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완(蔣琬, ? ~ 246년)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신료로, 자는 공염(公琰)이며 영릉군 상향현 사람이다. 제갈량(諸葛亮), 비의(費禕), 동윤(董允)과 함께 촉의 사상(四相)으로 꼽힌다. 시호는 공후(恭侯)다.[1]
생애
약관의 나이에 천릉에 사는 외종제 유민(劉敏)과 함께 이름이 알려졌다.
장완은 주서과의 신분을 지니고 유비(劉備)를 따라 촉 땅으로 들어가 광도현의 장이 되었다. 일찍이 유비가 촉나라 땅을 돌아보던 중 광도현을 방문하게 됐는데, 장완이 맡은 집무를 해결하지 않은채, 술에 취해 있는 것을 보고는 매우 노여워하여 장완을 처벌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 당시에는 군사장군으로 있던 제갈량이 유비에게 간청하며 건하였다.
"장완은 국가의 그릇이지, 백리를 다스릴 인재가 아닙니다. 그의 정무 처리는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며, 외양(=겉모습0을 장식하는 것을 우선시하지 않습니다. 원컨대 주공께서는 다시 살펴 주십시오."
유비는 제갈량을 아꼈으므로 제갈량의 간언을 받아들여 장완을 벌하지 않는 대신 그에게 제수하였던 관직을 박탈했다.
장완은 면직된 후 한밤중에 소 한 마리가 문앞에서 머리에 피를 철철 흘리는 꿈을 꾸었는데, 이를 매우 언짢아하여 해몽가인 조직(趙直)을 찾아가 해석을 부탁하였다.
조직이 장완의 꿈을 해석하기를,
"대체로 피를 보는 것은 일이 분명해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소의 뿔과 귀는 '공(公)' 자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 당신의 지위는 반드시 공(公)에 이를 것입니다. 아주 길한 징조입니다."
해몽이 맞았는지, 과연 장완은 오래되지 않아 십방(什防)의 현령이 되었다가,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성도로 들어가 상서랑이 됐다.
건흥 원년(223년)에 승상 제갈량은 문무관원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고, 장완을 초빙하여 동조연(東曺椽)으로 임명했다.
장완은 무재에 천거되었으나 그는 간곡하게 사양하며 유옹(劉邕)·음화(陰化)·방연(龐延)·요순(廖淳)를 대신 추천하였다. 듣다못한 제갈량은 장완을 일깨워 주었다.
"공염, 그대는 생각해 보십시오. 가까이 있는 자를 배반하고, 도덕을 버리고, 백성을 파멸시키는 것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동정하지 않습니다. 사실, 또 멀고 가까운 사람들은 그 사퇴하려는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그대는 자신의 공업과 덕행을 나타내어 이 선발의 타당성과 중요성을 증명해야 합니다."
건흥 5년(227년)에 장완은 참군으로 승진했으며, 제갈량이 한중에 주둔하고 있던 때에는, 장사 장예(張裔)와 함께 부에 남아 국정을 총괄했다.
건흥 8년(230년) 장예(張裔)가 죽자 장예를 대신하여 장사가 되었고, 이에 무군 장군의 벼슬이 더해졌다. 제갈량은 위나라를 치기 위해 자주 북진하였지만, 장완은 매번 군량과 군수물자 그리고 병사를 충분히 지원해 주었다.
제갈량은 항상 이렇게 말했다.
"공염(장완)은 품은 뜻이 곧고 인품음 충성스럽고 예스러우며 아담하니, 나와 함께 제왕의 대업을 도울 사람이구나."
제갈량은 또한 은밀히 표를 올려 유비의 아들인 황제 유선(劉禪)에게 고하였다.
"신에게 만일 불행이 있게 된다면, 훗일은 응당히 장완에게 맡기십시오."
건흥 12년(234년) 끝내 제갈량이 세상을 떠나자 장완은 상서령에 임명됐으며, 오래 가지 않아 관직을 더하고 도호를 대행하도록 했다. 또한, 장완에게 부절을 내려 제갈량의 병권을 이어받도록 했고, 더불어 익주자사를 겸임시켰다. (도호에 대한 각주가 덧붙여져야 되겠다)
장완은 승진하여 대장군과 녹상서사(錄尙書事)를 지냈으며 안양정후(安陽亭候)로 봉해졌다. 당시 제갈량이 막 세상을 떠난 시점이었으므로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동요했으나, 장완만은 슬퍼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았으며, 정신과 행동이 차분하고 평상시와 같아 사람들은 장완을 믿고 따랐다.
