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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이전 혼란기(후한 말)-조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도망하다 잡혀 처형된 뒤 기림을 받은 인물]저수(沮授)

Bawoo 2021. 1. 20. 20:26

저수(沮授, ? ~ 200년)는 후한 말기의 관료로, 기주 광평군 사람이다. 기주 원소를 섬겨 세력 구축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미움을 사 좌천되었다. 

생애

 

저수(沮授)
후한
? ~ 건안 5년(200년)
기주 광평군
기주별가(冀州別駕) → 현령(縣令)
→ 현령(縣令) → 기주별가(冀州別駕)
· 기도위(騎都尉)〔한복〕
→ 감군(監軍) · 분위장군(奮威將軍)[1]〔원소〕
→ 도독(都督)〔원소〕
한복원소

젊을 때부터 큰 뜻을 품었고, 권모술수에 뛰어났다. 처음에는 기주별가(冀州別駕)를 지냈고, 이후 두 현[2] 에서 현령(縣令)을 지냈다. 훗날 기주목(冀州牧) 한복(韓馥)의 휘하에서 별가(別駕)·기도위(騎都尉)로써 그를 섬겼다.[3]

초평(初平) 2년(191), 한복이 원소(袁紹)에게 기주를 양도하려고 하자 다른 모사들과 더불어 이를 만류하였으나 한복은 듣지 않았다. 결국 원소가 기주를 차지하자, 저수는 그대로 원소를 섬겼다. 저수는 기(冀) · 청(靑) · 유(幽) · 병(幷) 4주(州)를 평정한 뒤 장안(長安)에 황제를 맞이하고 낙양(洛陽)의 종묘를 부활시킨다는 전략을 원소에게 설명하여 원소에게서 극찬을 받은 뒤, 감군(監軍)[4] · 분위장군(奮威將軍)[1] 에 임명되었다.[5]

흥평(興平) 2년(195), 저수는 원소에게 헌제(獻帝)을 맞이할 것을 진언했으나, 곽도(郭圖) 및 순우경(淳于瓊)이 이에 반대하였다. 원소도 동탁(董卓)이 옹립했던 헌제를 맞이하는 것에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저수의 진언은 수용되지 못했다. 이것은 [삼국지] 위서 원소전의 주석을 인용한 [헌제전], [후한서] 원소전에 나온다.[6]

건안(建安) 4년(199), 원소는 공손찬(公孫瓚)의 세력을 흡수하고 4주를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조조(曹操)에 대한 전략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는데, 저수와 전풍(田豊)은 지구전 전략을 주장했으나 곽도와 심배(審配)는 단기전 전략을 주장했다. 원소는 결국 곽도와 심배를 지지했다. 또한 이때 곽도가 저수의 위세가 굉장하다는 것을 참언하였고, 이로 인해 감군의 지위와 권한은 3명의 도독(都督)이 다스리는 체제로 분할되어 저수·순우경·곽도가 도독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저수는 원소가 장남 원담(袁譚)을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임명하는 것에 대해 이것은 훗날 화를 키울 것이라며 그만둘 것을 주장하였으나, 원소는 듣지 않았다.

건안 5년(200년), 관도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저수는 원소의 패배를 예상하고 동생 저종(沮宗)을 비롯한 일족에게 재물을 나눠주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원소는 곽도·순우경·안량(顔良)에게 명하여 백마(白馬)에 주둔한 동군태수(東郡太守) 유연(劉延)을 공격하게 했다. 저수는 안량은 용맹하지만 도량이 좁아 단독 작전에는 부적절하다고 원소에게 진언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저수의 말처럼 안량은 백마에서 판단을 그르쳐 적중에 고립되고 말았고, 이윽고 조조군 진영에 있던 관우(關羽)에게 죽임을 당했다. 또 원소가 황하를 건너 연진(延津)으로 향하자 저수는 병을 이유로 지휘권을 반납하였기 때문에 원소는 분노하여 저수 휘하의 군을 곽도에게 배속시켰다.

