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쓰시카 호쿠사이
가츠시카 호쿠사이(일본어: 葛飾 北斎, かつしか ほくさい, 1760년 10월 31일? ~ 1849년 5월 10일) Katsushika Hokusai는 일본 에도 시대의 우키요에 화가이다. 삼라만상 그 어느 것도 그려냈으며, 전 생애 동안 3만 장을 넘는 작품을 발표하며 판화 외에 직접 그린 그림도 걸출했다. 고흐 등, 인상파의 색채에도 영향을 주었다.
대표작으로 《부악삼십육경》(일본어: 富嶽三十六景 후가쿠 산주롯케이[*]), 《호쿠사이 만화》(일본어: 北斎漫画 호쿠사이 만가[*]) 등이 있다.
생애
호를 서른 번 바꾸고, 아흔세 번 이사하다
그는 서른 번이나 호를 바꿨다. 제자에게 호를 넘기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었다. 아흔세 번을 넘는 이사에 대한 이야기도 유명한데(하루 만에 세 번이나 이사한 일도 있다고 한다), 이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에만 몰두해 방이 어지러워지면 이사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아흔세 번째로 이사하면서 예전에 살던 집으로 옮겼을 때, 방이 이사갈 때와 별 차이가 없이 어지러웠기 때문에 더 이상 이사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식생활은 엉망진창이었지만 그러고도 90세 넘게 장수했던 것은 소귀나물(慈姑)을 매일 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요 작품
- 후가쿠 36경 (富嶽三十六景)
- 후가쿠 100경 (富嶽百景)
- 호쿠사이 만화 (北斎漫画) - 전 15권. 실려 있는 그림은 총 4000점에 달함.
- 팔방을 노려보는 봉황도(八方睨み鳳凰図)
- 그 외 - 풍경화, 춘화 (문어와 해녀), 상상화 등 여러 종류의 우키요에를 그림. 만년에는 육필화도 다수 남김.
후가쿠 36경 중 개풍쾌청 붉은 후지 산(凱風快晴 赤富士)
후가쿠 36경(富嶽三十六景)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위키백과]
------------------------------------------------------------------------------
요약 일본의 우키요에 화파에 속하는 18~19세기의 화가 및 판화가로 주요 작품은 연작 판화 <후가쿠 36경>. 에도에서 태어나 5세 때부터 그림에 관심을 가졌으며어린 시절에는 목판화가의 도제를 하면서 판화가의 기법을 익혔다. 18세에 우키요에 대가인 가쓰카와 순쇼의 제자가 된 후 30대에 이르러 판화와 인쇄물, 그림책, 소설의 삽화, 육필화 등을 망라하는 작품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주제 역시 광범위하여 풍경화와 역사적 장면의 묘사에도 역점을 두었고, 서양식 원근법과 채색법에도 관심을 가졌다. 생애 후반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그림책과 목판화 연습책을 만드는 데 열중하기도 했다.
개요
정식 이름은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 아호는 슌로[春郞]·소리[宗理]·다이토[戴斗]·가쿄진[畵狂人]·이이쓰[爲一]·만지[卍]. 그의 초기작품은 풍경과 배우를 묘사한 1장짜리 판화, 육필화, 인사장이나 안내문 같은 인쇄물이 있는데, 이는 우키요에 예술의 모든 범위를 망라한 것이다.
나중에 그는 무사를 다룬 고전적 주제와 중국화의 전통적 주제에 전념했다. 1826~33년에 발표된 유명한 연작 판화 〈후가쿠 36경 富嶽三十六景〉은 일본의 풍경 판화 역사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젊은시절
호쿠사이는 에도 동쪽에 있는 혼조[本所] 지구에서 태어나 5세 때부터 그림에 흥미를 가졌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 유명한 공예가인 나카지마[中島]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지만, 끝내 후계자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이것은 그가 나카지마의 친아들이긴 하지만 서자라는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호쿠사이는 어린시절에 대본[貸本] 집에서 일했고, 15~18세에는 목판화가의 도제 노릇을 했다고 한다. 책과 판화를 접하게 되는 초기의 이러한 경험이 나중에 판화가로서 예술적 성장을 이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호쿠사이에 대한 동시대의 기록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은 1778년의 기록이다. 당시 18세였던 그는 우키요에 대가인 가쓰카와 슌쇼[勝川春章]의 제자가 되었다. 이듬해에 청년 호쿠사이는 첫 작품으로서 슌쇼와 가쓰카와파가 사실상 주도하던 장르인 가부키[歌舞伎] 연극 배우들의 판화를 발표했다.