연희 원년(238년)에 유선이 장완에게 조서를 내렸다.
"지금은 우리 나라에 끊임없이 적이 침입하고 있고, 위나라의 황제 조예(曹叡)는 교만하고 흉악한 사람이다. 마침 요동의 세 군이 그의 포악함으로 인해 그와 떨어져 있게 되자, 조예가 마침 대군을 일으켜 서로 공격하여 토벌하도록 명령한 상태다. 옛날에 진시황(秦始皇)이 죽은 후 진(秦)이 멸망한 것은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오늘 위나라의 이 변란은 하늘이 내린 기회이다. 그대는 전쟁 준비를 하여 군사들을 통솔해 한중에 주둔하고, 동맹국인 오의 행동을 기다렸다가 서로 호응하여 틈을 타서 행동하라."
때문에 장완에게 북벌 수행에 필요한 부서를 개설하도록 지시했다. 이듬해 장완은 대사마로 승진했다. 동조연 벼슬에 있던 양희(楊戱)는 평상시의 성품이 간략하였데, 그는 장완과 대화를 나눌때 항상 응답하지 않았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양희를 헐뜯으며 장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께서 양희와 말을 나누었지만 대답을 듣지 못한 것은 양희가 윗사람을 무시하는 심한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장완은 이렇게 답했다.
"사람이 마음이 다른 것은 사람마다 얼굴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순종하고 속으로는 악언을 하는 것은 옛 사람들이 경계했던 것입니다. 양희가 나의 생각이 옮다고 찬성한다면 그것은 본심이 아닌 것이고 반대했다면 자신의 과오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가만히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태도입니다"
또한 어느 날은 독농(督農) 양민(楊敏)이 장완을 이렇게 비방한 적이 있었다.
"장완은 일하는 것이 모호하여 진실로 이전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양민의 이 말을 장완에게 말했다. 일을 주관하는 사람은 양민에게 벌을 내릴 것을 청했으나, 장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확실히 이전 사람만 못하므로 추궁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자 일을 주관하는 사람이 이번에는 장완의 모호한 일처리에 대하여 추궁하려고 했다. 그러자 장완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진실로 이전 사람만 못하다면 이 일을 처리하지 못할 것이며, 이 일이 응당 처리되지 못할 때에야 일을 모호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무엇을 심문하려고 하십니까?"
후에 양민이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을 때, 사람들은 양민이 반드시 죽게 될거라며 두려워했다. 그러나 장완은 사사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심없이 양민을 판결하여 양민은 중죄를 면했다. 장완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과 도의의 태도는 모두 이와 같았다.
장완은 과거에 제갈량이 북벌을 수행 했을 때, 육로를 통한 보급이 수월하지 못했던 사실을 거울삼아 한수와 면수의 급류를 타고 위흥과 상용을 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평소 앓고 있던 지병이 연속으로 도졌고, 더불어 다른 신하들 또한 승리하지 못하면 돌아올 수 없으므로 좋은 계책이 되지 못한다 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장완은 상서령 비의, 중감군 강유(姜維) 등을 보내 황제 유선에게 자신의 의견을 설명하도록 했다.
장완이 상소를 올려 고했다.
"세상에 만연한 독을 제거하고 재난을 없애는 것은 신이 처리할 일입니다. 폐하의 명령을 받아 한중에 주둔한 지 벌써 6년이 되었으나 신은 어리석고 무능한데다가 열병까지 겹쳐서 이를 실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아침저녁으로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현재 위나라는 아홉 주를 차지하고 세력을 뻗치고 있어 이기기 힘듭니다. 만일 오나라와 힘을 합쳐 앞뒤로 호응한다면 영토를 뜻한 대로 신속하게 얻을 수는 없겠지만 잠시나마 위나라의 힘을 훼손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나라와의 약속을 연이어 한 후 승리할 수는 없는 일, 전진하는 것도 후퇴하는 것도 어려워 실로 침식을 잊게 합니다. 저는 비의 등과 이미 상의하였습니다. 적군은 촉나라 땅을 넘보고 있고, 강족과 호족은 여전히 촉나라 땅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과거 위나라 옹주자사 곽회(郭淮)가 패하여 달아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의 장단점을 헤아려 보면, 양주를 우선 점령해야 하므로 응당 강유를 양주자사로 임명해야만 합니다. 만일 강유가 출정하여 하우성을 제압한다면, 신은 군대를 인솔하여 강유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지금 부현은 바다와 육지가 사방으로 통해 있으니, 긴급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호응할 수 있을 겁니다. 만일 동북쪽으로 어떤 일이 있다면, 앞으로 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로부터 장완은 곧 부현으로 돌아가 주둔했고 급류를 이용한 신속한 진군을 위한 계책을 다시 실행에 옮기려고 하였지만, 병이 더 심해져 연희 9년인 246년 결국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공(恭)이었다.
