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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 - 후한 말~위 관료]원환(袁渙)

Bawoo 2020. 12. 13. 20:21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인물. 자는 요경(曜卿) 원패의 사촌형, 원민의 형, 원간(袁侃)[1], 원우(袁寓)[2], 원오(袁奧)[3], 원준의 아버지. 자는 요경(曜卿). 진군 부락현 사람. 아버지 원방은 한나라에서 사도를 지냈으며, 사촌 동생으로는 원패(袁覇)[4], 원휘, 원민(袁敏)[5] 조카로 원량이 있다.

훗날 남조의 대표적인 문벌귀족 가문인 진군 원씨(陳郡袁氏)는 원환의 후손들이다.

2. 정사

어렸을 때 주위의 세도가의 자제들이 모두 법을 지키지 않아 자신들의 뜻대로 지냈는데, 원환은 청아하고 고요한 태도를 지키면서 반드시 예법에 따른 것으로 이름이 높아 군에서 그를 공조로 삼았다. 간사한 관리들이 모두 스스로 사직한 다음에 떠날 정도였으며, 후에 공부로 불려가면서 우수한 성적으로 추천되어 시어사로 승진했다가 초현의 현령으로 제수되지만 받지 않았다.

196년에 유비가 예주자사가 되자 무재로 천거되었다가 장강과 회하 지방에서 환란을 피하고 후에 원술에게 다시 임용되었으며, 원환이 언제나 정론을 펼쳤기 때문에 원술은 그를 공경했다.

부릉에서 일어난 원술과 여포와의 전투에서 원술군이 패할 때 여포에게 포로로 잡혀 여포를 섬기게 되었으며, 후에 여포와 유비의 사이가 나빠지자 여포는 원환을 시켜 유비를 비방하는 편지를 쓰게 했지만 한사코 거부했다. 결국 화가 난 여포가 자신의 무기를 원환에게 들이대면서 안 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자 원환이 말했다.

나는 덕망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치욕을 느끼도록 할 수 있다는 말은 들었어도 욕하는 것으로써 치욕을 느끼게 한다는 말은 듣지 못 했소. 만약 유비가 정말로 군자라면 장군의 말에 치욕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유비가 소인이라면 장차 장군의 행동에 대해 보복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치욕은 이쪽에 있는 것이지, 그쪽에 있는 것이 아니오. 하물며 내가 다른 날 유비를 섬겼던 것은 마치 오늘 장군을 섬기는 것과 같은 이치요. 만약 내가 하루 아침에 이곳을 떠나 장군을 욕한다면 괜찮겠소?


이 말을 들은 여포는 결국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계획을 취소했다고 한다.

198년에 여포가 조조에게 토벌당하자 원환 또한 조조에게 항복했는데, 진군 부자 등 여포군에 있다가 항복한 다른 자들은 모두 조조에게 배례를 했지만 원환은 가볍게 읍만 할 뿐 예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또한 조조가 여포의 군중에 있던 물자를 수레를 가지고 와서 가져가라고 했는데, 다른 자들이 모두 수레 가득 귀중품을 챙겨갈 때 원환은 수백권의 책과 자신의 양식만을 챙기자 주변 사람들이 모두 부끄러워했다.

원환이 이 때

만약 내가 군대의 행군에 참여하여 종군하게 된다면 가지고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양식만을 가진 것이다. 이것을 나의 소유로 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름을 높이게 되는 것에 크게 후회스럽고 한탄한다.

라고 말하자 조조는 그 후에 원환을 더욱 중용했다.

원환이 진언했다.

무기란 상서롭지 못한 도구이므로,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전쟁을 하려면 도덕에 입각하고, 정벌을 하려면 인의(仁義)에 입각하며, 아울러 그 백성을 어루만져 주고 폐해를 제거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진실로 그들과 함께 죽을 수 있고, 그들과 더불어 살 수 있습니다. 큰 난리가 난 지 십수 년이 되었으니, 백성들이 안정을 바라는 것은 나무 위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나운 난동이 가라앉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이 점을 생각해 보면 정치가 그 바른 길을 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듣건대, 훌륭한 군주는 세상을 구제하는 데 뛰어나므로 세상이 혼란하면 의로움(義)으로써 그것을 구제하며, 시대가 허위로 차 있으면 소박함을 가지고 그것을 달래 줍니다. 그러나 세상이 다르고 사정이 변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법도와 다른 점이 있으므로,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제도의 결손과 보충은 예나 지금이나 반드시 같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천하를 모두 사랑할 수 있으면 그것을 뒤집어 바른 길로 가게 해야 하며, 비록 무력으로써 동란을 평정하고 도덕으로써 그들을 구제한다고 할지라도 진실로 모든 군주가 쉽게 바꿀 수 없는 원칙입니다. 조공의 뛰어난 식견은 세상 사람을 넘어섰습니다. 과거의 군주가 민심을 얻는 이유가 있었는데, 공은 그것을 근면하게 실천해 나가고 있으며, 현재의 군자가 그의 민심을 잃어버리는 까닭이 있었는데, 공은 이미 그것을 경계하였습니다. 온 세상이 공에게 의지하여 위험과 멸망의 환란을 벗어나게 되었지만, 백성들은 그 의로움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공만이 그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서게 된다면, 천하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럽겠습니까?


