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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조기유학 프로젝트]유미유동(留美幼童)

Bawoo 2021. 3. 16. 21:15

조기유학 프로젝트 '유미유동'(留美幼童)

그때 미국에서는 청나라 학생들이 서양 기술을 배우고 있었다. 열두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 아이들이다. 이름은 '유미유동(留美幼童)'이다. 모두 120명이다.

1860년 2차 아편전쟁 때 북경까지 서양 연합군에 털리고 난 뒤, 청에서는 이홍장 주도로 '양무(洋務)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제도는 그대로 두고(중체·中體) 기술만 수입하면(서용·西用) 부강해진다는 중체서용 논리였다. 1872년 청 정부는 일찌감치 자비로 미국 예일대 유학을 다녀온 용굉(容?)의 상소를 받아들여 청소년 120명을 선발해 미국으로 보냈다.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군사, 철도, 전신 같은 중국 근대화에 필요한 기술 습득이었다. '총명하고 예의 바르고 용모 단정한' 소년 120명이 뽑혔다. 이름도 부르기 좋게 개명한 아이들은 똑같은 비단옷을 맞춰 입고 '부채를 쥐고 백로처럼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줄 서서 증기선에 올랐다. 첫 출발은 1872년 8월 11일이었다.

4차에 걸쳐 30명씩 상하이에서 태평양을 건넌 이들은 미국 동부 코네티컷주 가정집에 배치돼 공부했다. 상류사회에서 하숙하며 명문고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은 차별받던 중국 이민자와 달리 쉽게 적응했다. 야구를 배웠고 교회를 다녔고 조정팀 조타수로 뛰었다. 이들은 15년 동안 중·고교 과정과 대학, 대학원 과정까지 끝내고 귀국할 예정이었다. 예일, 하버드, MIT와 컬럼비아, 렌셀러공과대 같은 명문대에 합격한 아이들도 40명이 넘었다.

그런데 10년 만인 1881년 청 정부는 유동들을 전격 소환하고 유학 프로젝트를 폐지해버렸다. 예일대 총장 노아 포터(Porter)가 "뛰어난 성취를 거두고 있는 훌륭한 아이들을 꺾지 말라"고 편지를 쓰고, 대통령 그랜트가 청원서를 보냈어도 소용없었다. 이유는 명쾌했다. '서화(西化)', 정신이 오랑캐로 변했다는 것이다.

감독관으로 파견됐던 오자등(吳子登)은 수시로 "학생들이 유가(儒家) 책을 읽지 않고 나쁜 습속에 물들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아이들은 매주 한 번씩 청 정부가 만든 유학 교과서 '성유광훈(聖諭廣訓)'를 외워야 했고 석 달에 한 번 감독관 앞에서 사상교육을 받아야 했다. 미국 지리, 피아노, 영시 작문 교육은 금지됐다. 결국 1881년 9월 9일 청 정부가 소환을 결정했다. 요절했거나 소환을 거부한 아이들을 제외하고 94명이 청으로 돌아왔다. 청 정부는 이들을 해군학교, 전신학교 등지로 임의 배치해 재교육을 시켰다. 10년을 허비한 것이다.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나라가 박처럼 쪼개지고 나서야(瓜分·과분) 청 정부는 제정신을 차렸다. 유동들은 청 정부가 제도 개혁을 시도한 1901년 광서 신정(新政) 이후에야 사회 중심에 등장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청 지식인들은 "입헌(立憲)이 전제(專制)를 이겼다"고 주장했다. 전제로 낙인찍힌 정부는 그제야 입헌 개혁안을 내놨다. 늦었다. 1911년 청은 신해혁명으로 멸망했다. 썩어 문드러진 몸을 놔두고 화장으로 어떻게 해보려다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유학생의 전쟁 1편 청일전쟁

그사이 청은 청불전쟁(1884)과 청일전쟁(1894)을 겪었고 러일전쟁(1904)을 목격했다. 양무운동 기간 막강한 해군력을 확보한 청이었지만 서양 오랑캐 프랑스를 이길 수 없었고 서양 오랑캐를 그대로 학습한 일본을 앞설 수 없었다. 청불전쟁에는 해군학교를 나온 유동 6명이 참전했다. 이 가운데 4명이 전사했다.