장완의 친족들
아들 장빈(蔣斌)이 뒤를 이었고, 수무장군(綏武將軍) · 한성호군(漢城護軍)에 임명됐다.
263년 위나라의 촉 토벌이 시작되었을 때 위나라의 대장군 종회(鍾會)가 한성(漢城)에 도착하여 장빈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파(巴)와 촉(蜀) 땅에는 재능과 지혜를 겸비한 인재들이 많은데, 그대 역시 제갈사원(제갈량의 아들 제갈첨) 때에 이르러서는 초목에 비유되며, 나와 똑같은 천지의 기(氣)를 받았습니다. 옛 선인에 대한 존경은 지금이나 과거나 중시했던 일입니다. 서쪽에 도착하면 그대 부친(장완)의 산소를 찾아가 받들어 인사하고, 묘지를 깨끗이 청소하여 경의를 표하려고 합니다. 선친의 산소 위치를 알려주기 원합니다!"
이에 장빈은 답장을 보냈다.
"같은 부류로써 선친의 묘지를 찾아보려는 생각이 융성함을 알았습니다. 세상 일들을 떠나 의뢰하거나 교류할 경우는 거절할 수 없습니다. 제 부친께서는 과거에 중병으로 부현에서 세상을 떠나셨는데, 점쟁이가 사람의 묘지의 길(吉)함을 점쳐서 부현에 안장시켰습니다. 그대가 서쪽으로 간다는 것을 알았으니, 수레를 굽혀 선친의 묘지를 가지런히 하고 경의를 표해 주십시오. 그대가 나를 보는 것처럼 나의 부친을 대하는 것은 안자(顔子)의 어짊입니다. 나는 그대가 상심하여 슬퍼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선친이 그리워졌습니다."
종회는 장빈의 답장을 받고, 그의 마음을 찬탄하였다. 부현에 도착한 후, 편지에서 말한 것과 같이 행동을 했다. 유선이 등애(鄧艾)에게 투항한 후 장빈은 부현에 있는 종회에게 갔는데, 종회는 장빈을 교우의 예절로써 대해주었다.
장빈은 종회를 따라 성도에 도착했지만 난리를 일으킨 병사에게 살해됐다. 장빈의 동생 장현(蔣顯)은 태자복(太子僕)의 직책에 있었는데, 종회는 그의 재능과 학문 역시 아꼈으며, 장빈과 같은 때에 죽었다 유민은 좌호군(左護軍) · 양위장군(揚威將軍)이 되어 진북대장군 왕평(王平)과 함께 한중을 지켰다.
244년 위나라가 대장군 조상(曹爽)을 보내 촉을 습격했을 때, 군사 회의를 논의하는 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성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나가서 적과 대항하지 않을 수 있다면, 틀림없이 자진해서 퇴각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유민은 남녀를 들녘으로 내보내 농사를 지으며 그곳에 있게 하고, 적의 침입을 허락하면 한중을 잃게 될거라고 생각하며 왕평과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흥세산(興勢山)을 점령하고, 수많은 기를 꽂아 백여리까지 이었다. 마침 대장군 비의가 성도로부터 도착하여 위나라 군대는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유민은 공로가 있어 운정후(雲停候)로 봉해졌다.
장완의 친족관계
관련 인물
- 반준
-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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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한의 재상이다. 장빈과 장현의 아버지로 자는 공염(公琰)이며 영릉군 상향현 사람이다.
