원래는 일본인으로 부친의 친구가 지어준 이름으로 가수 생활을 시작했고, 항전 기간 동안 만주국에서 사람들에게 이용 받아 만주국 찬양, 군국주의 미화, 대동아 공영 등에 목적을 둔 노래를 불렀다. 때문에 노래 실력에 관하여 극찬을 받는 한편 한간이라는 세간의 좋지 않은 시선까지 동시에 받았다. 그래서 중국의 지식인과 민중들의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중국 가요사 및 이후 중화권 노래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향을 남겼다.
종전 후 한간으로 몰려 사형에 처해질 뻔하였으나 본래 일본인이라는 것이 밝혀져(따라서 이향란은 한간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호적을 정정하고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중국인으로 판정되어 입국을 거부당했다. 이후 친구의 도움으로 베이징의 양친에게 호적을 받아 일본인임을 증명, 입국하였다. 이후 가수 생활도 했으나, 주로 영화배우로 활약했다. 1974년, 1980년, 1986년에는 참의원에 선출되어 의정활동도 하였다. 정계은퇴 후,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 부이사장을 맡았다.[위키백과]
중국에서 태어나 일본 패망 후 일본으로 돌아온 영화배우, 가수, 정치인 출신의 일본인이다.
야마구치 요시코는 1920년 2월 12일 중국 동북구 푸순[1]에서 태어나 1933년 선양에서 우연히 가곡 발표회에 출연했다가 일본 군부의 눈에 띄면서 인생이 바뀌게 된다.
당시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1932년 괴뢰 만주국을 설립한 이후 선전활동을 할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야마구치 요시코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만주국 영화배우로 활동하게 된다.
그는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리샹란(李香蘭)[2]이라는 예명을 쓰며 중국인 여배우로 행세했고 '백란의 노래'와 같은 일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다수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만주, 중국 본토, 일본, 조선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1945년 패망 이후 중국에서 한간(漢奸)[3]으로 몰려 총살 당할 뻔하다가 일본인이라는 것이 증명되어 가까스로 일본으로 살아 돌아왔고 일본에서는 이름 야마구치 요시코로, 할리우드에서는 셜리 야마구치라는 이름으로 계속 영화배우와 가수 활동을 하다 결혼을 하면서 영화계에서 은퇴하였다.
이후 1969년 일본의 와이드쇼 프로그램 사회자로 방송에 복귀하였고 유럽, 중동, 동남아 지역을 다니며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고 팔레스타인 여성해방 운동을 인터뷰하는 등 세계 분쟁 지역을 다니는 준언론인으로 활동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74년, 1980년, 1986년 참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환경청 정무차관을 지냈으며 1987년 자서전「두 개의 이름으로」를 발간하여 자신의 부끄러웠던 만주국 배우생활에 대해 고백하였다.
정계에서 은퇴하고 나서는 위안부 문제 일본 측 대표 단체인 아시아여성기금 부총재를 지낸다.
2014년 9월 7일 향년 94세의 나이로 도쿄에서 사망하였다.
우에토 아야 주연으로 해당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 방영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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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봉천성(현재의 랴오닝 성) 출신. 1943년에 중국에서 항일의식 고취를 위해 아편전쟁 100주년 기념으로 제작한 만세유방(萬世流芳)에서 주역으로 출연하여 중국인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1938년에 배우로서 데뷔했던 곳이 만주영화협회였고, 전속배우로서 활동한 경력이 전후에 문제가 되었다. 당시에는 중국인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일제의 선전영화에 계속해서 출연했기 때문에 한간죄가 성립하게 되고, 그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까지 갔었다. 중국어 실력이 꽤 되었기 때문에 일본 호적을 제출하기 전까지는 모두들 중국인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인이라는 게 확인되어 국외추방의 형식으로 귀국했다. 이 때 재판을 담당한 재판관은 '본 법정은 중국인이면서 중국을 배신한 한간을 재판하는 곳이므로 일본국적을 완전히 입증한 당신은 무죄이다. 하지만 논리상, 도의상의 문제는 하나 남아있다. 그것은 중국인의 이름으로 '지나의 밤' 등 일련의 영화에 출연한 것이다. 법률상 한간재판과는 관련없으나 본 법정은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의견을 덧붙였고,[14] 이에 그녀는 '젊어서 그런 게 아니고 생각을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겠습니다.'고 사죄했다고 한다. 후에는 홍콩에서 배우로 출연하고, 동시에 주제가 앨범이 발매되면서 다시 이향란의 이름을 중국어권에서 부활시키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참의원에서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초기에는 다나카 가쿠에이와 관계가 있었지만 록히드 사건 이후로는 미야자와 파로 돌아선다. 2014년 9월 14일 별세. 등려군의 노래로 알려진 夜來香(야래향)
과 何日君再來(하일군재래, 님은 언제 다시 오시나)
는 사실 이 사람의 원곡이다. 1990년대에는 장학우가 이 사람과 동명의 광동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나무위키]
[참고] 만주국 시절 생활을 중심으로 쓴 "두 개의 이름으로"란 책이 나와 있다.
[정보] 책-한일공동정부: 조용준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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