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타가와 구니사다가 그린 히로시게의 그림 (1858년)
우타가와 히로시게(일본어: 歌川広重, 1797년 ~ 1858년 음력 9월 6일)는 에도 시대 말기의 우키요에 화가이다. 본명은 안도 시게우에몬(安藤重右衛門)으로, 안도 히로시게(일본어: 安藤広重)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위키백과]
'우키요에' 유파에 속하는 채색 목판화의 마지막 대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풍경화 구성에 대한 그의 천재성을 서양에서 맨 처음 인정해준 것은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화가들이었다. 연작 판화 〈도카이도 53역참〉(1833~34)은 그의 가장 훌륭한 업적이다.
1811년경 우키요에의 대가인 우타가와 도요히로 문하에 들어, 그의 수수하고 세련된 취향의 영향을 받았다. 1832년 그는 도카이도를 따라 에도에서 교토까지 여행했다. 가는 길에 53개 역참에 각각 하룻밤씩 묵으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스케치했다. 같은 해에 그는 55점의 풍경 판화(도카이도의 시발점과 종착점 및 각 역참마다 1점씩)로 이루어진 〈도카이도 53역참〉이라는 연작 판화를 발표했다. 이 연작 판화는 즉각 성공을 거두었고, 우키요에 화가들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되었다. 히로시게는 풍경 판화를 독자적인 장르로 통합·정리했고, 일본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처음으로 일반인들도 쉽게 음미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묘사했다. 19세기 말에 일본 목판화가 유럽에서 재발견되었을 때, 그는 제임스 맥닐 휘슬러, 폴 세잔,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같은 서양화가들에게 자연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부여했다. [다음백과]
[개요]
정식 이름은 안도 히로시게[安藤廣重], 본명은 안도 도쿠타로[安藤德太郞]아호는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 이치유사이 히로시게[一遊齋廣重]. '우키요에'[浮世繪] 유파에 속하는 채색 목판화의 마지막 대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풍경화 구성에 대한 그의 천재성을 서양에서 맨 처음 인정해준 것은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화가들이었다. 연작 판화 〈도카이도 53역참 東海道五十三次〉(1833~34)은 그의 가장 훌륭한 업적이다.
생애
히로시게는 에도 소방대 소방 감독관인 안도 겐에몬[安藤源右衛門]의 아들로 태어났다.
히로시게가 어릴 때부터 스케치를 좋아했다는 것은 다양한 일화에 나타나 있다. 12세 때인 1809년 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며, 그 직후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이듬해초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히로시게가 소방 감독관으로 실제 하는 일은 별로 없었고 급료도 적었다. 그가 1811년경 우키요에의 대가인 우타가와 도요히로[歌川豊廣]의 문하에 들어간 데는 그의 타고난 예술적 성향과 더불어 이런 요인들도 작용한 것이 분명하다.
히로시게는 도요히로의 제자가 되었고, 도요히로의 수수하고 세련된 취향은 히로시게가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었다. 히로시게는 풍경 판화라는 새로운 장르에서 자신의 천재성을 완전히 표출할 수 있게 되었다. 히로시게는 15세 때 아호와 우키요에 화가 자격증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신동은 아니었기 때문에, 첫 작품이 발표된 것은 그로부터 6년 뒤인 1818년에 이르러서였다. 책의 삽화 형태로 발표된 이 작품에는 이치유사이 히로시게라는 서명이 들어 있었다. 서명이 있는 작품 가운데 이보다 앞선 것은 남아 있지 않지만, 문하생시절에 히로시게는 도요히로 화실을 위해 잡다한 일(예를 들면 값싼 부채 그림)을 하고 중국의 영향을 받은 가노파[狩野派]와 인상주의적인 시조파[四條派]의 화풍도 공부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두 유파는 그의 후기 작품에 강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히로시게는 화가로 독립하자마자 가업인 소방 감독관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림에만 전념했다. 서민적인 우키요에 화가들처럼 히로시게의 초기경력을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예술가로서의 그의 생애는 몇 단계로 나누어 특징지을 수 있다. 첫 단계는 1811~30년경의 문하생시절이다. 이때 그는 주로 선배들의 작품을 모방해 인물 판화(젊은 여인, 배우, 무사) 작품을 제작했다. 2번째 단계는 1830~44년경의 초기 풍경화시대이다. 이 시기에 그는 풍경화와 화조(花鳥) 판화 분야에서 독자적인 낭만주의 이상형을 창조했는데, 이 이상형은 그의 유명한 〈도카이도 53역참〉과 일본 풍경을 묘사한 그밖의 연작 판화에서 구현되었다.
마지막 단계는 1844~58년의 후기 풍경화시대이다. 순수한 풍경 및 인물이 있는 풍경을 주로 그린 이 시기에는 지나친 인기의식과 다작으로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1832년 그는 도카이도를 따라 에도에서 교토[京都]까지 여행했다. 가는 길에 53개 역참에 각각 하룻밤씩 묵으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스케치했다.