제갈량의 뒤를 이어 약 12년간 촉한의 실질적 1인자 역할을 하였으며, 사후엔 비의가 그 역할을 이어받게 된다. 이 세 사람에 동윤을 더해서 촉한의 사상(四相), 사영(四英)이라고 불렸다.
2. 정사[편집]
약관의 나이에 천릉에 사는 외종제 유민과 함께 이름이 알려졌으며 장완은 주서과의 신분으로 유비를 따라 촉 땅으로 들어가 광도현의 장이 되었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유비가 일찍이 유람하다가 갑자기 광도현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장완이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술에 취해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노여워하며 처형하려고 했다. 그러자 군사장군 제갈량이 유비에게 간청하며 말했다.
"장완은 국가의 그릇이지, 백리를 다스릴 인재가 아닙니다. 그의 정무 처리는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며 겉모습을 장식하는 것을 우선시하지 않습니다. 원컨대 주공께서는 다시 살펴 주십시오."[1]
유비는 제갈량을 아꼈으므로 제갈량의 말을 들어 장완을 벌하지 않는 대신 관직을 박탈했다. 장완은 면직된 후 한밤중에 소 한 마리가 문앞에서 머리에 피를 철철 흘리는 꿈을 꾸자, 매우 언짢아하여 해몽가인 조직[2]을 불러 물어보았다. 조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체로 피를 보는 것은 일이 분명해졌음을 의미합니다. 소의 뿔과 귀는 '공(公)' 자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 당신의 지위는 반드시 공(公)에 이를 것입니다. 아주 길한 징조입니다."
오래지 않아 장완은 십방현의 현령이 되었다가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성도로 들어가 상서랑이 됐다.
하지만 유비에게 광도현 사건으로 밉보였는지 중용되지는 못했다. 더불어 장완은 형주공방전 이후 오에 항복한 반준과는 인척 사이였다. 관우의 죽음으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오에 항복한 배신자의 인척을 중용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비 사후 제갈량이 승상이 되었을 때 초빙되어 본격적으로 촉한의 핵심인재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사실 장완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이릉대전을 전후해서 촉한의 인재가 많이 죽었던 점도 이유라면 이유였을 것이다.
건흥 원년(223)에 승상 제갈량은 막부를 열고, 장완을 초빙하여 동조연(東曺椽)으로 임명했다. 장완은 무재에 천거되었지만 유옹(劉邕), 음화(陰化), 방연(龐延), 요순에게 간곡하게 사양했다. 제갈량은 장완을 깨우치며 말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가까이 있는 자를 배반하고, 도덕을 버리고, 백성을 파멸시키는 것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동정하지 않습니다. 사실 또 멀고 가까운 사람들 에게 그 사퇴하려는 뜻을 이해시키지 못합니다. 때문에 그대는 자신의 공업과 덕행을 나타내어 이 선발의 타당함과 중요함을 밝혀야만 합니다.
건흥 5년(227)에 장완은 참군으로 승진했다. 제갈량이 한중에 주둔하고 있을 때, 장완은 유부장사(승상대리) 장예와 부에 남아 일을 총괄했다. 8년(230)에 (장예가 죽자) 장예를 대신하여 장사가 되었고, 무군장군(撫軍將軍)을 더했다. 제갈량은 자주 밖으로 출정 나갔지만, 장완은 매번 식량과 병사를 충분히 공급해 주었다. 제갈량은 항상 이렇게 말했다.
"공염은 뜻을 충성과 고아함에 두고 있으니, 나와 함께 제왕의 대업을 도와줄 사람이다."