그가 낳은 자녀들의 나이로 미루어볼 때, 호쿠사이는 20대 중반에 결혼한 것이 분명하다.
그무렵부터 그의 작품은 배우와 여자들을 묘사한 판화에서 역사적 주제와 풍경화, 특히 '우키에'[浮繪:서양의 영향을 받은 원근법을 이용한 준역사적 풍경화]와 아이들을 묘사한 판화로 바뀌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가정생활의 영향인 것 같다. 그의 책에 들어간 삽화와 본문도 초기의 주제에서 벗어나 역사적이고 교훈적인 주제로 바뀌었다.
호쿠사이는 그후 10년 동안 인쇄물 장르에 속하는 작품을 제작하여 최초의 전성기를 맞았다.인쇄물은 특별한 경우에 쓰이는 연하장을 비롯한 인사장, 음악회 프로그램과 안내문, 개인적인 시선집 등을 한정판으로 찍어 사적으로 배포한 판화로서, 깨끗한 최고급 판화라는 점이 특색이다. 호쿠사이는 30대 초반에 개인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스승 슌쇼가 1793년초에 세상을 떠났고, 얼마 후에는 젊은 아내가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남기고 죽었다. 1797년에 재혼했고, 호쿠사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이름을 바꾼 뒤, 그후 반 세기 동안 그의 작품의 황금기가 지속되었다.
원숙기
이 무렵부터 호쿠사이의 작품 형식은 우키요에의 모든 영역, 즉 1장짜리 판화, 인쇄물, 그림책과 삽화를 넣은 소설, 시집과 역사소설 삽화, 육필화와 스케치 등을 모두 포괄하게 된다.
호쿠사이가 관능적인 인물 판화의 대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우타마로[歌
]와 같은 주제를 선택한 경우는 탁월한 판화 몇 점과 회화 및 춘화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제한을 제외하면, 호쿠사이의 주제는 광범위했다. 특히 그는 인물이 부차적인 중요성밖에 갖지 않는 풍경화와 역사적 장면에 역점을 두었다. 세기가 바뀔 무렵에는 잠시 서양식 원근법과 채색법을 실험했다.
19세기초부터 호쿠사이는 '요미혼'[讀本:당시 막 유행하기 시작한 대하역사소설]에 삽화를 그리는 일을 시작했다. 이 영향으로 그의 화풍은 중요한 변화를 겪기 시작했는데, 이 변화는 특히 1806~07년에 뚜렷이 나타났다. 그의 작품의 인물은 이전 작품에 비해 힘찼으나 대신 섬세함을 잃어갔다. 또한 고전적·전통적 주제(특히 무사나 중국화의 주제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반면 동시대의 '우키요에' 세계에는 관심이 없어졌다.
1812년경 맏아들이 죽는 불행을 겪었는데, 이 일은 그의 감정만이 아니라 경제 상태에도 영향을 주었다.
부유한 나카지마 가문의 양자인 호쿠사이는 아들의 교육비 명목으로 넉넉한 수당을 정기적으로 받을 수 있었고, 따라서 그림을 그려 얻는 불안정한 수입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는데, 아들이 죽음으로써 안정된 수입원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시대는 예술 작품에 대해 정해진 사례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대가를 치르던 시대였다. 경제적 이유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무렵부터 호쿠사이는 소설 삽화보다 그림책, 특히 아마추어 화가들을 위한 목판화 연습책(유명한 〈호쿠사이 만화 北齋漫畵〉를 비롯하여)에 점점 더 관심을 쏟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제자를 찾아냄으로써 새로운 후원자를 찾으려 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 점에서 그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호쿠사이는 세밀 판화와 삽화로 명성을 얻었지만, 자신의 예술적 기량을 대중 앞에서 과시하는 것도 좋아했다. 예를 들면 그는 에도와 나고야[名古屋]에서 축제가 열렸을 때 많은 군중 앞에서 신화적 인물들을 묘사한 약 200㎡의 거대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한번은 쇼군[將軍:일본을 실질적으로 다스린 군사 지도자] 앞에 불려가 예술적 기량을 보인 적도 있었다. 1828년 여름에 2번째 아내가 죽음으로써, 이따금 마비 증세에 시달리던 68세의 호쿠사이는 어릴 적부터 온갖 비행을 저지른 방탕한 손자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따라서 그 직후에 호쿠사이의 사랑하는 딸이자 제자인 오에이가 도메이라는 삼류화가와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아버지 곁으로 돌아온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그후 오에이는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곁에 머물렀다.