같은 해에 그는 55점의 풍경 판화(도카이도의 시발점과 종착점 및 각 역참마다 1점씩)로 이루어진 〈도카이도 53역참〉이라는 연작 판화를 발표했다. 이 연작 판화는 즉각 성공을 거두었고, 우키요에 화가들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되었다. 나중에 그는 일본의 다른 지방을 여행해 유명한 〈기소 가도 69역참 木曾街道六十九次〉·〈에도 근교 8경 江戶近郊八景〉·〈오미 8경 近江八景〉·〈도토 명소 東都名所〉를 묘사한 연작 판화를 발표했다. 그는 또한 이전에 해놓았던 스케치를 이용해, 도카이도 53경의 새로운 작품을 되풀이해 제작했다.
말년에 히로시게의 작품은 점점 질이 떨어졌는데, 그것은 주로 출판업자의 지나친 요구와 자신의 경제적 필요 때문이었다. 히로시게는 5,000점이 넘는 판화를 제작했고, 그의 목판화 중 일부는 1만 부나 복제된 것으로 추정된다. 묘사하고자 하는 광경을 몇 개의 단순하고 고도로 장식적인 요소로 변형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을 갖고 있었던 히로시게는 눈에 보이는 것의 본질을 포착해 그것을 놀랄 만큼 효과적인 구도로 전환시켰다. 눈, 비, 안개, 달밤의 풍경은 아주 시적(詩的)인 그의 걸작의 한 요소가 되었다.
히로시게의 초기 동시대인인 호쿠사이[北齋]는 순수한 풍경 판화의 혁신자였다(호쿠사이). 그의 뒤를 이은 히로시게는 호쿠사이만큼 뚜렷한 개성으로 주목을 끄는 예술가는 아니었지만, 차분한 방식으로 그에 버금 가는 걸작을 많이 완성해냈다.
호쿠사이의 접근방식은 히로시게보다 힘차고 사실주의적이며, 다양한 표현양식을 광범위하면서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히로시게는 이런 훈련이 부족했지만, 일본의 통속화 전통에 입각해 온화하고 시적인 독특한 풍경화를 창조했다. 그의 그림에는 이제까지 이 화파의 어느 화가도 이루지 못한 인간적인 감촉이 있었다. 이 그림들은 지금까지 자연의 경이를 거의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마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처럼 친밀해지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히로시게는 여행과 포도주를 좋아하고 미식가였으나, 그밖의 취향에서는 진정한 에도 시민이었다. 그는 콜레라가 한창일 때 병에 걸려 죽었는데, 유언장에다 옛날의 에도 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는 고시(古詩) 1편을 인용함으로써, 과분한 장례식을 삼가라는 뜻을 가족에게 남겼다. "내가 죽거든/불태우지도 말고 땅에 묻지도 말라/그저 들판에 내던져/굶주린 개들의 배를/채우게 하라." 히로시게는 이 시에 다음과 같은 시구를 작별의 말로 덧붙였다.
"붓을 에도에 남겨두고/새로운 여행을 떠나노라/천국의 모든 명소를/샅샅이 구경하고 싶구나!"
[평가]
히로시게는 풍경 판화를 독자적인 장르로 통합·정리했고, 일본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처음으로 일반인들도 쉽게 음미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묘사했다.
19세기말에 일본 목판화가 유럽에서 재발견되었을 때, 그는 제임스 맥닐 휘슬러, 폴 세잔,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같은 서양화가들에게 자연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부여했다.[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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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사랑한 화가 -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豊重]
우타가와 히로시게
일본의 전통적인 자연을 우키요에에 담은 화가로, 고흐가 작품 배경에 우타가와의 그림을 모사하여 넣기도 했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9세기 우키요에 판화의 대가 중 한 사람인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고흐가 사랑했던 화가로도 유명하다. 일본이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하면서 파리 사교계와 문화계에는 일본 열풍이 불어 닥쳤고, 유럽 서양 미술 전반에 그 영향을 떨쳤다. 이를 '자포니즘(Japonism)'이라고 하는데, 우키요에는 마네, 모네, 로트렉, 보나르, 고흐 등 수많은 화가들을 매료시켰다. 특히 고흐는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탕기 영감의 초상〉,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의 초상〉 등의 배경에 우키요에를 그려 넣었을 뿐만 아니라 우타가와 히로시게를 좋아해 〈에도 명소 100경(名所江戶百景)〉을 유화로 모사할 정도로 심취해 있었다.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일본의 풍경을 서정적이고 시적으로 그려 낸 화가이다. 그는 1797년 에도의 변두리인 아즈마지에서 하급 무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안도 도쿠타로로, 안도 히로시게라고도 불린다. 그는 13세 때 부모를 연이어 잃고 가장이 되었고, 아버지의 직업을 세습하여 에도 성의 소방일을 담당하는 무사로 일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그는 15세 무렵 우타가와 도요히로(歌川豊廣)의 문하에 들어갔다.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이듬해 스승에게서 우타가와 히로시게라는 이름을 받았고, 22세 때인 1818년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 장짜리 판화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도요히로의 문하에서 약 17년간 가부키 배우와 미인을 소재로 한 판화를 제작하면서 여타 우키요에 화가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그러나 화가로 활동하면서도 무사의 일은 계속했다. 그는 1823년 조부인 주에몬의 아들 나카지로에게 일을 물려주고 우키요에에 전념했다.
