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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기:중국 개혁을 위해 힘쓴 인물]장지동(張之洞)

Bawoo 2021. 9. 10. 20:25

장지동(중국어 정체자張之洞병음Zhāng Zhīdòng1837년 ~ 1909년)은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이다.[1]보수적인 대외 강경론자로 독일식 군대를 편성하고, 경한 철도를 부설하였다.[2] 그는 유교적인 전통을 살리면서 근대화 정책을 취하였으며,[3]평향 탄광·한양 제철소·방직 공장·생사 공장 등을 창설하였다.

 

1837년(도광 17년), 직례(현재의 하북성 남피)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구이저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1852년(함풍 2년)에 15세의 나이로 향시에 합격했다. 1863년(동치 2년), 26세에 진사(탐화)로, 다음 해 1864년에는 한림원 편수, 문역각 교리를 역임했다. 1880년(광서 6년), 서태후가 억지로 광서제를 옹립하자 관리인 오가독이 죽음으로서 충고했을 때도 서태후를 지지하는 태도를 취하며 눈에 띄게 되었다. 1881년(광서 7년)에 시독, 시강학사가 되었고, 다음 해에는 내각학사를 역임했다. 1880년대에는 산서순무, 양광총독호광총독으로 승진하며, 주로 우한을 거점으로 부국강병, 식산흥업에 노력했다.

1880년(광서 6년), 북쪽 일리 지방을 둘러싸고 러시아 제국과 협상을 통해 〈리바디아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 조약의 내용에 일리 지방의 대폭적인 이양과 경제 권한 등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그 조약의 전권대사 숭후의 엄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조정에 제출했다. 청불전쟁에서 은퇴한 풍자재를 기용하였고, 청일전쟁에서는 당경숭과 함께 타이완 민주국을 지원하고 대만을 침략한 일본에 대한 저항을 시도하는 등 강경한 주장이 눈에 띄었지만, 두 전쟁의 패배 후에는 대외에 유화적인 자세도 보였다.

1890년(광서 16년), 매장지가 발견된 대야철광(大冶鐵鑛)의 개발을 독일과 함께 진행했다. 1893년(광서 19년), 자강학당 (이후 무한대학)을 창립하고, 이듬해인 1894년에 자강군(이후에 원세개의 새로운 군에 편성)을 설립하고, 외국 차관을 통해 철도 부설을 추진하는 등 외국 자본과 연계한 국내 개발을 추진했다. 또한, 호북성, 호남성의 제품을 외국에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이는 등 경제적 뒷받침을 하고, 화폐를 다시 주조하고, 독자적인 지폐 발행으로 한구를 중심으로 한 경제권을 만들어 냈다.

일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변법운동과 정변 전후 광서 24년 중국을 방문한 일본 전 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한구에서 회담을 가졌다. 점진주의를 중시하는 이토와 뜻이 맞았고, 일본에서 코크스를 수입해 야하타 제철소에 필요한 철광석을 일본에 수출하는 계약을 맺었다. ‘권학편’에서 일본을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로 본받아야 하며, 일본에 유학을 보내 일본을 통해 서양의 학문을 취할 것을 주장했다.

1898년에 변법 운동이 일어났고, 그는 변법파가 조직했던 대한자강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의 저작인 근학편(勸學篇)(1898년)에서 ‘중체서용’(中體西用)을 통해 너무 급진적 개혁을 책망했다. 무술정변으로 변법파가 쫓겨나면서 움츠러들었지만, 1900년(광서 26년), 의화단 운동 때에는 당재상 등 자립군의 반란을 진압했다. 성선회장젠을 통해 유곤일과 함께 동남호보(東南互保)[4]를 맺었고, 이듬해 1901년에는 유곤일과 연명하여 ‘강초회주삼절’(江楚會奏三折)로 불리는 상소를 올려 변법의 조칙을 반포했다. (청말신정)

상소문에서 교육 개혁을 주창하여, 1904년에 정부가 〈주정학당장정〉(奏定學堂章程)으로 반포했다. 그리하여 이듬해 1905년, 과거가 폐지되고, 경사대학당(후 북경대학) 중심의 근대 교육 정비로 이어졌다.

1909년(선통 원년) 72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사후 문양(文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문화대혁명 때 무덤이 파괴되고, 시신이 실종되었지만, 2007년 6월, 하북성 창주시에서 발견되었다. 최근 장지동은 재평가를 받았고, 2006년에는 장지동기념관이 설립되었다.

저서로 《권학편》(勸學篇), 《광아당집》(廣雅堂集), 《장문양공전집》등이 있다.[5][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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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청나라가 외세의 위협으로 위기에 놓여있을 때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여 중국을 개혁했다. 그러나 봉건적인 중국 제도의 개혁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치 입문 이후 서태후의 신임을 받으며 빠르게 승진했으며, 1907년엔 내각 총리대신 겸 대학사에 임명었다. 서양의 기술을 도입해 철도를 부설하고 공장을 세워 중국을 공업화 했고, 서양 무기를 이용해 신식 군대를 만들며 청의 힘을 키우고자 했다. 청일전쟁 패배 후엔 교육의 중요성을 실감해 교육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의화단 운동 때는 황실에 거역하는 것이 될 수 있음에도 의화단을 진압했다.