제갈량의 북벌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자리를 비운 승상을 대신하여 각종 사무를 총괄하였다. 더불어 식량과 병사를 모집하여 후방보급 임무에 충실하였다. 덕분에 제갈량은 장완을 매우 마음에 들어하였으며 후주 유선에게 은밀히 표를 올려 자신이 만약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을 대신할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화양국지 유후주지에 더 자세한 정황이 나오는데 제갈량이 은밀히 후주에게 상주하기를 "양의의 성정은 성급하고 마음이 좁으니, 혹시 신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장완에게 신을 대신케 하소서."라 하였다. 즉, 승상부에서 높은 직위에 있던 양의가 자신의 사후 조정을 전횡하지 못하도록 배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3]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고제 유방이 전선에서 항우와 싸울 때, 그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소하에게 후방을 맡겨 보급을 담당하도록 했다. 유비 또한 한중에서 조조와 격돌할 때 제갈량을 성도에 남겨 보급을 담당하도록 했다. 가장 믿음직한 수하는 오히려 내 곁에 두지 않는다. 대신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나를 대신하도록 하는 법이다. 그러니만큼 제갈량에게 있어 장완은 그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오장원에서 제갈량의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 유선은 이복을 보내어 제갈량에게 나랏일을 묻게 했다. 그때 이복이 국가의 일을 맡겨야 할 사람을 묻자 제갈량은 장완이 적임이고 그 다음에는 비의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이후를 묻자 대답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례들을 보면 제갈량은 오래 전부터 장완을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던 걸로 보인다.
한편 삼국지연의의 영향인지 강유를 제갈량의 후계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당시 강유의 위상이 결코 그 정도는 아니었다. 또 본래 위나라에 있었다는 출신 문제도 있었고, 병법 24편을 넘겨주었다는 묘사도 연의의 창작이다. 물론 제갈량이 강유를 무척이나 아꼈던 건 사실이며, 제갈량 자신과는 달리 군사적 경험이 전무하다시피한 장완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겼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제갈량이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제갈량이 죽자 유선은 장완을 상서령으로 임명했으며, 오래지 않아 관직을 더하고 도호를 대행하도록 했다. 이어 장완에게 부절을 주고, 익주자사를 겸임시켰다. 장완은 승진하여 대장군,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었으며 안양정후(安陽亭候)로 봉해져 사실상 촉한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 무렵 제갈량의 사망으로 촉한 내부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는데 장완만큼은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맡은 일을 충실히 살피며 내부를 안정시켰다. 그리고 위나라 요동에서 공손씨들이 변란을 일으켰을 때인 연의 원년(238)에 유선이 장완에게 조서를 내렸다.
적의 침입이 끊이지 않고 있고, 조예(曹叡)는 교만하고 흉악한 사람이다. 요동의 세 군은 그의 포학함으로 고통 받아 서로 규합하여 그와는 떨어져 거리가 있게 되었다. 조예는 대군을 대대적으로 일으켜 또 서로 공격하여 토벌하도록 했다. 옛날, 진(秦)이 멸망한 것은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반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이러한 변란은 하늘이 내려 준 좋은 기회이다. 그대는 전쟁 준비를 하여 군사들을 통솔해 한중에 주둔하고, 오나라의 행동을 기다렸다가 동쪽과 서쪽에서 서로 호응하여 틈을 타서 행동하라.
또 장완에게 부서를 개설하도록 명령했다. 다음해에 장완에게 대사마로 승진시켰다.
다만 장완은 제갈량과 같은 방식으로 북벌을 재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정치가로서 장완의 재능은 제갈량에 버금갈 만했지만, 안타깝게도 실전 지휘관으로서는 크게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장완이 제갈량을 흉내내어 직접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농서를 침공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북벌에 관하여 장완은 제갈량과는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기존의 북벌 루트는 워낙 길이 험하다보니 육로 보급이 어려웠다고 판단하여, 배를 많이 만들고 수로로도 보급이 가능한 위흥과 상용 쪽으로 공격 방향을 바꾸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말인즉 한중에서 농서로 향하는 길은 험난하기 그지없어 군량을 수송하기가 어려웠지만, 상용으로 가는 길은 한수(漢水)와 면수(沔水)의 물을 타고 내려갈 수 있으므로 군량을 보급하기가 비교적 쉽다는 것이다. 병력의 이동과 배치 및 수송을 인력이 아닌 선박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4]
제갈량 본인도 제1차 북벌 전 적의 방비가 굳세진 육로로 북벌을 행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어떻게든 상용을 얻으려고 하였고, 무력진압은 당시 촉의 사정으로는 어려웠었기에 그는 맹달을 회유했지만, 맹달은 차일피일 난을 일으키길 주저하면서 말을 바꾸고 있었기에 제갈량이 일부러 배반모의를 흘려 촉 쪽으로 확실히 배반하게 만들려 했음에도 배반시기를 차일피일 미루다 사마의에게 걸려 전격전으로 초전박살나고 상용군을 얻으려는 계책은 단념되고 말았다. 장완은 그걸 직접 무력으로 탈취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더하여 장완 역시 공명과 뜻을 같이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오에서 적절히 호응을 해준다면 위의 세력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다만 다른 각료들이 강을 타고 올라간 후에 거슬러 퇴각하는 것이 어려워 패배했을 때 퇴로확보의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였고 무엇보다 장완 본인의 지병이 심해져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하였다.[5]
그리하여 후주는 장완에게 상서령 비의와 중감군 강유 등을 파견하여 조정에서 논의된 의견을 알렸다. 장완은 조정에서 논의된 의견을 접수한 이후에 비의 등과 상의하여 후주에게 상소를 올려 말하였다. 이후 그는 후주에게 표를 올려 양주를 우선 공략해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강유를 양주자사로 임명하고 양주로 파견하여 이 지역을 도모하게 한 다음, 자신이 부에서 호응한다면, 반드시 양주를 점령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실제로 이러한 책략은 장완의 의지에 따라 추진 직전까지 갔으나 지병이 악화되어 그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계획은 무산되었다.