태조는 그의 건의를 깊이 받아들였으며, 그를 패(沛)의 남북도위(南北都尉)에 임명했다. 그 당시 백성들을 새로 모집하여 둔전을 개설했지만, 백성들은 달갑게 생각하지 않고 대다수가 도망쳤다. 원환이 태조에게 말했다.

백성들은 예로부터 향토에 안주하고 이주하는 것을 싫어하였는데, 이런 습속(習俗)은 갑자기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뜻에 따라서 행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거슬러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들의 의견을 따름이 마땅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자들을 즉시 받아들이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억지로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태조가 그의 의견에 따르자,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얼마 후에 태조는 원환을 양국(梁國)의 상(相)으로 승진시켰다. 원환은 매번 모든 현에 칙령을 내려 말했다.

홀아비나 과부 중에서 나이가 많은 자들을 잘 보호하고, 효자와 정절을 지킨 부인을 표창하라. 속담에 ‘세상이 잘 다스려지면 예교(禮敎)가 모두 상세하고, 세상이 혼란스러우면 예교가 소략해지고 태만해진다’라고 했는데, 상세하고 간소한 것은 전적으로 사람들이 요량하여 처리하는 데 달려 있다. 지금은 비록 소란스런 시대이므로 예의로써 민중을 교화하기가 어렵지만 우리들이 대처해 나가는 방법은 있을 것이다.


인의주의자답게 효를 중시해 나이 많은 홀아비와 과부를 공경하게 하면서 열녀와 효자를 찾아 표창하도록 했으며, 그의 정치는 교화와 훈계를 숭상하고 관대하게 생각한 이후에 실행했다.

겉으로는 온화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결단력이 있어 병으로 인해 관직을 사임했는데, 백성들은 그의 사임을 아쉬워했다.[6] 나중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간의대부, 승상군좨주가 되었다가 받은 상은 모두 나누어주거나 전지나 가업 같은 것에 관심이 없어 부족한 것이 있으면 남에게 꿨으며, 의혹을 살만한 행동을 하지 않아 모두 그의 청렴함에 감복했다.

위나라 건국 초기에는 낭중령, 어사대부가 되어 조조에게 내정 쪽으로 많은 조언을 했다. 원환이 조조에게 말했다.

이제는 천하의 큰 혼란이 제거되었으니, 문신(文臣)과 무신(武臣)을 나란히 등용하는 것이 국가를 오래 지속시키는 방책입니다. 생각해 보건데, 서적을 많이 수집하고 이전 시대의 성인의 가르침을 밝혀서 백성들이 보고 듣는 것을 바꾸어,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 교화풍조에 복속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복종하지 않는 먼 곳의 사람들도 문덕(文德)으로써 불러오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는 그의 진언이 옳다고 생각했다.

유비가 죽었다는 풍문이 들어오자 모두 다 기뻐했지만 원환만은 예전에 유비를 섬긴 적이 있었으므로 기뻐하지 않았다. 원환은 위나라가 건국된 지 얼마 안 되어 죽었는데, 조조도 그의 죽음을 슬퍼해 국가의 법대로 태창에서 1천석을 빼어 원환의 집에 주면서 자신 또한 궁중에 비축해놓은 1천말을 내려 친구간의 우정을 나타내었다.

사정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조조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조조는 다시 교령(敎令)을 내렸다.

내가 태창의 곡식을 사용한 것은 관청의 법이며, 궁중의 곡식을 이용한 것은 친구간의 우정을 나타냄이다.


또 조조는 원환이 옛날에 여포의 명령을 거부했던 일을 듣고 원환의 사촌 동생 원민(袁敏)에게 물었다.

원환은 어느 정도 용감한가?


원민이 대답했다.

원환의 외모는 온화하고 부드러우나, 대의(大義)가 걸린 상황에 직면하고, 위난(危難)에 처해서는 맹분(孟賁)과 하육(夏育)과 같은 고대의 용사(勇士)들도 그보다 더 용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동생 원민은 원환에 대해 평하길 외모는 온화하고 부드럽지만, 대의가 걸린 상황에 직면하고 위난에 처해서는 맹분과 하육과 같은 고대의 용사들도 그보다 더 용감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평했다. 허정과 친하게 지내면서 순심의 아들 순굉과는 의견이 달라 매번 싸웠다고 한다.

그의 후손으로는 원유(袁猷)[7], 원욱(袁勖)[8], 원굉(袁宏)[9] 등이 있다.

