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키 / まびき / 間引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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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도 시대 일본의 영아 살해 악습. '사전적 의미'는 『1. 솎아 냄. 2. (江戸 시대에, 생활고로) 산아(産兒)를 죽이던 일.』이다.
에도 시대에는 태어난 아이를 엄마가 목 졸라 죽이는 일이 성행했다. 이를 마비키(間引:まびき), 일본어로 솎아내기라고 한다. 또는 코카에시(子返し: こかえし)라고도 불렀다. 전자는 채소밭이나 삼림에서 간벌한다(솎아낸다), 후자는 신께 되돌려준다는 신성한(?) 뜻이다. 왜냐하면 에도시대 중기 이후에는 평균 자녀 수가 3명이었는데 아이가 3명 이상 태어나면 부모가 전부 죽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비키를 금지하는 움직임이 시작되기도 하였다. 에도 말기의 농학자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는 "데와(出羽, 현재의 야마가타와 아키타)와 오슈(奥州, 현재의 아오모리,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에서 매년 1만 6~7천명, 가즈사(上総, 현재의 치바현)에서는 갓난아기 3~4만 명이 매년 솎아냄(마비키) 되고 있다"며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악습 자체는 전국시대때 부터 이미 있던 일본 고유의 악습으로 당시 일본을 방문했던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 역시 자신의 저서 『일본사』에 "일본의 여성은 기를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면 모두 아기의 목을 다리로 눌러버려 죽여버린다."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사실 일본에서 마비키가 성행한 이유는 봉건적 인두세와 더불어 과도한 징세로[2] 가난한 일본 백성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축내는 '새 식구'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즉, 식비 조절을 위해 앞으로 다 자란 뒤 제공하는 노동력으로 생산할 수 있었던 식량도 무시했다. 그래서 그 식량을 먹을 수 있었던 사람을 줄이기 위해 영아 살해를 시행했다. 그만큼 노동력을 제공할 나이까지 자랄 때까지 기를 만한 성인보다도 덜 먹는 어린 아이가 먹을 만큼의 여유도 없었다. 실제로 에도 시대에는 과도한 징세 때문에 민란(잇키)이 빈번했다.[3]
2. 내용[편집]
에도 시대 초기에는 전란이 종식되고 평화가 찾아오면서 인구가 매년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지만, 에도 시대 중기 이후로는 일본 내에서 큰 전란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4] 일본의 인구 성장률은 계속 정체되어왔다. 무사 등 특수 계급을 제외한 전국의 인구는, 막부가 조사를 시작한 1721년에 2,600만 명, 가장 적을 때에 2,489만 명(1792년), 가장 많을 때에 2,720만 명(1828년)으로, 극히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5] 당시 일본은 온천을 개발하기 쉬운 환경의 영향으로 목욕문화가 발달했고, 에도 시대 즈음이 되면 주요 도시지역에서 대중목욕탕이 보편화 되었을 정도로 목욕을 자주 하여 영·유아의 초기사망률을 극도로 낮출 수 있는 위생 부분에 다른 나라에 비해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인지[6] 평균 수명이 동시기 다른 국가들보다 유의미한 수준으로 높았기에[7] 아무리 조세 압박 등의 영향이 있다고 해도 일본의 출산율이 평균적으로 5~6명대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만큼 전란기가 아닌 평화시라면 기근 등의 사태가 아닌 이상 인구는 매년 늘어나야만 했고, 그러면 최소한 동시기 청나라와 조선, 베트남보다는 인구증가율이 더 높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도시대의 인구증가율은 낮았는데 그러면 어떠한 방법으로 인구증가가 억제되었는지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전근대 시대는 피임기술이 변변치 않았던 만큼, 에도 시대 때의 인구증가를 억제하는 방법은 대부분이 마비키(솎아냄)에 의한 영아 살해가 분명했다. 에도 시대 중기 이후, 영주의 금지령이나 교사에도 불구하고, 기근시 농촌 등에서, 영·유아를 압살, 교살, 익사, 생매장 등의 방식으로 죽였다. 당시에 7세 이하의 아이는 신의 아이로 여겨 언제라도 신에게 답례할 수 있다고(즉,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8] 일종의 쿨링 오프인 것이다. 그리하여 마비키를 '아이 반환'이라고도 불렀다.