다음은 장완의 계획을 장완 본인이 설명한것이다.
세상에 만연한 독을 제거하고 재난을 없애는 것은 신의 직책이 처리할 일입니다. 신이 명령을 받아 한중에 주둔한 지 벌써 6년이 되었습니다. 신은 어리석고 무능하며 열병이 겹쳐 계획한 일을 실행할 수 없어 아침저녁으로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현재 위는 아홉 주를 차지하여 세력을 뻗히고 있어 제거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만일 동쪽과 서쪽이 힘을 합쳐 앞뒤로 호응한다면, 설령 뜻대로 신속하게 얻을 수는 없을지라도 잠시 영토를 분열하여 잠식하여 우선 그들의 부분적인 힘을 훼손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나라와는 출병 약속을 두세 차례 계속하여 연이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전진하는 것도 후퇴하는 것도 어려워 실로 침식을 잊게 합니다.
저는 비의 등과 이렇게 상의하였으므로 적군이 아끼는 곳이고, 게다가 강족과 호족은 갈증이 나는 한을 그리워하며, 또 과거 한 부대가 강족을 침입했을 때, 위의 옹주자사 곽회(郭淮) 가 패배하여 달아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의 장, 단점을 헤아려 보면, 양주 점령을 우선으로 해야 되므로 응당 강유를 양주자사로 임명해야만 합니다. 만일 강유가 출정하여 가서 하우(河右= 황하의 서쪽지역)를 제압한다면, 신은 군대를 인솔하여 강유의 뒤에서 계속 따라야 합니다. 지금 부현은 물길과 육로를 통해 사방으로 길이 통해 있으니, 긴급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호응할 수 있을 겁입니다. 만일 동북쪽으로 어떤 마비가 있다면, 앞으로 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여기에서 장완이 북벌을 실행하기 위해 고려한 두 가지 요소를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농서 현지의 강족들과 연계한다는 책략이다. 이 당시 위나라의 통제를 받고 있던 강족들은 엄격한 통치에 불만을 품은 탓에 촉한과 협력하여 위나라를 공격할 의사가 있었다. 실제로 촉군과 강족의 협력하여 위나라를 공격하는 상황이 훗날 발생하기도 했는데, 바로 뒤에서 얘기할 강유가 강족과의 강한 연결을 가지고 있엇다.
두 번째는 실전 지휘에 임할 때의 촉군의 배치 문제였다. 이 당시 촉한에서 가장 출중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장수를 대라면 강유가 있겠지만, 강유의 출신이나 관직 같은 여러 배경을 생각하면 그가 제갈량처럼 대군을 지휘하기에는 여러 모로 무리가 따른다. 촉한의 전군을 통수할 수 있는 장완의 직권,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강유의 지휘능력.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점을 겸비하지 못한 탓에 북벌의 실행 여부와 규모에도 제동이 걸리게 되는 것이다.
이에 장완은 실전 지휘를 강유가 전담하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그의 뒤를 받치는 형태로 전쟁을 수행한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지휘능력이 뛰어난 강유가 위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면, 대군을 거느린 장완이 해당 지역을 점거하고 촉한의 영토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전투로 인해 발생할 강유 휘하 부대의 손실은 장완이 지속적으로 메워줄 수 있어야 하는데, 다행히 지원 및 보급 업무에 대해서는 제갈량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은 만큼 아주 불가능한 작전은 아니라 할 것이다.