조조군이 관도로 퇴각하자 저수는 재차 지구전을 진언했다. 원소는 거절했으나 조조와 교전을 벌여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순우경이 병량의 호위를 맡았을 때 저수는 순우경만으로는 위험하니, 장기(蔣奇)에게 별동대를 인솔하게 하여 수비에 만전을 기할 것을 원소에게 진언했으나 원소는 이것도 거절했다. 순우경은 오소(烏巢)에서 조조에게 습격당해 궤멸당했고, 허유(許攸)가 원소를 배반하고 조조에게 원소군의 진중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였다)되었고, 이로 인해 원소군은 무너지고 말았다. 저수는 황하를 건너는 것이 늦어져 조조군에게 생포되었다. 조조는 저수에게 자신의 밑으로 들어올 것을 권하였으나 저수는 거절하였고, 이후에도 조조는 그를 후하게 대접하였으나 저수는 탈출하려 하였다. 결국 저수는 조조에게 처형당하였다.

후세의 평가

《삼국지위서》 원소전의 주석에 따르면 역사가 손성은 [전풍, 저수의 지모는 옛 전한의 건국공신 장량, 진평에 필적할만한 것이다]라고 극찬하였다. 사실 4주 평정까지는 순조로왔던 원소가 건안 4년 이후 저수의 진언을 특히 무시하면서부터 그의 추락이 시작되었다. 관도 전투에서도 저수의 진언을 받아들였다면 승패는 역전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말도 있었다.

일반적인 저수의 이미지는 문약한 참모의 이미지였으나, 실제로는 감군 및 도독을 맡았던 것을 보더라도 매우 탁월한 전략안을 가진 군사령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야기 속의 저수[편집]

《삼국지연의》에서 저수는 처음 한복의 부하였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거의 사실(史實)과 비슷한 생애를 보내어 비극의 참모로써 사라지는 그의 모습이 묘사되었다. 다만 조조와의 전투에서 지구전 전략이 원소에게 받아들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다른 무장들과 연대하지 않는 장면도 있다.

관도 전투에서 지구전 전술을 설명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구금당할 때 불길한 별이 출현하자 이것을 원소에게 알렸지만 무시되었다. 원소가 패배하자 저수는 조조의 항복 권고을 뿌리치고 죽음을 선택한 것은 사실과 같다. 조조는 [충렬저군지묘(忠烈沮君之墓)]라고 새겨진 묘를 황하의 건너는 장소에 세워 그의 죽음을 기렸다.

가계

관련 인물

저곡 저종

각주

  1. 이동: 가 혹은 분무장군(奮武將軍)이라고도 한다.
  2. 현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3. 진수(3세기),《삼국지》〈권6 원소전(袁紹傳〉(이하, “〈원소전〉”) “《獻帝紀》曰:沮授,廣平人,少有大志,多權略。 仕州別駕,舉茂才,歷二縣令,又為韓馥別駕,表拜騎都尉。”
  4. 원소군 고유의 관직으로, 총사령관격 관직이다.
  5. 〈원소전〉 “紹喜曰:「此吾心也。」即表授為監軍、奮威將軍。”
  6. 다만 《삼국지》 위서 원소전 본전에 따르면, 헌제 옹립을 진언한 이는 곽도라고 기록되어 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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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2. 평가[편집]

일반적인 저수의 이미지는 문약한 참모의 이미지였으나, 실제로는 감군 및 도독을 맡았던 것을 보더라도 매우 탁월한 전략안을 가진 군사령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군에서 문관으로 와전된 케이스.

원소가 한복의 관료들을 숙청할 때, 숙청되지 않은 몇 안되는 관료다. 또한 관도대전 당시 공융의 원소 휘하 인재들의 장점을 논할 때 순욱이 논파하기 위해 공융이 거론한 네임드 인물들의 단점을 논하는데, 유일하게 언급되지 않은 인물이다. 저수의 지위를 생각할 때 순욱이 깜박하거나 아예 모를 리는 없다. 물론 그 외에도 비판이 생략된 네임드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경우 순욱의 가족이거나 동문인 등, 공융이 일부러 언급을 피했거나 원소군 멸망 후 비판 내용이 삭제되었을 대상들이다. 이때 순욱이 평한 인재들은 딱 순욱의 평이 원인이 되어 최후를 맞은 만큼, 순욱의 원소군 인재 파악은 놀라울 정도였다.[4] 그런데 별 다른 특별한 이유가 보이지도 않는데 저수에 대한 평가만 쏙 빠졌다는 점에서 딱히 부정적인 평가를 할 만한 게 없었다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상당히 소름 물론 공융이 저수를 그냥 거론하지 않았기에, 순욱도 저수의 단점도 알고 있음에도 일부러 논외로 쳤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본인의 능력은 좋아 보이지만, 이상하게 윗사람에게 인정은 못 받는다. 한복 휘하에서부터 저수의 진언은 이상할 정도로 거의 무시를 당한다. 이 문서만 봐도 한복과 원소에게 총 7번이나 무시 당한다. 결과적으로 그의 말이 대부분 옳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삼국지의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주인복이 없는 인물. 이쯤되면 불쌍할 지경.