 

[1] 자는 공연(公然). 맑고 순수하며 조용하고도 소박한 사람으로 아버지의 면모가 있었으며, 군수(郡守)ㆍ상서(尚書)를 역임했다. 논의를 할 때에는 맑고 당당했고 유순하지만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올바른 태도를 지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과 원만한 교제를 했다. 나라가 망하고 흥하는 시기에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함께 일을 하자고 했지만, 그는 항상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의 그러한 인품을 높이 평가하여 칭송했다. 상서를 지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2] 원우는 자를 선후(宣厚)라 했으며, 치밀한 논리로 무장한 언변을 지녔으며 일의 핵심을 잘 파악했다. 특히 도가의 학설을 좋았지만, 어려서 병이 들어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3] 원오는 자를 공영(公榮)이라 했으며, 풍속을 장려하고 항상 이치에 맞는 말만 골라서 했다. 광록훈을 지내고 세상을 떠났다.

[4] 공정하고 엄격하며 공적과 재능이 있었으므로 위나라 초기에 대사농(大司農)이 되었고, 같은 군(郡)의 하기(何夔)와 나란히 명성을 알렸다. 원패의 아들 원량(袁亮)과 하기의 아들 하증(何曾)ㆍ원간 또한 일제히 세상에 이름이 있었고 서로간에 우의가 좋았다. 원량은 마음이 곧고 굳건하고 학식과 품행이 있었으며, 하안(何晏)과 등양(鄧颺) 등의 인물됨을 싫어하여 글을 지어 그들을 가혹하게 비판했다. 관직은 하남윤(河南尹)과 상서(尙書)까지 이르렀다.진제공찬에서 말하길 원량(袁亮)의 아들은 원찬(袁粲)으로, 자는 의조(儀祖)이다. 문학(文學)이 박식(博識)하여, 여러 유관(儒官)을 거쳐 상서(尚書)에 이르렀다.

[5] 무예에 뛰어났고 물을 다스리는 것을 잘하여 관직이 하제알자(河堤謁者)에 이르게 되었다.

[6] 다만 이 일에 대한 것과 《위서》에는 법령에 관한 그의 판단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했다. 곡숙장(穀熟長) 여기(呂岐)는 주연(朱淵)과 원진(爰津)을 유능하게 생각하여 공부를 시켯다가 돌아오자 그들을 불러서 등용하려고 했다. 서로 만난 자리에서 주연의 사우(師友)인 좨주(祭酒)가 관청의 바깥으로 나오자, 원진은 이미 좨주가 결정되었다고 의심했다. 주연 등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 관직을 받지 않았다. 크게 화가 난 여기는 관리와 백성들에게 주연 등을 잡아오게 하여 모두 때려죽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일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원환이 여기를 탄핵하지 말라고 하자, 주부 손휘(孫徽)등이 이렇게 따졌다. "주연 등의 죄는 죽을 만한 것이 아닙니다. 장리(長吏)가 자기 마음대로 죽인 것은 의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공자께서는 ‘그릇이나 이름만은 다른 사람에게 빌려줄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사우라고 말하는 사람을 죽였으니 이는 형벌과 이름이 서로 어긋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가르침으로 삼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원환은 이렇게 말했다. "주부가 그렇게 요청하지 않으면 그것이 죄가 된다. 그러나 주연 등이 죽을만한 죄가 아니라는 말은 잘못이다. 대체로 사우라는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있다. 그러므로 군주에게도 사우가 있으며, 사대부에게도 사우가 있다. 군주가 사우에게 관직을 줄 때는 그 신하를 공경하기 위함이다. 죄가 있어서 벌을 줄 경우는 국법을 준수하기 때문이다. 지금 그 죄를 논하지 않고 사우를 죽였다고 하는 것은 곧 잘못된 일이다. 주부가 제자를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죽였다고 하여 군주가 신하를 죽인 사실과 같다고 하지만 그것은 다른 일이다. 대체로 성현이 성철(聖哲)이 다스릴 때는 시의에 적절한 행동을 하게 되므로, 반드시 일상적인 기준에 따르지 않고 당시의 상황에 따르게 된다. 요즈음은 세상이 어지러워서 백성들이 윗사람을 함부로 능멸하므로, 비록 군주는 스스로 존중받고 신하는 자신을 낮추는 일에 힘을 써야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그러한 경우는 죽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렇듯 윗 사람의 명령을 아랫 사람이 따르지 않으면 작은 죄라도 죽일 수 있다고 인정한 경우도 있었다.

[7] 원굉의 조부로 동진 때 시중을 지낸 인물이다.

[8] 원굉의 아버지로 동진 때 임여령을 지낸 인물이다.

[9] 자는 언백(彦伯). 원환의 6대손으로 동진 때 건위참군, 안남사마, 기실참군 등을 지냈다.

[10] 허저의 형인 허정이 아닌 촉나라 태부인 허정이다.

 

원환 - 나무위키

어렸을 때 주위의 세도가의 자제들이 모두 법을 지키지 않아 자신들의 뜻대로 지냈는데, 원환은 청아하고 고요한 태도를 지키면서 반드시 예법에 따른 것으로 이름이 높아 군에서 그를 공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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