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중국 >

[삼국시대(동오)- "여몽"을 도와 관우를 사로잡은 인물]손교(孫皎)

Bawoo 2021. 1. 4. 18:54

손교(孫皎, 한어 병음 : Sun Jiao, ? - 219년[a])는 삼국 시대의 인물로, 오나라의 왕족 손정(孫靜)의 3남이다. 숙랑(叔朗)이다.

 

행적

처음에는 호군교위에 임명되어 2천여 명을 거느렸다. 조조(曹操)가 당시 여러 번 유수를 쳤는데, 매양 달려가 막아 정예로 칭해지고, 도호·정로장군으로 승진하고 정보를 대신하여 하구를 다스렸다. 황개(黃蓋)와 형 손유(孫瑜)가 죽은 후에 두 사람이 거느리던 군을 이어받았고, 사이, 운두, 남신시, 장릉을 봉지로 받았다.

척후병을 파견하여 위나라의 변경 장수와 미녀를 사로잡아 자신에게 바쳐졌는데, 그 의복을 갈아입히고 돌려보내며 다만 조씨를 주적으로 내세우고 위나라의 노약자는 공격하지 않는다고 하여 장강과 회수 사람들이 많이 귀의했다. 유비(劉備)가 촉을 손에 넣은 후 여몽(呂蒙)이 손권(孫權)의 명을 받들어 장사, 계양, 영릉 세 군을 강제로 돌려받은-유비 처지에서는 빼앗긴- 후에 여몽의 명으로 남아 뒷일을 처리했다. 여몽관우(關羽) 몰래 남군을 치려 하자, 손권은 손교로 더불어 좌우 부대의 총 지휘관으로 세우려 했으나, 여몽이 주장은 한 명만 내세워야 한다고 하였으므로 여몽이 총 지휘관이 되고 손교는 뒤를 잇게 했다. 관우를 사로잡고 형주를 평정할 때, 손교는 힘을 냈다. 건안 24년(219년), 죽었다. 그 공로로 아들 손윤(孫胤)은 단양후에 봉해졌다.

 

인물

재물을 경시하여 능히 베풀 수 있었고, 교우를 맺는 데 뛰어나 제갈근(諸葛瑾)과 두터운 관계에 이르렀다. 사소한 일로 감녕(甘寧)과 불화가 있어 손권의 꾸짖음을 받자, 상소하여 사죄하고 감녕과 두터운 교분을 맺었다.

친족 관계

  • 손정 (아버지)
    • 손호(孫暠) (형)
    • 손유
    • 손교
      • 손윤(孫胤) (아들)
      • 손희(孫睎)
      • 손자(孫咨)
      • 손미(孫彌)
      • 손의(孫儀)
    • 손환 (아우)
    • 손겸(孫謙)

손희는 형 손윤이 아들이 없이 죽었으므로, 그 뒤를 잇고 그 병사를 거느렸다. 죄를 지어 자살해, 봉국은 삭제되었다.

손자는 우림독이 되었으며, 후에 등윤에게 살해당했다.

오봉 2년(255년), 손의는 손준(孫峻)을 암살하려 했다가 들통나 역으로 당했다.[위키백과]

----------------------------------------------------------------------------------------------

후한 말의 인물로 손견의 동생 손정의 삼남이자 손유의 동생으로 손책손권에게는 사촌동생[1]이 된다. 자는 숙랑(叔朗).

형인 손유가 처음으로 군사를 통솔할 때 공의교위일 때 손교는 호군교위로 2천명을 이끌고 시작했으며, 조조가 유수를 칠 때마다 달려가서 전공을 세우니 정예(精銳)라는 호칭을 얻고 도로정호장군이 되어 정보를 대신해 하구를 다스리게 된다. 또한 황개와 형 손유가 죽은 뒤에는 그 둘의 군사도 합쳐서 거느리게 되는데다가 사선, 운두, 남신불, 경릉이 그의 식읍이 되고, 거기에 스스로 장리를 둘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게 된다.

손교는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하면서 친구 사귀는데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 제갈근과 친한 사이였고 부하 유정에게는 일의 득실, 이윤에게는 일반적인 사무, 오석, 장량에게는 군대를 맡기고 친구처럼 대하니 그들이 뼛속까지 충성했다고 한다.

한 번은 척후병들이 정찰을 나갔다가 위나라 땅에서 미녀들을 잡아다 바쳤는데, 손교는 오히려 여자들에게 옷을 갈아입히고 돌려보내면서 말하길

지금 우리가 주살하려는 자는 조씨(曹氏)이거늘 그의 백성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지금부터는 그의 노약자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이 덕분에 장강과 회수의 많은 자들이 귀순했다. 술자리에서 감녕과 싸워 사이가 급격히 틀어졌는데, 손권의 중재로 화해하고 다시 감녕과 친구가 된다. [2]

유비가 촉에 들어간 뒤 익양대치에서 여몽이 편지 두 장과 공갈로 얻은 장사, 계양, 영릉 땅을 여몽의 명령으로 뒷처리를 한다. 후에 관우가 지키는 남군을 습격하려고 할 때 여몽과 함께 좌우도독이 되려고 했으나 여몽이 적벽대전 때 정보와 주유의 예를 들며 설명하자 손교는 후속 부대가 되어 형주를 정벌할 때 큰 공을 세우며, 219년에 세상을 떠난다.[Sun Jiao earned numerous merits in the campaign, but not long after Guan Yu's execution, he died of sudden illness 

삼국지연의에서는 형주를 정벌할 때 보급만 담당했다.

[손교(숙랑, 叔朗)오의 종친. 자는 숙랑(叔朗). 손정(孫靜)의 아들이자 손권의 사촌 아우. 건안 24년(219), 손권은 형주를 빼앗기 위해 그와 여몽에게 함께 대군을 맡기려고 했다. 하지만 여몽으로서는 그가 종친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견제를 받지 않을까 염려되었다...[삼국지사전]

 

[1] 후술할 손권의 편지(212년 경)에서 손교에게 곧 30살 될 것을 운운하는 걸 보아 손권보다 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손교도 오나라의 요절징크스의 일원인 셈.[2] 그러나 이미 손교를 성격 급하고 싸움만 하는 인물로 만든 창천항로에서는 이 사건도 손교가 성격이 더러워서 감녕한테 감히 싸움을 건 인물이라면서 나온다. 다만 손교전에 의하면 감녕이 손교와 항렬이 하나 차이(즉 세대 하나 차이; 대략 10~12년 차이로 볼 수 있다.)나는데 예의가 없다고 따지며 여몽 휘하로 가기를 청하니, 이에 손권이 손교를 편지로 꾸짖는 것으로 보아 손교가 감녕에게 시비를 먼저 건 것일지도 모른다. 손교뿐 아니라 관우토벌 직후 사서에서 언급이 없거나 병사한 오의 장수들을 죄다 전사처리 해버렸다.[나무위키에서 발췌]

 

[정보]

정사 삼국지: 오서(양장본 HardCover):저자 진수 | 역자 김원중 | 휴머니스트

수많은 영웅의 진면목을 보다! 우리가 흔히 《삼국지三國志》라고 부르는 것은 나관중羅貫中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이다. 원래 《삼국지》는 진수陳壽가 편찬한 것으로, 중국의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