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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조위)-조방의 두번 째 황후인 장황후의 아버지, 사마소를 제거하려다가 실패하고 멸족된 인물]장집(張緝)

Bawoo 2021. 1. 27. 21:48

장집(張緝, ? ~ 254년)은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문신으로, 자는 경중(敬仲)이다. 장기의 아들이며, 장황후의 아버지이다.

행적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하여 서향후(西鄕侯)가 되었으며, 태화(太和) 연간(227년-233년) 온현령(溫縣令)이 되었다. 기도위(騎都尉) · 상서랑(尙書郞) · 동관태수(東莞太守) 등을 역임하였다.

가평(嘉平) 4년(252년) ,딸이 황제 조방의 황후가 되자 광록대부(光祿大夫) · 위특진(魏特進)이 되었으며, 당시 외척이 지는 관례에 따라 태수직을 물러났다. 장집은 재물욕은 없어도 권력욕은 있었는데, 은퇴하게 되었으므로 염려하며 자주 (吳)와 (蜀)의 사정을 진술하고, 사마사(司馬師)의 물음에 답하고, 제갈각(諸葛恪)이 승리하지만 곧 살해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가평 6년(254년), 하후현(夏侯玄) · 이풍(李豊) 등과 함께 사마씨의 수장 사마사를 죽이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가계

관련 인물

장기 장황후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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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사전]

인명. 위주 조방의 아내인 장황후의 부친. 풍익(馮翊) 고릉(高陵: 지금의 섬서성 고릉) 사람으로,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지냈다. 위 가평(嘉平) 6년(254) 위주 조방이 사마사의 권력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장집과 태상 하후현, 중서령 이풍 등과 함께 비밀리에 사마사를 죽이기로 모의한다. 그러나 세 사람이 궁을 나서다가 사마사에게 불심검문을 당하고, 장집의 몸에서 조방의 밀서가 발견되는 바람에 모두 목숨을 잃는다. 아울러 삼족도 멸문의 화를 당한다.(108회)

 

참고

* 『삼국지 · 위서 · 하후현전(夏侯玄傳)』에 의하면, 이풍은 기회를 보아 사마사를 죽인 다음, 하후현에게 사마사의 직위를 대신하고 장집을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이풍이 살해된 후 장집과 하후현은 동시에 잡혀 죽었다.

[글-선뿨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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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에서 발췌- 정사 삼국지: 위서에 나온 내용 그대로이다]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자는 경중(敬中). 장기의 아들, 폐후 장씨의 아버지, 조방의 장인.

장즙이라고 나온 책도 있지만 장집이 옳다.

2. 생애[편집]

태화 연간(227 ~ 233년)에 온현의 현령이 되었고, 정치적 재능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갈량이 한중으로 진군하자 장집은 마침 시기적절한 의견을 냈는데, 조예가 조서를 내려 중서령 손자에게 판단을 구하자 계략이 풍부하다고 말하니 그를 불러 기도위로 임명해 촉 정벌군에 참가하도록 했다.

싸움이 끝나 중앙으로 들어와 상서랑이 되었는데, 직무에 성실했으므로 조예의 눈에 띄었다. 조예는 장집의 재능이면 다방면으로 임용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관상을 보는 사람을 불러 그의 관상을 보도록 했다. 관상보는 이는

이천 석에 불과합니다.

라고 하였지만 조예는

재능이 이와 같은데 어찌 관직이 이천 석에 그치겠는가?"

라고 했다.

동완에서 재임하던 중에는 수천 명의 병사를 통솔했는데, 장집의 성격은 재물에는 인색했지만 권세에는 힘써 하루 아침에 딸이 황후로 들어가게 되어 군을 떠나게 되자 실무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하는 관례에 따라 군 태수의 자리를 떠나 사저로 돌아가 걱정을 하며 자주 국가를 위해 오와 촉의 공격상황을 진술했다.

오나라의 제갈각이 권력을 잡고 변방 지역에서 승리를 얻자 사마사는 장집에게 의견을 묻는데, 장집은 제갈각이 곧 살해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사마사가 그 이유를 묻자 장집은

위광은 그 군주를 떨치고, 공적은 한 나라를 덮고 있습니다. 죽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니 제갈각이 합비에서 돌아오자 오나라는 과연 그를 죽였다.

장집은 중서랑에서 승진해 동완태수가 되었으며, 가평 연간(249 ~ 254년)에 그의 딸이 황후가 되었으므로 조예는 그를 불러 광록대부로 임명했으며, 또한 특진(特進: 삼공 다음의 지위)으로 임명하면서 처 향은 안성향군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254년 2월 12일에 장집은 이풍, 하후현, 소삭, 악돈, 유보현 등과 함께 사마사를 암살하고 장집 자신은 표기장군이 되기로 한 계획이 발각되자 처형되면서 삼족이 멸해졌다.

호삼성은 제갈각을 평가한 그의 말에 대해서 논하였는데, "장집이 제갈각을 헤어린 것은 비록 적중했지만 장집도 끝내 사마사에게 죽었으니 사마사가 정치를 전횡하여 재주있고 지혜로운 자를 시기했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질시했으니 하물며 장집같이 빛나는 사람은 어땠겠는가?" 라고 논했다.

[1] 원술의 부하 이풍, 이엄의 아들 이풍이 아닌 위나라 관료 이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