정력적인 화가 호쿠사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 밤 늦게까지 그림을 그렸다. 이 습관은 수많은 작품을 생산한 그의 긴 생애 동안 계속되었다. 수천 점에 이르는 호쿠사이의 삽화와 판화 가운데 특히 빼어난 것은 〈후가쿠 36경〉이다. 1826~33년에 발표된 이 유명한 연작 판화는 부록을 포함해 모두 46점의 채색 판화로 일본 풍경 판화의 역사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 웅대한 착상과 뛰어난 솜씨에서 일찍이 이에 버금가는 작품이 거의 없었고, 그후에도 이것을 능가하는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호쿠사이의 동시대인인 유명한 안도 히로시게[安藤廣重]의 풍경화도 이에는 미치지 못했다(히로시게). 호쿠사이는 90번이 넘게 이사를 다녔는데, 거처와 아호를 자주 바꾼 것은 이 예술가의 불안정한 성격을 시사한다.
그는 대개 10년에 1번씩 아호를 바꾸었고, 주요 아호 이외에도 이따금 사용하는 아호가 20여 개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아호들은 대개 당시의 주요 아호에 덧붙이는 보조 아호로 사용되었다.
그는 "하늘이 내게 10년만 더 목숨을 부지하게 해 준다면 진정한 화공이 되었을 것을……"하며 죽었다. 일본 달력으로 4월 18일에 그의 표현대로 '그림에 미친 늙은이'는 숨을 거두었다. 당시 그는 89세였지만, 여전히 예술에 있어 궁극적인 진리를 탐구하며 추구했다.
그는 죽기 15년 전에 쓴 어떤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5세 때부터 사물의 형태를 스케치하는 데 열중했다. 50세 때부터는 수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내가 70세 이전에 그린 그림 가운데 정말로 중요한 그림은 하나도 없다. 73세가 되어 나는 새·동물·곤충·물고기의 진정한 특성과 초목의 중요한 본질을 약간 파악했다. 따라서 80세가 되면 나는 조금 더 진전할 테고, 90세 때는 사물의 의미를 훨씬 더 깊이 통찰할 것이며, 100세가 되면 참으로 놀라워질 테고, 110세 때는 내가 찍는 점 하나하나, 내가 긋는 선 하나하나가 독자적인 생명력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
여러분은 내가 그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볼 때까지 장수하고, 그때까지 잊지 않고 내 말의 진실에 유의하기를 바랄 뿐이다."
평가
'우키요에' 화파가 발전한 마지막 세기 동안 호쿠사이는 긴 생애를 통해 그 화파의 본질을 구현해냈다.
70년 동안 예술 창작 활동을 계속했다는 점에서, 그는 자신의 천직에 일평생을 바치는 예술가의 길을 걸었으며 이에 그의 불굴의 천재성을 찾을 수 있다. 게다가 호쿠사이는 19세기말부터 서양의 예술가와 평론가 및 예술 애호가들에게 아시아의 어떤 예술가보다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다.[다음백과]
[정보] 책 -메이지유신을 이끈 카게무샤:박상후 지음 |
'♣ 역사(歷史) 마당 ♣ > < 일본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도시대 - 영아 살해 악습]마비키 / まびき / 間引き (0) | 2020.11.22 |
---|---|
[극우단체 현양사를 설립하고 김옥균, 쑨원도 지원한 우익의 거두]도야마 미쓰루(頭山 満) (0) | 2020.11.18 |
[러일전쟁 시 만주군 총사령관]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 (0) | 2020.11.10 |
[말을 타고 500여 일에 걸쳐 유라시아를 횡단한 인물]후쿠시마 야스마사 (Fukushima Yasumasa, 福島安正) (0) | 2020.11.09 |
[나치독일의 압박을 피해 온 유대인에게 도움을 줘 이스라엘 건국의 공로자로 인정받은 인물] 히구치 기이치로(樋口 季一郎) (0) | 2020.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