특히 마비키가 성행한 이유는 당시 일본이 동북아시아 국가들 가운데서 세율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일본 백성들이 대부분 새로운 생명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경제력이 부족해서였다.[9] 에도 시대의 쌀 생산량을 보면(참고) 1700년의 농지 면적은 282만 헥타르였다. 60%가 논이라고 한다면 논의 면적은 169만 2천 헥타르, 인구는 28,287,200명, 인구 1인당 경지면적은 0.598反(탄), 에도 시대 단위 면적당 쌀 생산량 190kg/反을 고려하면 1인당 0.758石(코쿠), 세금 50%를 공제하면 1인당 0.379石. 1인당 0.38石로 1石 기준 144kg로 보았을때 1인당 144kg×0.38=54.72kg다. 육류 보급이 확대되고 쌀을 제외한 밀과 감자·옥수수 등의 기타 양식으로 인해 쌀을 적게 먹게 된 현대 한국인도 1인당 연간 60kg 이상을 소비하는데, 육식 금지령까지 걸린 에도 시대의 일반 백성들은 이렇게 극도로 식량이 제한되는 삶을 영위하기 힘들었다.[10] 물론 이 추정 60%의 논이 아닌 40%의 고구마나 감자 등을 재배했을 밭을 지닌 농부들도 있었겠지만, 세금의 기준이 쌀인 만큼 농민에 대한 조세부담은 공평했다.
그래서 한국에는 십시일반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지만, 에도 시대의 일반 백성들은 십시일반을 하면 모두 굶어죽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정에 새 생명이 태어나면 경사스러운 일이겠지만, 당시 가난한 일본 백성들에게는 오히려 가족의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결국 마비키는 그런 암울한 빈곤 속에서 만들어진 전 가족이 굶어죽지 않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였던 것이다.
3. 에도 시대 때 얼마 만큼의 아이들이 '마비키'로 목숨을 잃었나?
관련 자료들마다 차이는 일부 있지만, 에도 시대 당대의 학자,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의 저서 「草木六部耕種法」이나 「경제 요록」에 의하면, 가즈사 국(上総国)[11]에는 약 10만의 농가가 있었지만, 거기서 살해당하는 아이의 수는 해마다 3~4만명에 달했으며, 또 무츠 국,[12] 데와 국[13]에서는 솎아냄(마비키) 하는 수가 해마다 7, 8만에 달했다고 한다.[14] 솎아냄(마비키)은 콘돔을 사용한 피임 같은 인구 조절의 수단이 별로 없었던 당시로서는 필요악이었다[15]는 것이다. 즉, 그 당시에는 '솎아냄(마비키)'을 별로 '잘못된 행동'이나 '영아 살해' 같은 흉악한 범죄가 아니라 그저 아이를 신에게 다시 돌려주는 일에 불과하며, 자기 아이로 하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했다.[16]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마비키로 계속 살해한 결과 에도 시대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인구조사를 한 교호(亨保) 11년(1726년)부터 그 이후 막부 붕괴, 메이지 유신 때까지도 에도 시대 일본 열도의 인구는 거의 증가하지 않고, 대부분 2,700만명 선에서 항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4. 메이지 유신 이후의 마비키
20세기 들어서까지도 마비키가 있었기에 일본 정부는 이를 근절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특히 메이지 시대가 되면서 일본 정부는 방침을 바꾸어, 국가 발전을 위해서 더는 아이들을 일부러 죽이지 말고 최대한 낳아서 늘리도록 하였고, 이후 마비키는 당연히 영아 살해와 같은 흉악한 살인죄로 간주되었다. 일본 정부의 노력으로 영아 살해가 크게 줄면서 일본의 인구는 이후로 매년 급속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법률로 금지되었다고 해도, 에도 시대 근 260년 동안 굳어진 악습이 바로 사라질 수는 없었으므로, 지방에서의 솎아냄(마비키)은 남 몰래 계속되었다.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国男)에 의하면,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모든 집에 1남 1녀의 자녀만 있는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인위적인 산아 조정을 하지 않는 한 절대 있을 수 없는 마을이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존재했음은, 마비키 풍습이 메이지 시대 당시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계속 유지되었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비키 풍습도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1930년대까지도 홋카이도 등 일부 지역에서는 마비키 풍습이 일부나마 계속 남아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는 시점인 1945년까지 일본 인구는 7,215만 명으로 증가하게 된다. 약 백 년 동안 4,000~4,500만 명 가량 증가하게 된 셈이다.
"도시=개미지옥"이었다... 에도 시대로부터 본 일본의 인구 감퇴기에 일어났던 것들→에도 시대의 인구 변동에 대해 시즈오카현립 대학장(静岡県立大学長) 키토 히로시(鬼頭 宏) 역사인구학(歴史人口学) 교수가 해설한 기사.