위의 표문이 올라간 뒤 강유가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양주자사(涼州刺史)에 임명된 것으로 보아 이번 건의는 유선이나 다른 신하들로부터도 현실성을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6] 이렇게 전략을 준비할 시기가 되자 왕평을 전감군(前監軍) 진북대장군(鎭北大將軍)으로 임명하여 한중을 맡긴 뒤 장완 자신은 표문에 적었던 대로 부현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장완이 심혈을 기울여 수립한 전략은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 앞서 상용을 공격하자는 계획을 내놓았을 때도 그의 발목을 잡았던 고질병이 부현에 주둔 한 이후 또 재발한 것이다. 병이 나으려는 기색도 없이 점차 심해지기만 하자 장완은 자신이 주도하는 군사행동을 전면 중단시키고, 상서령 비의를 대장군(大將軍)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삼아 자신을 대신해 군무와 정무를 총감독하도록 했다. 이렇게 장완 시절에는 대규모 북벌에 대한 계획이 여러차례 준비되고 있었지만 단 하나, 장완의 병이 문제였다.
연희 9년(246)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공(恭)이라 했다.
장완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실질적인 촉 내의 군정 1인자로서의 권력은 비의에게로 승계되었다. 장완의 작위는 장남인 장빈이 뒤를 이었는데, 훗날 위에서 촉 정벌을 단행했을 때 종회는 장빈에게 서신을 보내어 장완의 묘소에 예를 표하고 싶다면서 묘의 위치를 알려달라고 했다. 장완의 묘가 있는 부현을 점령한 이후 정말로 묘에 직접 찾아가 예를 표하며 주변을 청소하였고 장완의 아들들도 극진히 대접하였다.
그의 인물됨과 관련하여 하나의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는 성격이 온화함을 넘어서 상당한 대인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농업 관련 관직을 맡고 있던 양민이란 사람이 농사 관련된 일로 그와 갈등이 생기자 "일하는 것이 어리석어 실로 이전 사람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고 비방했는데, 장완은 화를 내기는커녕 맞는 말이라 추궁할 수가 없다고 인정하였고, 휘하 관원이 과연 그가 일을 함에 있어서 어떤 점들이 어리석은지 따져보자는 제의도 거절했다. 게다가 후에 양민이 본인의 업무 실책으로 감옥에 가자 사람들이 평소의 그과 장완 사이의 관계를 미루어 그가 곧 죽을 것이라 했으나, 장완은 사심없이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였고 양민은 중죄를 면하였다.
또 다른 일화가 있다. 동조연 양희는 장완이 말을 걸어도 장완을 무시하였고, 이를 본 어떤 이가 양희에게 벌을 주자는 의견을 냈는데, 장완은 이에 대해서 자신(장완)과 찬성하면 양희 본인의 뜻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반대 의견을 내면 장완의 허물을 드러내는 셈이되니 양회의 행동은 도리어 옳은 행동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화양국지에 따르면 장완의 치세에 촉에서는 전과 다름없이 선정이 펼쳐졌다.
여담으로, 제갈량과 주고받은 글이 꽤나 된다. 사실 제갈량이 "강유는 마량 이상의 재능을 가진 양주(량주) 최고의 인물"이라고 칭찬하는 것도 장완한테 보낸 편지들 중에 있는 내용이다.
3. 연의[편집]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장완은 백리를 다스릴 인재가 아니라고 말한 대사가 방통을 두고 한 것으로 바뀌었다.
연의에서 장완은 제갈량이 북벌에 나서는 동안 성도에서 후방 지원에 힘썼다. 그리고 읍참마속 에피소드에서도 마속의 처형을 말리려다가 실패하는 모습도 그대로 나오며, 이후 제갈량의 유언에 따라서 제갈량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었다. 참고로 정사에서도 장완이 제갈량의 뒤를 이은 것은 맞지만 승상까지 되지는 않았다. 촉한에서 승상은 제갈량이 유일했고 이후 승상 자리는 공백이었다.
[namu.wiki/w/장완 나무위키에서 발췌]
[정보]책-정사 삼국지: 촉서(양장본 HardCover)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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