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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시대- 첩, 노비를 학대하거나 살해하여 처벌받은 문신]권채, 이명균, 오승 외

Bawoo 2021. 8. 13. 21:33
  • 권채 1399~1438. 세종 시대의 문신이다. 시문과 경학에 뛰어나서 세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후에 첩에게 행한 잔인한 행동을 듣고 세종이 "나는 권채를 성질이 안존(安存)하고 자세한 사람으로 여겼는데, 그가 그렇게 잔인했던가. 이것은 반드시 그 아내에게 제어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니"라고 놀랐다. 첩을 학대한 것 때문에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1년만에 복직하였고 대사성, 우승지 등 주요 직책을 담당하였다.
    훗날 무오사화갑자사화에 가담한 인물인 유자광의 고모부이다.
  • namu.wiki/w/권채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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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맹균(李孟畇, 1371년 ~ 1440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이색(李穡)의 손자이다. 자는 사원(士原), 호는 한재(漢齋)이다. 공조판서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385년(우왕 11년) 문과에 합격해, 성균직학(成均直學)·사재소감(司宰少監)·내서사인(內書舍人)·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예문관직제학을 지냈다.

1406년(태종 6년) 사헌부집의로 있으면서 사송(司訟)을 지체한 죄로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사면되었다.

그 뒤 지영천군사(知永川郡事)·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성균관대사성·좌사간·예조참의·경승부윤(敬承府尹)·충청도관찰사·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차례로 지냈다.

1421년(세종 3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예조참판·경기도관찰사·공조판서·예조판서를 지냈다.

1425년 진위사(陳慰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조와 병조 판서를 지냈다.

1427년 좌빈객(左賓客)이 되어 세자를 가르쳤고, 그 뒤 의정부참찬 겸 대사헌·이조판서·예문관대제학을 역임하였다.

1429년 사은부사로 북경에 갔다가, 다음 해 돌아와서 의정부참찬이 된 뒤 성균관대사성·판한성부사·이조판서·예문관대제학을 지냈다.

1437년 예문관대제학 겸 판이조사(藝文館大提學兼判吏曹事)가 되니 판이조사를 겸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우찬성 겸 판이조사·판의주목사·좌찬성을 역임하였다.

1440년 부인 이씨가 심한 질투로 종을 죽인 사건으로 파면되어 황해도 우봉현(牛峰縣)으로 쫓겨났다가, 방면되어 돌아오는 길에 개성부에서 70세로 죽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가 부인에게 압제를 받아 늙어서 죽음도 편하게 못했음을 불쌍하게 여겼다.[

  • [질투심 많은 아내 때문에, 충청감사 이맹균가계 계승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일이며, 부정한 행위는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세종대에 이맹균(李孟畇·1371∼1440)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을 지내는 등 관료로서는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질투심이...충북일보2011.08.30]

그는 성품이 온량하고 일찍부터 가업을 이어서 시문(詩文)이 전아하였다. 자식은 없었다.

시호(諡號)를 문혜(文惠)라 하였으니, 학문에 부지런하여 묻기를 좋아함이 문(文)이고, 부드러운 자질로써 백성을 자애함이 혜(惠)이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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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吳陞, 1364년 ~ 1444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숭지(崇之)이다. 판한성부사와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여동생이 안평대군(세종의 제3자)의 처조모가 된다.

처음에는 음보로 벼슬에 올랐으나 1382년(우왕 8) 진사·생원시에 연이어 합격하고, 다음해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좌헌납(左憲納)을 역임하고 곧 전교부령에 승진하였으며, 우사간대부를 거쳐 1407년(태종 7) 형조참의, 다음해 병조·이조참의를 지냈다. 그뒤 충청도관찰사·한성부윤·판한성부사 등을 지냈으며, 1422년(세종 4) 성절사(聖節使)로 북경(北京)을 다녀온 뒤 개성부유후에 임명되었다.

다시 공조판서·예문관대제학·함길도감사 등을 역임하고, 1430년(세종 12) 의정부참찬에 임명되었으며 다음해 대사헌이 되었다. 그뒤 중추원사·예문관대제학·지중추원사·판중추원사 등을 역임하였다.

1436년 안석과 지팡이를 받았으며, 1443년 종을 때려 죽여 경기도 죽산현(竹山縣)에 안치되었다가 방환되기도 하였다. 승정원·사헌부·사간원에 있으면서 임금과 신하들을 깨우쳤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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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함길도 감사 민심언, 전 영흥부사 박관, 교동현 수령 이종규, 최유원, 행사직 임가란 인물이 노비를 죽인 것으로 세종실록에 나온다고 한다. 

 

[정보]책-"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우문에 대한 현답: 저자 권오향, 김기섭 외 | 보고사 | 2020.1.10." 98~106쪽