5. 기타
일본 자장가에서 조차 마비키를 암시하는 구절이 나온다. "자장, 자장, 잘 자거라, 자지 않으면 강에 버린다. 자장, 자장, 잘 자거라, 자지 않으면 묻어 버린다" 이 자장가 중에 「강에 버린다」, 「묻어 버린다」는 구절은 마비키를 지칭하는 은어라고 한다.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작품 중 하나인 《어둠의 도키》의 주인공 '도키'가 바로 마비키 풍습으로 버려진 사례 중 하나이자 피해자다.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의 배경 마을도 마비키+노인 유기의 형태로 인구수를 유지한다. 이 마을에서는 첫째 아들만 결혼을 할 수 있어서 둘째 아들 이후에는 수간을 하는 처지였다는데, 노동력이 될 수 있는 남자 아이들을 많이 남기기 때문에 수간하는 둘째 아들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은 마비키에 인신매매로 일정 숫자만 유지했다. 노인 유기를 하는 이유도 노인들이 노동을 할 수 없다는 것. 그 밖에 도둑질을 하면 마을 내의 법에 따라서 죽였다고 한다. 작중에는 한 집안에서 규칙을 어기고 너무 많은 아이들을 뒀다가 생계 유지가 안 되어서 도둑질을 한다는 이유로 그 집안 전체를 생매장 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마비키 풍습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마을의 인구가 일정하게 유지되는지 잘 보여주는 영화다.
일본의 인터넷 팬 캐릭터인 실장석(참피)의 설정들 중 하나인 솎아내기가 바로 이 마비키라는 악습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실장석은 일본의 악습들과 부정적인 모습들을 총합하여 만든 인터넷 캐릭터이기 때문에 이런 전근대 일본의 악습 또한 설정에 그대로 차용한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전설적인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를 다룬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만화 배가본드에서도 도적 두목인 츠지카제 텐마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 의해 폭포에 떠밀려 빠져 죽을 뻔한 마비키를 당한 것으로 묘사된다.
6. 일본 외 국가의 사례
과거엔 기술의 발달이 미비한 관계로 관개농업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한 데다, 개간해야 하는 땅에 비해 비료가 매우 한정되어 있는 편이었다. 때문에 식량생산량이 인구 수보다 적게 되는 기근이 발생하기 쉬웠던 것은 동서를 막론하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일본 뿐 아니라, 당장 자연재해로 한해 이상의 농사를 망쳐 식량 생산량이 인구를 부양하지 못하게 되어버리면 당장 먹을 게 모자라서 조선을 포함해서 독일 등 유럽의 몇몇 지역에서도 기근시 마비키가 연상되는 영아 살해 혹은 유기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17]
조선의 경우 실록에 기근을 당해서 발생한 영·유아의 유기가 여럿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당장 어른들도 생존을 장담하기 힘든 기근을 당한 상태거나 또는 농사를 짓기 힘든 평안도 이북의 북방에만 편중되어 있는 기록이며 무엇보다 이러한 기록은 임란으로 인해 국가가 대처하기 힘든 사례를 제외하곤 기근으로 인한 이런 피해를 신하가 이야기하고 왕이 침통해 하거나 직접 명령하여 국가가 나서서 구휼곡을 보내는 해결방안을 시행하는 기록이 이어진다. 그렇기에 기근으로 인한 영·유아의 유기나 살해는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비정상적인 일이었기에 국가가 나서 원인을 해결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봐야하며 그렇기에 전쟁이나 기후문제로 기근이 상시로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인구증가량에 영향을 줄 정도로 오랫동안 악습으로서 자행된 일본의 마비키와는 동일하게 비교하기가 어렵다.
서양의 경우 이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매체가 다름아닌 그림 동화의 헨젤과 그레텔, 노간주나무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의 영아 살해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기근으로 인해 일시적인 식인이 발생하기 직전 수준의 식량부족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특정 지역의 특수성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간주되는 편이며, 마비키가 오랫동안 풍습으로 정착한 일본 외 다른 나라들의 이러한 사례들은 영·유아 살해로 인해서 등비수열로 증가하는 인구의 증가 추세(멜서스 트랩)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수준의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들이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어떠한 근거를 들어도 외세에 의한 전란이 없는 상태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국가에서 소빙하기와 같은 자연재해(대규모 기근)를 제외하면 국가 단위로 최소 백년 이상 인구의 증가 추세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건 마비키가 유일하다.
일본의 영향권 안에 있던 사츠마 번의 반(半) 복속국이나 다름없던 류큐에서도 사츠마 번에 뜯기는 조공을[18] 감당하지 못한 왕부에서 주민들에게 가혹한 인두세를 매겼고, 이 인두세를 어떻게든 줄여보려고 국민들을 일부러 무인도로 이주시켜 마을 단위로 걷는 조공을 줄이려 하거나 임산부를 절벽에서 뛰어내리게 강요하고 태어난 아이를 돌로 눌러 죽이는 등의 풍습도 존재했다고 한다.