〈탕기 영감의 초상〉
1887∼1888년에 고흐가 그린 그림. 배경에 우키요에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우타가와 히로시게, 케이사이에이센의 작품을 따라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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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년 스승 도요히로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 2대 도요히로의 자리를 물려받을 것을 권유받았지만 자신만의 작품을 그리고 싶었던 히로시게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2년 후 히로시게는 '이치유사이(一遊齋)'라는 호로 〈동도명소(東都名所)〉를 발표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풍경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도카이도의 53경치〉 중 〈간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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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카이도의 53경치〉 중 〈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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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카이도의 53경치〉 중 〈니혼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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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일본 풍경화에 서구의 원근법과 빛의 변화를 표현하는 기술을 적용한 대담한 것이었다. 그는 교토, 나라, 에도 전역을 두루 여행하면서 현장에서 직접 관찰하고 사생한 바를 토대로 현실의 풍광을 그려 냈다. 특히 섬세한 필치와 차분하고 조화로운 색상으로 서정적이고 시적인 분위기를 묘사하는 데 뛰어났다.
히로시게의 대표작 〈도카이도의 53경치(東海道五十三次)〉는 1832년 가을, 왕실에 말을 진상하는 막부 관리로 선발되어 교토에 올라가면서 한 스케치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다. 도카이도는 에도에서 교토에 이르는 도로인데, 이 길을 통해 에도와 교토 간에 물자와 사람이 이동했다. 히로시게는 여행에서 돌아온 즉시 작품을 시작했다. 이 연작은 에도의 니혼바시에서부터 교토의 가모가와 삼조대교까지 53개 역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계절과 날씨,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풍광을 섬세한 필치와 따뜻한 색감으로 표현한 걸작이다. 이 작품은 훗날 파리의 살롱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면서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히로시게는 〈오미 8경〉, 〈오사카 명소 그림〉, 〈교토 명소 경치〉, 〈기소가도의 69역참〉 등 수많은 명소를 그렸으며, 이 중에는 이미 간행된 그림을 토대로 그린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은 〈도카이도의 53경치〉와 같이 스스로 관찰한 바를 토대로 한 작품들이다. 그는 사물을 직접 보고 묘사한 것을 토대로 현실 세계를 옮겨야 진실한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직접 답사하여 눈으로 확인한 후 이를 자신의 내면 세계와 조화시켜 표현했다. 히로시게는 직접 관찰을 토대로 지형을 세세히 묘사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원근법을 사용하여 화면을 구성했다. 또 계절과 날씨, 시간의 흐름에 따른 광선 변화를 표현해 서정적인 분위기를 부여했다. 그는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시적인 감수성을 발견해 내는 감성적인 인물이었는데, 그의 그림은 이런 특유의 감수성에 전통 일본화풍이 조화된 것으로 평가된다.
〈명소 에도 100경〉 중 〈대교에 내리는 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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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소 에도 100경〉 중 〈가메이도 매화가 있는 찻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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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일본의 전통적인 자연관을 담은 풍경화를 그린 히로시게는 '눈과 달과 꽃의 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말년에 발표한 〈설월화〉 3부작 〈기소지의 산천〉, 〈가나자와 8승지의 야경〉, 〈아와나루토 풍경〉 때문에 생긴 별칭인데, 이 연작은 일본의 자연을 가장 일본적인 감수성과 색채로 표현한 동시에 보편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히로시게는 말년에 〈명소 에도 100경〉을 비롯해 〈에도 근교 8경〉, 〈가나자와 8경〉 등 에도와 근교의 풍광을 그렸다. 특히 〈명소 에도 100경〉은 에도 토박이로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친밀하게 여겼던 에도의 100가지 풍경을 그리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그중 〈대교에 내리는 소나기(大はしあたけの夕立)〉와 〈가메이도의 매화가 있는 찻집(龜戶梅屋鋪)〉은 고흐가 우키요에에 매료된 계기가 되었다. 고흐는 히로시게의 이 그림들을 모사하기도 하고, 그림의 배경에 우키요에를 넣을 정도로 심취했다.
그러나 야심만만한 계획인 〈명소 에도 100경〉은 히로시게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원인은 당시 에도에 창궐한 콜레라였다고 한다. 임종 당시 히로시게는 "동로(東路)에 붓을 놓고 나그네의 하늘, 서방의 명소를 바라보네."라는 와카를 남겼다. '에도의 집에 붓을 놓고 이제부터 서방정토로 명소를 구경하러 떠난다'라는 시구는 평생 자연을 관찰하고 그린 화폭 위의 시선답다고 할 만하다.
· 1812년 : 우타가와 도요히로의 문하에 들어가다.
· 1830년 : 〈동도명소〉를 발표하고 풍경화가로서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딛다.
[출처]일본사를 움직인 100인/글:양은경
[정보] 책 - 일본인 이야기. 2: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김시덕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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