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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동인도 회사 4대 총독]얀 피터루스존 쿤(Jan Pieterszoon Coen)

Bawoo 2021. 2. 25. 22:01

 

Governor-General of the Dutch East Indies

 

8 January 1587 – 21 September 1629) was an officer of the Dutch East India Company (VOC) in the early 17th century, holding two terms as Governor-General of the Dutch East Indies.

 

개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4대 총독으로서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영국의 침투를 막으면서 일련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일본에서 인도에 이르는 거대한 해양제국을 건설하려던 그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정력적인 활동으로 인도네시아에 대한 네덜란드의 지배를 확립했고 그것은 4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상인으로서의 경력

쿤은 엄격한 칼뱅교도 집안에서 성장했다.

그는 로마에 있는 플랑드르인의 회사에서 상인수업을 받았고,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희망봉에서 남아메리카의 동쪽에 이르는 지역에 항해와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받은 연합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VOC:비공식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라고도 불림)의 보조상인이 되어 1607년 피터 베르후프의 함대와 함께 인도네시아를 항해했다. 베르후프와 그의 부하 50명은 반다 섬의 족장들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살해되었다.

1610년 네덜란드로 돌아온 쿤은 동인도회사의 간부에게 동남아시아에서의 교역가능성에 관한 중요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로 인해 그는 1612년 상인장에 임명되어 다시 동인도제도로 파견되었다. 1613년 8월 스파이스 섬으로 여행한 후에, 쿤은 자바에 있는 반탐에서 그 회사의 지사장으로 임명되었고, 1614년 11월에는 아시아 지역의 교역에 관한 총집행관이 되었다(향료무역). 상인이자 칼뱅교도로서 쿤은 아시아의 통치자들과 맺은 협정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종종 인도네시아의 왕족들이 그들 내부의 경쟁자나 다른 유럽 열강들에 대항하는 데 원조했고, 그결과로 회사의 독점적인 사업권을 획득했다. 이리하여 네덜란드는 막대한 군사비 투자를 대가로 점차 그 지역의 풍부한 향신료 무역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했다. 1614~18년에 쿤은 몰르카 제도의 정향(丁香)을 독점했고 반다 섬의 육두구(肉豆蔲)에 대한 독점권을 확보했다. 반탐의 술탄이 후추무역을 통제하려는 자신의 시도에 저항하자, 쿤은 자신의 목표를 보다 자유롭게 추구하기 위해 본부를 자카트라(지금의 자카르타)로 옮겼다.

1617년 10월 자신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에 접했다.

한편 인도제도에서는 네덜란드의 독점권을 위협하던 영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618년말 토머스 데일 경이 이끄는 함대와 함께 자카트라에 도착한 영국군이 그곳에 요새를 건설하려 하자, 어느 쪽에게도 승리를 안겨다주지 못한 해전이 벌어졌다. 쿤의 수중에는 단지 몇 척의 배밖에 남지 않게 되었는데, 이들 배에는 값진 상품들이 실려 있었다.

그는 영국인과 자카트라인에 대항하여 가능한 한 네덜란드의 요새를 방어하라고 명령하고 자신의 함대를 재조직하기 위해 몰르카 제도의 암보니아로 떠났다.

바타비아의 설립

5월말에 자카트라로 돌아온 쿤은 상황이 완전히 변한 것을 알았다.

2월에 반탐의 술탄이 자카트라인 가신들을 제압하고, 영국을 철수시킨 뒤 네덜란드 요새를 포위했던 것이다. 쿤은 5월 30일 반탐 사람들을 자카트라에서 축출하고 불을 지른 후 그 폐허 위에 바타비아라는 네덜란드령 도시를 건설했다. 그는 후에 군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영국함대를 추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쿤은 마침내 군도의 서부에 요새화된 도시를 건설했고 이것은 곧 아시아에 대한 네덜란드 지배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1620년 3월 네덜란드와 영국의 무역회사들이 런던에서 협정을 맺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두 나라는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현존하는 식민지에서 무역활동에 임하기로 하고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함대를 결성했다. 쿤은 자신의 업적 일부가 무효가 되었음을 인식하고 회사의 '자카트라 왕국'을 자바의 남해안까지로 규정하여 영국이 자바의 영토에 대해 지배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했다.

1621년 1월 쿤은 영국군과 함께 모든 네덜란드 함대를 이끌고 반다인들이 이전의 상업협정을 불이행했기 때문에 이를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정복전쟁을 벌이기 위해 반다 섬을 공격했다.

그는 원주민들을 대규모로 살상하고 노예로 삼아 동시대인들에게 심한 충격을 주었고 회사의 관리자들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1622년에 그는 중국의 해안에 대규모 정탐대를 파견했지만 자신의 힘을 과대평가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네덜란드 식민지가 타이완에 세워지고 그결과 일본 및 중국과의 무역에 대한 확고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VOC는 일본에서 인도 서부해안의 수라트에 걸쳐 본토보다 더 큰 식민지를 건설했고, 그곳을 거점으로 해서 아라비아 및 페르시아와의 무역을 향유했다.

쿤은 네덜란드 이주민을 유치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타비아가 동방의 암스테르담이 되기를 희망했다. 식민지 정착민들은 동남아시아의 해안을 따라 아시아 내부의 무역에 종사하고, 회사는 유럽과의 장거리무역만을 전담한다는 그의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쿤은 1623년 2월 네덜란드를 향해 출발했다. 처음에는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으나 그의 계획은 이른바 암보이나 대학살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가 바타비아를 출발한 직후에 암보이나에 있던 몇몇의 영국인들이 네덜란드 식민지를 전복하려고 모의했다는 혐의로 고문을 받은 뒤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처형되었던 것이다.

암보이나 학살(Amboina Massacre)

네덜란드 암보이나에서 일어난 처형사건

ⓒ Chrislamb33 / wikipedia | Public Domain

 

이 사건은 영국에서 살인으로 간주되었고 쿤은 도덕적인 책임을 져야 했다. 유럽에서는 영국과 네덜란드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쿤은 잠정적으로 인도제도로 돌아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는 네덜란드 정착민들을 유치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1627년 신분을 숨기고 자신의 아내와 사회적 신분이 높은 여자들을 데리고 인도제도로 돌아갔다.

그러나 쿤의 3번째 아시아 방문은 이전에 비해 의미를 갖지 못했다.

열대지방에서 수년을 보낸 끝에 그는 자신이 지녔던 과거의 열정을 상실했다. 게다가 자유로운 네덜란드 정착민들을 끌어들이려는 그의 희망은 회사의 관리자들이 식민지 정착민들에게 자유무역권을 부여하지 않기로 결정함으로써 좌절되었다. 더욱이 바타비아에서 쿤은 자바의 최대세력인 마타람 술탄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정신이 없었다.

1628년 8월과 1629년 8월에 자바인들의 군대가 도시를 포위 공격했다. 이 마지막 포위 공격 때 쿤은 이질에 걸려 급사했다.[다음백과 | Daum]

 

 

Statue in Hoorn, Coen's hometown

 

[정보]책-7대 이슈로 보는 돈의 역사. 2

저자 홍춘욱 | 로크미디어 | 202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