7. 관련 문서
[1] 이 책에 대한 추천글을 보면 일본 학자들이 이 흑역사를 감추는 데 급급한다는 얘기가 나온다.[2] 에도 막부의 관리들은 "참깨 기름과 백성의 세금은 짜면 짤수록 나온다."며 해마다 연공을 늘리고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출처: 상식 밖의 일본사/안정환 지음/새길/130~133쪽[3] 에도 시대에 잇키가 무려 3천 번이나 일어났을 정도로 농민들의 삶은 힘들었다. 대략 계산해보면 에도시대가 약 252년 간 지속됐으니 1년에 12번 정도, 즉 1달에 1번씩 반란이 일어난 셈이다(...).이런데도 막장 세율을 꿋꿋이 유지한 것도 신기하다. 출처: 상식 밖의 일본사/안정환 지음/새길/132쪽[4] 다만 큰 전쟁만 나지 않았지 잇키 같은 건 계속 발생했다.[5] 앞의 인구 조사는 당시 에도 막부가 직접 조사한 것으로 현재 학계의 인구 추정치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단, 에도 시대 당시의 일본의 인구가 '지극히 안정적으로 유지된 것'은 사실이다.[6] 다만 전근대 공중목욕탕은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수인성 전염병의 천국이자 온상지였다. 지금도 화학약품으로 주기적으로 청소하는 현대식 공중목욕탕들 마저도 가끔씩 기준치 이상의 병원균들이 나와서 영업정지를 당하기도 하는데 전근대 시절 공중목욕탕의 평균적인 위생 수준을 생각했을때 과연 에도시대 일본의 대중목욕탕이 위생상 더 좋은 영향을 끼쳤는지 논란이 있다.[7] 당시 일본의 평균수명은 약 32세~33세를 전후한 수준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당시 청나라 평균수명인 24~25세를 훨씬 웃돈다. 하지만 18세기에는 청나라의 인구증가율은 일본의 인구증가율을 훨씬 웃돌았고, 19세기에는 청나라의 인구침체와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등이 잇따라 일어나며 혼란에 빠진 영향으로 인구증가세는 정체되었지만 적어도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인구증가폭이 일본보다 높았다.[8] 도랸세, 시치고산 참조.[9] 당시 일본의 세율은 생산량의 50~70%였는데, 이는 동시대 조선이나 명나라·청나라와 비교하면 상당히 무거운 세율이었다. 조선의 경우에는 덕치를 표방한다는 이유로 세율이 10%를 넘는 경우가 드물었고, 명·청 역시 세율이 조선보다 높았으나 은본위제를 바탕으로 경제가 개편되고, 숨어있는 인구를 호적에 올리기 위해 일조편법이나 지정은제 등 기존의 세금제도를 폐지하는 방식으로 세금을 많이 감면해 주었다. 다만 10퍼센트라는 세율은 세금을 점차 일원화 시키던 일본중국과 달리 조선은 계속해서 여러종류의 다채로운 세금을 운용했고 그 중의 하나가 10퍼센트란 소리이다. 학자들 마다 차이는 있지만 최종세율은 30퍼센트 정도로 어찌됬건 일본에 비하면 적은편이었다.[10] 다만 일본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교토 인근 지역에서 쌀 - 보리 - 메밀의 1년 3작을 시작하고 에도 시대 말까지 규슈와 토호쿠까지 1년 2작, 또는 1년 3작이 확대되기 때문에 식량까지 극도로 제한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결국 쌀로 세금을 내야 했기에 쌀만 생산했다고 가정하면 이러한 잡곡도 쌀로 환전하여 세금을 내야하기에 의료, 종자 마련, 생필품 구비 등, 농민에게는 필수적인 소비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물론 당시 농민들은 부업으로 공예품이나 직물을 생산해서 판매하기도 했기 때문에 일본의 농민들이 극도의 기아 상태에 있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오류를 범할 수 있지만 마비키는 존재만으로도 일본의 세율이 지나칠 정도로 높아 일본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은 사실임을 증명한다.[11] 지금의 일본 지바 현 일대.[12] 지금의 일본 후쿠시마 현, 미야기 현, 이와테 현, 아오모리 현과 아키타 현 북동부 지역.[13] 지금의 일본 야마가타 현과 아키타 현.[14] 미야모토 츠네이치(宮本常一) · 他編: 1995[15] 요네다 쿄코(米田京子): 근대 모성관의 수용과 변형 -「교육하는 모친」 현모양처에게-, 1985[16] 이마노 노부오(今野信雄): 에도의 육아 사정 1988[17] 당연히 다음 단계는 식인이다.[18] 사츠마 번의 지배를 받게 된 류큐는 거의 모든 부와 산물을 사츠마 번한테 조공을 바쳐야 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류큐의 특산품인 흑설탕이었다. 이 흑설탕에 류큐인이 손을 대면, 류큐에 주둔 중이던 사츠마 번의 무사가 칼로 그 류큐인의 손목을 잘라버릴 만큼, 사츠마 번의 류큐 지배는 매우 혹독했다.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도현신 지음/서해문집/166쪽
[정보]책- 일본인 이야기. 2: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김시덕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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