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歷史) 마당 ♣/- 독일

[코페르니쿠스의 "행성들의 회전에 관한 책"이 그다음 세기에 금서목록에서 빠지게 하는 데 이바지한 인물]안드레아스 오시안더 (Andreas Osiande)

Bawoo 2021. 3. 7. 21:07

(19 December 1498 – 17 October 1552) was a German Lutheran theologian and Protestant reformer.

 

[요약] 뉘른베르크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도입되도록 도왔다.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라이프치히·알텐부르크·잉골슈타트 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520년 사제 서품을 받고 루터의 엄격한 신앙원칙들에 입각하여 제국의 자유도시 뉘른베르크를 개혁하는 일을 지원했다.1522년 '튜턴 기사수도회' 대수도원장 알베르트 폰 호헨졸레른을 설득하여 루터파 운동에 가담하게 했다. 또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브란덴부르크-뉘른 베르크 교회규율'(1532)의 작성을 도왔고, 전례에 대해서 보수적인 '팔츠-노이베르크 교회규율'(1543)을 편집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들을 소개하는 서론을 써서 펴냄으로써, 많은 물의를 빚었던 코페르니쿠스의 <행성들의 회전들에 관한 책>이 그 다음 세기에 〈금서목록〉에서 빠지게 하는 데 이바지했다.

 

뉘른베르크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도입되도록 도왔다.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라이프치히·알텐부르크·잉골슈타트 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520년 사제 서품을 받고 루터의 엄격한 신앙원칙들에 입각하여 제국의 자유도시 뉘른베르크를 개혁하는 일을 지원했다.1522년 '튜턴 기사수도회' 대수도원장 알베르트 폰 호헨졸레른을 설득하여 루터파 운동에 가담하게 했다.

또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브란덴부르크-뉘른 베르크 교회규율'(1532)의 작성을 도왔고, 전례에 대해서 보수적인 '팔츠-노이베르크 교회규율'(1543)을 편집했다.

 

1543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저서 〈행성들의 회전들에 관한 책 6권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libri Ⅵ〉에 순전히 가설임을 전제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들을 소개하는 서론을 써서 펴냄으로써, 많은 물의를 빚었던 이 책이 그 다음 세기에 〈금서목록 Index of Forbidden Books〉에서 빠지게 하는 데 이바지했다.[In 1543, Osiander oversaw the publication of the book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On the revolutions of the celestial spheres) by Copernicus. He added a preface suggesting that the model described in the book was not necessarily true, or even probable, but was useful for computational purposes. This was certainly not the opinion of Copernicus, who was probably unaware of the addition. As a result, many readers, unaware that Osiander was the author of the preface, believed that Copernicus himself had not believed that his hypothesis was actually true.[2] Osiander also did not sign the preface added to Copernicus' book, therefore many readers at the time assumed that this is what Copernicus had actually thought himself.[3]]

 

1548년 황제가 뉘른베르크에 대해서 잠정적인 종교법령인 '아우크스부르크 가신조(假信條) 협정'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자 처음에는 브로추아프로, 다음에는 쾨니히스베르크로 도피했고, 신학학위가 없는데도 쾨니히스베르크에 새로 설립된 대학교의 신학부 수석 교수로 임명되었다(1549). 그러나 동료 교수들의 질투와 그의 완고한 성격 때문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루터파 신학부와 교회회의는 오지안더의 입장, 즉 죄인들에 대한 의인(義認) 교리를 평가절하하고 그리스도가 직접 내주(內住)하는 것을 의인의 필수적인 요인으로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오지안더는 〈복음서들의 조화 Harmonia Evangelica〉(1537) 외에도 자기의 신학 견해를 해설한 여러 편의 논문을 썼으며, 그의 추종자들인 오지안더파는 1567년까지 그의 견해를 계속 선전했다. [다음백과 | Daum/영어위키]

 

[정보]책-대한민국 징비록

저자 박종인 | 와이즈맵 | 2019.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