 

자는 효달(孝達). 구이저우 성의 학자·관료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원적은 그의 선조들이 15세기에 정착한 즈리 성[直隷省 : 지금의 허베이 성(河北省)] 난피[南皮]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14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27세에 과거시험의 최종관문인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했다. 탁월한 문학적 재능과 이로 인해 얻은 명성은 관리로 출세하는 바탕이 되었다. 그의 관료경력은 크게 보아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1862~82년에는 학자·교육행정가로 근무했고, 1882~1907년에는 지방관에서 점차 승진하여 중앙정부의 지도자가 되었다.

정치적으로 서태후(西太后)를 지지했고, 서태후 또한 그를 빠르게 승진시켰다. 1882년 산시 성[山西省] 총독, 1884년 량광[兩廣 : 광시 성(廣西省), 광둥 성(廣東省)] 총독에 임명되었다. 1889년 후광[湖廣 : 후베이 성(湖北省), 후난 성(湖南省)] 총독이 되어 18년 동안 이 직책을 맡았다(단 그중 3년간은 난징[南京]과 베이징[北京]에서 업무를 수행했음). 1907년 베이징으로 소환되어 내각총리대신 겸 대학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유능하고 인자한 행정가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을 소생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편전쟁 발발에서 신해혁명까지의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그의 생존시기는 서유럽 열강과 일본이 중국에 심한 압박을 가해온 시기였다. 그와 동료 관리들이 직면했던 가장 급박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청이 살아남아 격변하는 현대 세계에 적응해나가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해결책을 연구하며 그는 "중국의 전통적 제도는 유지되어야 하나 서양의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中體西用論). 서양의 기술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그는 개혁의 중점을 서양의 기술에 두었으며, 봉건적인 전통제도의 개혁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무기 제조를 위해 중국 최초의 제철소 설립을 계획했을 때 금속공학상의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그는 어떤 철광석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면서 영국에 일체의 제철 플랜트를 주문했으며, 또한 공장을 탄광 가까운 곳에 세우지도 않았다. 그 결과 1894년 제철소가 생산을 시작하자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었다. 이같은 대실패 때문에 그는 큰 비웃음을 샀고 정치적으로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가 후난과 후베이의 총독으로 전임된 것은 한커우[漢口]와 베이징을 연결하는 철도의 부설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조정은 그 제안을 승인하면서 그에게 철도부설공사의 책임을 맡겼다. 오랜 지연 끝에 철도는 1906년에야 완성되었다. 또한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을 공업화하는 일에 착수하여 조폐(造幣)·제혁·견직·나염·제지·면방·모방·목재가공과 타일 제조 등을 위한 많은 공장을 세웠다. 난징에서 임시 총독으로 있을 때는 독일인 고문의 도움을 얻어 신식군대를 창설하기도 했다.

1895년 중국은 청일전쟁에서 패배했고, 그 과정에서 그때까지의 개혁조치가 비효율적이었음이 드러났다.

이같은 좌절로 인해 그는 잘 훈련된 관료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위해 교육에 관심을 쏟게 되어 1898년 유명한 〈권학편 勸學篇〉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유교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재확인하는 한편 서양의 지식을 획득하는 데 필요한 방법, 예를 들면 중국학생의 해외유학, 학교제도의 확립, 서유럽 및 일본 서적의 번역, 외국신문에서의 정보수집 등을 상세하게 열거했다.

이로 인해 후베이 성에 신문국·학교국·번역국 등이 설치되었고 학생들이 해외로 파견되었다. 1908년에 후베이 성은 일본에 475명, 서유럽에 103명의 유학생을 보냈다. 1904년 중국 교육제도 전체의 혁신을 위한 규정을 기초하는 임무를 맡았다. 6개월 만에 제출하여 승인된 8권에 달하는 시안은 교육이념·행정·교과목·해외유학·직업훈련·유치원·연구기관 등을 포함한 교육의 제반 분야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그는 또한 과거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고 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1905년에 폐지했다. 그의 끊임없는 노력에 힘입어 1904~09년의 6년 동안 학교수는 73배, 학생수는 225배로 늘어났다.

그의 정치경력 중 가장 놀라운 것은 좌절을 겪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가 겪은 최대의 정치적 위기는 1900년에 일어난 의화단(義和團) 운동이었다. 충성스러운 관료였던 그가 외국에 대해 선전포고한 황실의 조칙을 거역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성의 총독들과 협의한 후 그 칙명은 황제의 진정한 뜻을 담은 것이 아니므로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결정했다. 따라서 다른 총독들과 더불어 외국영사들과 협정을 맺고 관할지역 내의 평화를 유지했다. 의화단이 진압된 후 서태후는 그의 조치를 추인하고 또한 그 결단을 칭찬했다. 그는 3번 결혼했으나 부인이 모두 먼저 죽었고, 6남 4녀를 두었다. 오랫동안 높은 관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산을 모으기는커녕 생활에 곤란을 받을 정도로 가난해서 총독시절에 자기 물건을 저당잡힌 일도 있었다. 죽은 후 문양(文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다음백과]

 

[정보]책-중국과 일본:저자 에즈라 보걸 | 역자 김규태 | 까치 | 2021.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