원소전의 주석에 따르면 역사가 손성은 전풍, 저수의 지모는 옛 전한의 건국공신 장량, 진평에 필적할만한 것이다라고 극찬하였다. 사실 4주 평정까지는 순조로왔던 원소가 건안 4년 이후 저수의 진언을 특히 무시하면서부터 그의 추락이 시작되었다. 관도 전투에서도 저수의 진언을 받아들였다면 승패는 역전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말도 있었다. 어떻게 본다면 원소의 순욱이라고 볼 수도 있는 부분이다.

저수가 의외로 황권과 좀 닮은 면이 있다. 어리석은 원 주군(한복/유장)에게 자기네 땅을 넘보는 야심가(원소/유비)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간언했지만 들어주지 않았고, 그렇게 반대하는 입장이었음에도 오히려 그 새 주인의 총애를 받았다. 그렇게 새 주인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전투(하북 평정/한중 공방)에서 활약하고 VIP(헌제/장로)의 인터셉트를 시도한 바 있으나 둘 모두 이루지 못했고...[5]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실수가 될 원정(관도/이릉)에서 신중론을 주장했으되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참패 후 미귀환 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다만 그 최후의 차이가 극명한데, 저수는 조조에게 붙잡힌 후 자신을 섬기도록 권고 받았지만 거절하여 죽음을 맞았고,황권은 제3세력인 조비 쪽으로 넘어가 비교적 잘 먹고 잘 살았다. 황권의 경우. 황권 자신도 조비에게 넘어간 뒤에 여전히 유비에 대한 충정이 남아있는 모습을 보였고 유비 또한 황권의 가족을 해코지 하지 않음으로 그 믿음에 화답하는,미담에 가까운 이야기를 남긴데 비해...잡힌 뒤에도 마치 황하 저편으로 토낀 주군 들으란듯이 자긴 항복한 게 아니란 걸 강조하고,가족들의 신변을 걱정해 죽음을 택한 저수 쪽의 사정은 상당히 씁쓸하다. 전투 시작도 전부터, 이기든 지든 자기는 이미 끝났다고 직감해 재산을 처리했다는 부분까지 보면 더더욱...

황권의 아들 황숭등애를 상대로 최후까지 항전하다 순국한 것은 유명하지만, 저수의 아들인 저곡도 원상의 부하로서 대를 이어 계속 원가를 위해 싸웠다는 점까지 닮았다. 깨졌다는 기록 한 줄 뿐이고 정확한 최후는 알 수 없지만.

사실 이 둘은 완전히 비슷한 입장도 아닌 것이. 촉이 비록 이릉대전에서의 패배 이후 휘청거렸다 하나 어쨌든 제갈량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국가재건에 나서 세력을 보존하는데 성공한 하나의 나라인 반면, 관도 패배 이후의 원가는 한조라는 한울타리 내에서 정통인 허도 정권에 대해 명분적 실질적 우위를 모두 상실한, 확실하게 기울기 시작한 배였다.

게다가 저수의 행적들로 보아 원가와 그렇게 끈끈한 유대가 있거나 은혜를 입지도 않은 것 같지도 않은데, 온갖 형태의 배신이 속출하던 하북 평정 시기에, 그 저수의 아들이 평범하게 원상의 부하로서 조조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는 점은 조금 놀라운 것도 사실이다. [namu.wiki/w/저수 나무위키 에서 발췌]

 

 

[정보]책-정사 삼국지: 오서(양장본 HardCover)시리즈

저자 진수 | 역자 김원중 | 휴머니스트 | 2018.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