1894년 7월 25일 조선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과 일본 군함들이 맞붙었다. 선전포고 없이 일본 군함이 불을 뿜었다.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겠다며 조선 국왕 고종이 청군을 불러들이자 함께 들어온 일본군이 터뜨린 전쟁이었다. 청일전쟁은 그야말로 유학생들의 전쟁터였다. 일본 사령관 쓰보이 고조(坪井航三)는 미국에서, 함장 가와하라 요이치(河原要一)는 독일, 또 다른 함장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와 사카모토 하치로타(阪元八郞太)는 영국과 러시아에서 해군학을 배운 유학생들이었다.

청나라 해군도 유학생이 지휘했다. 함장으로는 옥스퍼드 출신 임이중(林履中), 그리니치 왕립해군학교 졸업생 방백겸(方伯謙), 그리고 렌셀러공과대 중퇴생 유동 오경영(吳敬榮). 일등항해사 유동 진금규(陳金揆), 유동 심수창(沈壽昌), 부함장 유동 황조련(黃祖蓮), MIT 중퇴생 유동 송문홰(宋文?). 어뢰팀장 서진붕(徐振鵬)도 예일대를 다니다 소환된 유동이었다. 이 청일전쟁에 유동 7명이 참전해 3명이 전사했다.(첸강, '유미유동', 시니북스 2005) 청은 패했다. 그 승패는 8개월 뒤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유학생의 전쟁 2편 시모노세키 협상

1895년 3월 20일 시모노세키에 있는 요정 ?판로(春帆樓)에서 강화협상이 열렸다. 청 대표단은 청 전통 복식인 변발과 장포(長袍)를, 일본 대표단은 서양 복식을 했다. 첫날 회담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이홍장이 거리에서 얼굴에 권총 총격을 당했다. 조카 이경방(李慶芳)이 대리 전권대사를 맡았다. 일본 측 전권대사는 영국 유학파요 이와쿠라 사절단원이었고 독일에서 헌법을 공부한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토 옆에는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영국, 미국 유학), 내각 서기관장 이토 미요지(伊東已代治·유럽 헌법 연구), 외무 서기관 이노우에 가쓰노스케(井上勝之助·영국)와 통역관 무쓰 히로키치(陸奧廣吉·영국)가 배석했다. 이홍장 좌우에는 청나라 최초 프랑스 유학생 마건충(馬建忠), 영국 유학생인 청나라 첫 법학 박사 오연방(伍延芳)과 역시 영국 유학파인 나풍록(羅豊祿·각 일등참찬관)이 배석했다. 청은 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하고 일본에 영토 할양과 배상금 2억 냥 지급을 합의했다. 오랑캐 땅에서, 오랑캐에게 수모를 당한 것이다. 얼굴에 붕대를 두르고 앉아 있던 이홍장은 틀림없이 그 이유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유미유동' 이후 청일전쟁까지 청 정부가 보낸 유학생은 유럽 군사 유학생 94명 외에 단 한 명도 없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정부 유학생은 5년 만에 1000명이 넘었다.(허동현, '동아시아 제국의 개항과 근대국민국가의 수립과 좌절')

시모노세키에는 이날을 기념하는 '일청강화기념관'이 124년 전 모습 그대로 복원돼 있다. 기념관 건너 바닷가에는 2005년 세운 '조선통신사 상륙엄류지지(朝鮮通信使上陸淹留之地)' 기념비가 서 있다.

[땅의 歷史] (161)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⑪청나라 조기유학생 '유미유동(留美幼童)'과 청일전쟁2019.04.17에서 발췌]

 

[참고]

1. 위 내용은 아래 책에도 실려있습니다.

대한민국 징비록:저자 박종인 | 와이즈맵 | 2019.10.5.

류성룡의 《징비록》은 미래에 환난이 없도록 조심하기 위해 처참했던 임진왜란의 상처를 돌이켜보며 잘못을 징계하고자 쓴 책이다. 『대한민국 징비록』은 21세기의 징비록으로, 우리는 왜

 

2.책도 나온 게 있군요.

유미유동:저자 첸강 외 | 역자 이정선 외 | 시니북스 | 2005.5.1.

말 양무운동의 와중에서 태어나 청나라 왕조의 자기개량을 위해 만들어진 이 유학생 집단은 중국 역사의 광활한 무대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것이다. 선발된 학생들의 평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